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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73화 (173/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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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19

탈출 상황에서 닥터 요하임이 죽기 직전에 외쳤던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 자기가 수억 명의 인류를 구한 구원자라는 이야기는 유진에게 약간 흥미를 일으켰다.

이후 유진은 과거 신문 기사에서 어렵지 않게 관련 내용을 특정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 발원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간 특이성 보르데텔라 감염증은 반년 정도 전세계를 공포로 물들였었다. 신문 기사에는 길거리에서 누군가 기침을 하자 패닉을 일으킨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 이야기나, 마스크를 쓰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총에 맞아 죽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명 이상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특히 심각했던 것이 사망자 중 7할 이상 15세 이하의 아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이 병은 유달리 아이들에게만 치명적이었고, 그것이 사람들이 이 병을 더 끔찍하게 여기는 이유가 되었다.

치료제 공급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수십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만을 넘어 수억 명이 더 죽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평가였다. 인류의 한 세대 정도가 삭제될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당시 전 세계 인구의 최소 70% 이상이 백신을 접종받거나 치료제를 복용한 후에야 펜데믹이 종식되었다.

당시에 치료제를 개발한 에델사 연구진들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고, 실제로 전 세계에 조건 없이 치료제 제조 공식을 공개한 에델 사에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기도 했었다.

기업 그것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국적 의학 기업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고, 조금 과장해서 인류를 멸망 위기에서 구했다고 평가받는 업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그런 희생이 있었다면 그것이 옳은 일인가 잘못된 일인가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렵다. 수백 명 희생시켜 수억을 지킬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길 수 있지만, 희생당한 자들도 그걸 당연한 일로 여길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뷰포트는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 중에 자기 딸이 있어서 더욱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것이 유진이 몹시 복수를 원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복수를 위해서 나서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어디까지 복수의 대상이고, 어디까지가 죄 없는 방관자인가?

UE 수뇌부처럼 명확하게 복수의 대상이 되는 자들도 있지만, 그들을 묵인한 유럽과 미국의 지도자들이나 그들과 느슨한 협력관계인 다른 조직도 복수의 대상인가?

UE 수뇌부 중에서도 마담 보른이나 마담 앙주 같은 여자들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냥 부모가 UE 고위층이라서 실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끼어든 잔 루이즈 같은 여자도 죽어 마땅한가?

그녀가 죽어 마땅하다면 UE의 실체와는 거의 상관없이 그냥 마담 앙주의 공식 회사의 부하 직원으로 처음 유진과의 섹스에 동원되었다가 UE에도 발을 깊게 들인 에반젤린 린데르는?

하다못해 UE의 연구소의 그 쓰레기 같은 연구원들 사이에도 비밀리에 로자를 도왔던 숨은 협력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로자가 탈출을 계획하고 CIA와 접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떤가?

로자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다가 실험체로 전락하지 않았다고 그들도 죽어 마땅한 대상인가?

아니면 그 끔찍한 실험에 참여했음에도 숨어서라도 도왔다는 이유로 무죄인가?

닥터 요하임, 닥터 리샤르, 닥터 마리아 리페 같은 사람들은 좀 확고하게 원한의 대상이다.

할 수 있다면 UE 최고 수뇌부나 자기를 실험하던 그 개 같은 박사들도 쳐 죽이고 싶다.

하지만 유진이 탈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준 마지막 연구소장 옥사나 유센코는?

자기 몸에서 나온 신체 일부나 친구들의 신체 일부가 이식된 슈퍼 솔져들을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나긴 한다. 오늘만 해도 그 일본인 부대들을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다 쳐 죽인 것에는 그런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특이성 보르데텔라 감염증의 치료제와 백신은 결국 유진의 피를 숱한 실험체들을 죽여가며 실험해서 결국 살아서 항체가 발견된 존재를 찾은 것이었다.

결국은 화학적으로 제조되긴 했으나, 그것도 유진의 몸에서 시작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유진의 생체 조직을 타인에게 이식해서 적응시킨 후 그걸 다시 복제해서 만들어낸 대부분의 숱한 초인 에센스들과 그 근본 자체는 다를 것이 없는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다.

하물며 유진이 알기로 비슷한 방식으로 개발되어 일상적으로 쓰이는 약이나 치료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유진은 자기를 이용해 개발되던 수많은 약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진이 다친 상처에 바르던 일상적 상처 회복 연고에서도 기억 속 연구 흔적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죽여야 할 대상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은 죽여야 하지만 그냥 정액만 갈취하던 사람은 죽일 정도인가 아닌가?

사용한 양이 얼마나 많은지를 따져서 그램 단위로 형량이라도 정해야 하는 것인가?

100g은 죽여야 하지만 99g은 용서해야 할까?

알면서 사용한 사람을 죽이고, 모르고 사용한 사람은 용서해야 한다면, 그 둘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모든 것이 너무 모호했다.

물론 명백한 대상도 있다.

남은 닥터 마리아 리페 박사를 포함해 UE 수뇌부는 명백한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다.

하지만 솔직히 UE 수뇌부는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담 보른 같은 경우만 해도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알고 언론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유명 인사이기까지 한데, 막상 어디서 어떻게 그녀를 찾아야 하는지는 막막했다. 유명한 것과 별개로 그녀의 행적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물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유진이 직접 몸으로 뛰어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나이었다.

그녀조차 그런데 나머지 대부분의 UE 수뇌부는 유진도 이름조차 모를 정도였다.

그 일을 처리하면서 유진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진은 결국 유럽을 탈출해서 한국에서 소극적으로 생활하는 중인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거나, 어려움 없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때까지는 참고 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단지 아무리 그래도 가슴속에 쌓여 있는 분노와 증오 때문에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것들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버티고 살아 있으면 UE보다 자신이 더 빠르게 강해지고, 더 오래 버틸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유진은 이제 고작 스무 살이고, 그의 수명은 절대 1~2백 살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이런 모든 고민을 뷰포트 중령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자기 복수의 목표에 대한 우선순위가 아주 애매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뷰포트는 유진의 입장에서 미군 소속 슈퍼 솔져들이 직접 공격하러 쳐들어오지만 않는다면 거의 관심 외라는 확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뷰포트가 보기에 이 정도면 정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자기와 자기를 이곳으로 보낸 슈퍼 솔져 동료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이건 유진이 뷰포트에게 호의를 느끼고 부드럽게 대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실 미국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너희들과 가능한 우호적으로 지내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언젠가 받았던 충고대로, 이 시대 이 세계의 최종 보스는 미국이었다. 싸운다면 가능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둘 필요가 있었다.

이 화제가 끝나고 서울로 가는 남은 시간 동안에는 좀 더 느슨하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그중에는 유진에게 꽤 고무적인 이야기들이 있었다.

우선 뷰포트는 자신이 당분간 계속 한국에 머물며 미리엄과 별도로 유진과의 대화 창구가 될 것임을 알렸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생긴 슈퍼 솔져들에게 보이는 신뢰 회복의 일환이자, 현재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앤 헤이즈와 정부 그리고 여당에 대한 야당의 견제였다. 뷰포트 중령이 유진과 접촉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야당 정치권의 지원이 있었던 것이었다.

뷰포트는 그 외에도 이런 미국 내 정치적 상황이나 슈퍼 솔져에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갈등 등에서도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유진이 잘만 사용한다면 앞으로 미국과의 협상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것은 유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유진이 흥미가 생긴 부분은 뷰포트가 유진에 관해서 어느 정도 교섭이나 협상에 관련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진이 원하는 장비의 제공에 관해서 권한이 제법 컸다.

미리엄이 이미 한번 선을 그었듯이 소총이나 저격총 혹은 수류탄 같은 것은 안 되지만, 권총 탄환이나 연막탄 그 외 군 물품이라는 증거가 표 안 나는 자질구레한 전술 용품이나 소모품은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뷰포트의 제안은 유진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유진은 뷰포트와 실전 상황에서의 여러 가지 노하우나 현재 미군이 슈퍼 솔져 부대를 운영하면서 쌓고 있는 특별한 전술 전략 등에서도 유익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내릴 즈음에는 추후 통화를 약속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보기로 하죠.”

뷰포트는 유진이 원한 곳에 그를 내려놓고는 미련 없이 떠났다.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유진의 행적을 밝히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떠나는 그의 차량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진이 연구소를 벗어나고 만난 사람 중에서 말이 통하고 신뢰가 가는 거의 첫 번째 사람이었다. 짧은 시간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인데도 그랬다. 차민영처럼 특수한 상대를 빼면, 동업하는 사장님 고영은보다 오히려 더 친밀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몸에서 그 어떤 초월적 능력의 흔적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세뇌가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이 신뢰감이 배신당한다면 꽤 아프겠지만, 유진은 일단 자신의 직감과 본능을 믿고 그를 신뢰하기로 했다. 최소한 미리엄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지금 만날 상대와는 비교도 안 되고.

유진은 꺼두었던 전화기를 켜고 기억해 둔 번호를 눌렀다.

이제 다음 일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미국이 제일 마지막까지 고민해야 할 상대라면, 이쪽은 이제 무조건 제일 먼저 처리하겠다고 생각한 상대였다.

잠시 신호가 가다가 익숙한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다.”

“미스터 헤이즈? 이 번호는 새 번호인가요?”

고주희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져 왔다. 이유는 한 두 가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굳이 전화로 길게 이야기할 생각도 아니었다.

“여기 당신 회사 1층 입구 앞의 도로다. 내가 올라갈까? 당신이 내려올래?”

유진의 질문에 대한 답은 비명이었다.

“악!”

몸을 어딘가에 세게 부딪친 소리는 덤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제대로 된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내려 갈게요. 금방 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아악. 내 무릎.”

유진은 한숨을 좀 쉬기는 했지만, 그녀를 재촉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만난 뷰포트 중령이 유진이 만난 가장 첫인상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고주희는 유진이 만난 첫인상이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

만나자마자 죽여버린 놈들은 애초에 사람이 아니니 제외하면, 처음에는 죽일 생각으로 만났던 최 마담, 최명선도 고주희보다는 덜 나쁜 인상이었다.

유능한 나쁜 년.

이것이 차민영에게 들은 것으로 그리고 첫인상으로 느낀 고주희였는데, 몇 번 여러 가지 일로 만나다보니 인상이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어설프게 머리 굴리는 뭔가 좀 미덥지 않은 여자.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는 꽤 불편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적당히 이번 일 처리에 화난 척을 하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유진은 허둥지둥 나오고 있는 고주희를 보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진이라고 무조건 때려 부수는 것만 아는 바보는 아니었다.

유진은 성화 쪽 인간들을 우선 적으로 처리하겠다고 결심한 이상 오히려 성화 쪽의 긴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피해를 받은 여성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본인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받을 보상이 있는 상대가 보상도 받기 전에 공격하리라 생각하지 못할 테고, 보상받은 이후에는 그걸로 끝이라고 착각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딘 스무 살짜리가 자기 진짜 목숨을 걸고 사내 정치와 비밀 업무에 십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대기업 경력직을 너무 우습게 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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