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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75화 (175/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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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21

고주희가 기겁하건 말건 실장은 옛이야기를 계속했다.

여러 방식으로 행해진 갖가지 암살 및 납치 시도들에서 회장 일가가 인간으로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치거나, 말도 안 되는 우연 혹은 이상 현상으로 암살이나 납치가 실패로 돌아간 일화들을 여럿 들려주었다.

고주희에게 제일 흥미진진했던 이야기는 성화의 유씨도 아니고 데릴사위로 들어온 유명선 회장의 동생인 유준선 부회장이 중동 호텔에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본 닌자 차림의 암살자에게 습격받자 마침 중동 왕족에게 선물 받은 중동식 칼을 들고 싸움을 벌여서 베어 죽인 이야기였다.

그 외에도 유민영이나 유인영, 유건영의 3남매는 물론이고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번에 죽은 정동후조차 그런 원한을 사고도 그동안 멀쩡히 잘 살았던 이유가 그거였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장의 결론은 이거였다.

“성화의 유씨는 절대로 외부 사고나 암살로는 안 죽어. 이유는 몰라. 하지만 안 죽어. 무슨 신의 가호라도 받고 있는지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도 어떻게든 위험을 피하고 살아남더군. 주변에서 대신 죽어 나갈 뿐.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야. 수십 년 전부터 이쪽 선배들은 다 그렇게 믿고 있지. 경쟁 기업들도 말이지. 흐흐흐.”

실장은 마지막 웃음은 음침하다기보다 공포를 질려 있었다.

하지만 고주희에게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유건영 사장님은 뭐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계자이자 장남이 사고로 죽었잖아요?”

“그게 중요한 거지. 그게 진짜고. 그 이야기가 자네에게 주는 진짜 보상이야. 자네 혹시 유건영 사장에게 사생아 아들이 있었던 것 아나?”

고주희는 혹시 유진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고 뜨끔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어서 실장이 늘어놓은 이야기는 유건영 사장이 사고로 죽기 직전 무렵에 회사에서 벌어졌던 그야말로 조선왕조의 야사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계승 투쟁에 나올 법한 수준의 이야기였다.

당시 회사에서는 유건영이 차기 후계자로 거의 굳어져 가고 있었고, 유건영이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면 두 누나인 유민영이나 유인영은 선대 회장 당시의 다른 여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금 재산이나 좀 물려받아서 회사에서 완전히 퇴출당하리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남동생보다 먼저 회사에 자리를 잡았던 두 딸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내부에서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계파 싸움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두 딸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생을 편애하는 것 같다고 화를 냈고, 유건영은 아버지가 누나들을 억제하지도 않고, 자기를 후계자로 명확하게 공인해주지도 않는다고 화를 냈다.

이 개막장 상황에서 먼저 사고가 터진 것은 유건영이었다. 두 누나가 힘을 합쳐서 동생을 엿 먹이려고 미인계를 사용했고, 그렇게 접근시킨 여자가 사생아 아들을 낳았다. 이 사생아는 유건영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회사의 실질적인 주인인 이들 남매의 어머니 유초혜 여사는 어디까지나 여자였고, 평생 자기 외의 여자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남편과 살았다. 거기에 부친 유명선도 재벌 회장이며 배우 뺨치는 미남에 어지간한 운동선수도 비교가 안 되는 건장한 몸으로도 평생 아내 외의 여자에게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은 것이 가장 유명한 남자였다.

그런 부모의 아들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워 사생아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치명적인데, 두 누나의 부추김을 받은 그 여자는 딸만 있는 본처를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물밑에서 소동까지 벌이기 시작했다.

‘어? 잠깐 이거 분명?’

고주희는 이 이야기와 똑같은 패턴을 분명히 유진의 출생에 관련된 이야기에서 들었었다.

실장은 몰랐지만, 이건 두 누나가 예전에 엄마가 동생에게 써먹어서 성공했던 방법을 비슷하게 써먹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둘 다 화나게 할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둘은 어차피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때 유건영은 그야말로 해서는 안 되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치명적인 결정이요?”

“응. 그 양반이 다른 것은 몰라도 부모님에게 그 차갑고 냉정한 성품 하나는 정확하게 물려받았지. 그걸 써야 할 곳과 쓰면 안 되는 곳 구별을 못 해서 문제일 뿐.”

유건영에게 여자건 사생아건 애초부터 정 따위는 없었다. 아니 있었어도 자기 후계자 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자와 자식이 문제가 되고 그 배후에 누나들이 있다는 것을 안 유건영은 간단하게 둘 다 제거를 결정했다.

“여기서 진짜 문제가 발생했지. 당시 유사장은 회장님 영향력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 일을 자기가 사장으로 있던 성화건설에서 독자적으로 구성한 자기 팀에게 맡겼어. 우리 제2부속실 몰래. 걔들은 몰랐던 거지. 성화의 피가 가지는 의미를.”

놀랍게도 암살은 성공했다. 아기도 애 엄마도 완벽하게 사고로 위장되어 제거당했다. 성화 핏줄은 살인이나 사고로 죽지 않는다고 믿고 있던 제2부속실 직원들이 당황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결정을 내린 것이 유건영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임직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회장 직속이라고 해도 유건영 후계자론을 지지하던 기획실과 제2부속실 전부가 반으로 갈라져서 유민영과 유인영으로 말을 갈아탔다.

“엥? 말을 갈아타요?”

“우리 모두 느끼고 있었던 거지. 죽을 리가 없는 사람이 죽었다. 그건 성화 직계가 다른 직계를 직접 죽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가능하다면, 왜 회장님과 사모님은 그 걸리적거리다 못해 살인 청부까지 시도한 패륜아 쓰레기 같은 여동생 자식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어?”

“응. 그래. 그리고 아기와 아기 엄마가 죽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어. 딱 3일 후, 아기랑 아기 엄마 장례식이 끝나서 화장하고 재가 되어 뿌려진 그날이었지. 3일 전 모자가 사고로 죽었던 것과 정확하게 같은 시 분 초까지 같은 시간에 유건영 사장이 사고로 죽었어. 참고로 유건영 사장 혼자 죽은 것도 아니야.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생아 암살에 동원되었던 유건영 사장의 직속 팀 전원이 역시 정확하게 시 분 초까지 같은 시간에 사고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같은 것으로 전원 사망했어. 전부가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고주희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부회장에게 유씨 일족의 그 비현실적 심연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유인영 여사가 정동후가 일으킨 그 개짓거리에 자기 아들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도 조카를 살려둔 것이 설마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혈족 간의 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 두 자매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여도 자기들끼리 직접 칼은 안 들이미는 이유가 이거야. 어지간한 고위층은 다 알고 있지.”

여기까지 이야기한 실장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마지막 의견을 덧붙였다.

“그런 면에서 일단 난 그 더블M이 아직 살아 있는 것만 봐도 정동후 일과 관계가 없는 것 같아. 아니면 정동후가 강소진양 상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서 오히려 액을 당한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이걸로 끝이야. 보아하니 더블M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으려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먼저 죽은 사람들 중에는 정말 상상 초월한 인물도 있었지. 그래서 난 솔직히 더블M은 걱정이 안 돼. 단지 그 과정에서 내 딸과 사위가 해를 입을까 봐 걱정했을 뿐. 그러니 고 과장 자네도 더블M에 대해서는 이제 좀 긴장 풀어. 조만간 더블M에게 틀림없이 문제가 생길 테니까.”

실장은 이 이야기를 거의 신을 믿는 신앙처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알려줌으로서 고주희도 자신들의 인원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실장과 기획실 사람들에게 있어 유민영이나 유인영이냐의 계파 싸움은 사실 그렇게 치명적으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누가 회사의 실권을 잡건 기획실과 제2부속실은 이미 회장이라도 그리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복마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명선 회장과 유준영 부회장이 직접 다 때려 부수고 수십 년에 걸쳐 다시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모를까, 유민영이나 유인영 혹은 그 자식들에게는 그런 역량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 자체의 네트워크였고, 실장은 이걸로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른 고주희도 자기들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 심연을 알게 된 자들은 절대로 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전례를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또 다른 심연을 접한 고주희는 전혀 다른 부분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은 유건영 사장이 그런 성격이었다면, 그의 사생아인 유진의 지금 그 성격에는 유전적인 요인의 영향도 있는 걸까? 아니면 유전적이라기보다 그 혈통에서 이어지는 뭔가가?’

그리고 확신하고 있었다.

‘같이 자란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혈족의 암살 시도로 죽었다고 알려진 상태로 외국에서 숨어서 살았지. 혈족이라고 피를 보는 것을 거리낄 리가 없지. 정동후의 예도 있고. 강소진 양을 아낀다면 오히려 그 생부인 유성준 이사도 더 거슬릴 거야.’

뭘로 봐도 상황이 명백했다.

그래서 안심이 되었다.

‘이제 이건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야. 혈족끼리 죽이고 죽이는 것까지 내가 어떻게 막아. 이건 윗분들이 정리하셔야지. 마침 사모님이 유민영 여사나 정동성 실장 관련되면 당신에게 알리라고 하셨으니 이건 완벽하다.’

고주희는 유준선 부회장과 유초혜 여사에게 이 일을 어떻게 떠넘길 것인가를 계획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아무리 이상해도 그녀의 본질은 직장인이었고, 비극이고 혈투고 자시고 자기 업무 범위를 벗어난 것까지 책임질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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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희가 커지다 못해 자기 목숨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위쪽에 넘길 명분을 확보해서 기뻐하던 것과 비슷한 시각, 유진이 휩쓸고 간 회(會)의 비밀 시설에서 여자들을 구출하고 뒷조사를 시작한 미국 측 인원들은 혐오와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지만 벌거벗은 여자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나신에 욕심을 느낀 인간이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서 표를 내고 행동으로 옮길 병신은 아무도 없었다.

유진이 맹활약을 벌인 전투를 복기하고, 죽은 적의 시신과 장비들을 수급하는 과정은 비교적 무난했다. 유진이 안전하게 확보한 중앙 통제실의 서버에서 시설의 비밀 자료들을 확보한 것은 환호성이 터질 정도의 잭팟이었다.

문제는 일단 기본적인 확인을 위해서 간략하게 들춰본 자료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혐오 그 자체였다.

거기에는 실험 데이터가 있었고, 실험에 동원된 대상은 마루타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렇게 부른 이유는 명확했다.

조사에 참여한 인원들은 다들 기본적인 교양 상식 정도는 있었고, 그래서 일본의 그 유명한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 통칭 731부대와 그 부대에서 벌어진 실험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찾은 자료가 딱 그거였다.

731부대가 그 시절에 했던 실험을 현대적 기술과 현대적 잔혹성을 더해서 현대인을 상대로 한 실험. 그리고 그 옛날과 마찬가지로 이 실험이 벌어진 장소인 한국과 동양인들뿐만 아니라 누가 봐도 명백하게 다수의 서양인에 대한 실험자료와 그중 미국인이 확실한 소수의 사람에 대한 자료들까지.

UE가 벌인 끔찍한 인체 실험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만, 이건 선명한 고해상도 영상 자료가 첨부되어 있었다. 사람 시체 옆에서 사람 피가 묻은 상태로도 에너지바를 태연하게 뜯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비위를 가진 특수부대원들도 구역질을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자료를 조사하던 사람들이 혐오감에 구역질을 참는 동안, 유진의 전투 상황을 분석하고 있던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

폭탄에 터진 사람 피와 살점과 뼛조각이 불에 타서 그을린 채로 천장과 바닥과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복도.

문제는 사람 몸이 분해되어 장식품이 되어 버린 그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폭발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유진의 모습이 분명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천장과 바닥과 벽 어디에도 유진의 흔적이 없었다. 뭔가가 폭발했고, 거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면, 폭발의 와중에 퍼져나간 것들이 그 장애물에 막힌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

그 폭발은 중간에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진행된 모습이었다. 영상 자료에 유진이 그 한가운데 분명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영상과 장소를 비교해서 조사하던 누군가가 곧 그걸 발견했다.

“영상 속의 M의 몸에 아무것도 묻은 것이 없군요. 그 폭탄과 불길과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그 와중에도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고, 옷에는 피 한 방울 안 묻었어요.”

누군가 급하게 회수한 유진의 장비와 옷을 확인했고, 유진이 근접해서 코앞에서 그렇게 총질을 해댔는데도 적의 것이건 본인의 것이건 옷에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유진은 무시무시하게 강하지만, 강하다는 것 자체가 공포가 될 수는 없다. 인류는 핵을 개발했고, 핵이 아니어도 그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가진 결전 병기는 한둘이 아니다. 유진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핵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핵을 무서워하는 사람보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더 많다.

미지는 공포였고, 지금 그들은 미지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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