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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80화 (18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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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죄송합니다. 한편으로 끝날 줄 알았던 10화가 아직 두 편 더 남았습니다.

그래도 2편과 3편도 곧 같이 올릴게요. 이러면 한편이나 마찬가지 인 것 아시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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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보셨나요?

재미있으셨다면 [추천]과 [즐겨찾기 등록] 부탁드립니다.

#010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 26

‘씨발, 이게 뭐지?’

고주희는 지금 패닉 상태였다.

실장에게 대충 그들의 편에 설 것처럼 굴면서 필요한 자료를 다 받아서 취합한 고주희는 재빨리 그걸 정리해서 유초혜 여사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유능함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중이지만, 그건 부와 명예와 승진을 노리고 하는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이건 명백하게 더 유능하게 잘 처리해봐야 더 목숨만 위험한 일이었다.

감각이 좋은 그녀는 재빨리 이걸 유초혜 여사 선으로 넘기고 가능한 자기의 관련을 줄이려고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임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보고를 올리고 하루도 되지 않아 관련 자료 전부 챙기고 답변까지 잘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본가 사택으로 소환되었다.

그것 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 달리 유초혜 여사 직속인 그녀는 본가로 소환되는 일이 그리 드문 편은 아니었다.

조금 더 나가서 자기를 맞이한 자리에 유초혜 여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준선 부회장과 유명선 회장까지 동석하고 있는 것까지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다. 고주희의 이 일가의 심연에 가장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같이 있었던 분들이니까.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 였다.

‘유혜주 이사가 왜 여기에 있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유진의 이복누나 격인 FS E&A의 유혜주 이사가 방 한쪽에 얌전히 앉아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FS E&A는 방송, 영화, 음악 등 미디어 관련 사업을 주력하는 기업으로, 같은 3대 재벌 중 하나인 태성에서 분리되어 나온 TS미디어 그룹과 함께 대한민국 문화 사업계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 기업이었다.

법적으로는 별도 그룹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계열 그룹으로 취급되어 태성 그룹 본가의 영향력 하에 있는 TS미디어 그룹과는 정반대로, 성화의 자본과 성화의 인력과 성화의 인맥과 성화의 능력을 동원해서 만들어진 기업임에도, 이름에 성화조차 안 붙어서 인사 교류조차 없이 완전 별도로 운영되는 특이한 기업이었다.

죽은 장남이 남긴 유일한 직계 친손녀인 유혜주가 어린 나이에 고모들과의 싸움에서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한 유명선 회장과 유초혜 여사가 손녀에게 안전한 재산 상속을 위해 본사와의 완전 분리를 계획하고 만든 회사라는 것이 성화 내부는 물론이고 재계 전체가 중론이었다.

실제로 직급은 그냥 여러 이상 중 하나지만, FS E&A의 사장조차 중요 사항에는 그녀에게 결재받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회사의 거의 실소유주 취급을 받고 있었다.

회장 손자로 차기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장녀 유민영의 아들 정동성 실장이나 차녀 유인영의 아들 유성준 이사도 각자 소속 회사에서 사장들에게 명백하게 부하 직원 취급받는 성화의 원래 분위기와 완전히 차이가 나는 존재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성화 그룹 직원들이 알기로 유혜주 이사는 이미 완전히 성화에서 분리되어 나가서, 성화와 관련된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평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런 유혜주가 이런 일에 떡하니 끼어들어 앉아 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회장님과 사모님은 딸들이 무슨 지랄을 하건 사내에 무슨 계파 싸움이 벌어지건 상관없이 직계가 아닌 사위 가문으로 회사를 넘길 리가 없다는 소수 의견이 그냥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유혜주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고주희에게 그런 많은 생각과 고민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유혜주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그 대단하신 회장님과 부회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상석을 주시하게 만든 존재, 이제는 오늘내일하시는 몸이라 거동도 못 한다고 알려진 전대 사모님 유혜선 여사가 100살에 가까운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정한 모습으로 고주희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유혜선 여사를 바라보던 고주희는 눈이 마주친 순간 유리알처럼 번득거리는 유혜선 여사의 눈빛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몸 위에 거대한 바위라도 얹어진 압박감이 느껴졌다.

“네가 요즘 그 아이를 담당한 아이라고? 흠. 혜가 그래도 아직 눈이 멀지는 않았구나. 제대로 골랐어. 뭔 소리인가 싶나?”

당황하는 고주희를 바라보며 유혜선 여사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 가문에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많이 억울한 마음인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 신세가 자네 원래 신세보다는 훨 나을걸? 허접한 잡귀에 신내림 당해서 어쭙잖은 병신 무당으로 살거나, 밑바닥에서 몸 팔면서 사는 처지보다는 지금 처지가 그래도 낫지 않은가?”

고주희는 이게 뭔 소리인가 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유씨 일가는 원래 이 땅에서 가장 유명한 무녀의 일족이었다는 이야기와 유초혜 여사가 장남의 액막이를 만들려고 골랐던 여자인 유진의 생모도 자신들과 비슷한 무녀 가문의 후예였단 이야기였다.

하다못해 차민영의 배후 조사에도 죽은 그녀의 모친이 원래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걸 거부했고, 그래서 그녀가 죽었을 때 신벌이 내린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고주희 본인을 포함해서 비슷하게 성화의 장학생으로 자란 여자들은 모두 원래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악역이 있다는 과거와 함께 다들 유능하고 감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 여자들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고주희는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대충 알아들었지? 우리가 보는 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불쌍한 아이들 함부로 이용해 먹으면서 악업을 쌓는 바보짓을 할 리가 없지. 다 그럴 만하고 서로 도움이 되니까 그렇게 한 거야. 그 와중에 업을 감당해줄 좋은 남자 만난 아이들은 잘 풀어서 보내 주는 일도 했고 말이야. 하긴 이런 말도 요즘 것들 하는 짓을 보면 믿을 수 없긴 하겠지.”

“흠흠, 어머님.”

“엄마, 그만해. 뭐 좋은 이야기라고.”

자식들 하는 꼬라지가 있어서 민망할 수밖에 없는 유명선 회장과 유초혜 여사가 유혜선 여사를 말렸다. 유준선 부회장과 유혜주 이사는 그냥 자기들은 이 방에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모른 척했다.

유혜선 여사가 그중 딸에게 눈을 부라렸다.

“나도 죽은 니 동생들 생각하면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난 명선이 건져서 너랑 결혼시켜줬고, 저기 준선이도 내가 멀쩡하게 잘 키웠다. 혜주도 내가 키운 거나 다름없지. 그런데 넌 대체 뭐니? 자식 손자는 고사하고 사위와 며느리 중에도 제대로 된 연놈이 하나도 없어. 이것도 결국은 다 니가 저지른 일이잖아!”

“엄마, 제발!”

고주희는 그 무서운 유초혜 여사가 자기 어머니에게 구박받는 신기한 모습을 보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는 유진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100살이 넘은 유혜선 여사가 장난처럼 딸을 타박하면서 표 안 나게 뿜어내는 기세와 위엄이 그 살벌한 유진만큼이나 강했다.

“흥. 임자. 준비한 것 가져와바.”

딸과 투덕거림을 끝낸 유혜선 여사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 때, 고주희는 벌벌 떨며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그런 상황을 먼저 예상이라도 한 듯이 유준선 부회장이 재빨리 움직여서 그녀가 준비해온 태블릿을 대신 집어서 공손하게 유혜선 여사에게 내밀었다.

유혜선 여사는 우아한 디자인의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더니, 100살 할머니답지 않은 능숙한 모습으로 기계를 다루면서 내용을 확인했다.

잠깐 시간이 흘러 숨은 쉴 수 있게 된 고주희는 그녀가 보여주는 나이가 무색한 모습에 감탄하다가, 그녀가 선대 회장과 함께 성화의 바탕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열심히 자기 모친 흉내 낸 유초혜 여사가 그 카리스마와 별개로 사내에 분란만 만들었다는 평을 들은 것과 달리, 유혜선 여사는 재계에서도 명실공히 창업주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 여걸이었다.

그 대단하신 유명선 회장이 나이 먹고도 장모를 무서워하는 것은 단지 그녀가 어머니나 다름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참 차가운 눈빛으로 자료를 훑어보던 유혜선 여사는 중간에 몇 번 손을 머뭇거리며 안 좋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결국 고주희가 작성한 보고서의 끝까지 다 확인했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임자. 일단 그 아이가 민영이네 애들만이 아니라 인영이네 애들까지 노린다는 증거 같은 것은 없는 거지? 이 부분은 그냥 임자의 추측인 거야, 맞지?”

고주희가 긴장으로 마른 목에 침을 삼켜 넣으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네, 일단은 제 추측입니다.”

“하지만 그걸 여기다가 쓸 정도로 강하게 예감한 거겠지. 그리고 임자 같은 사람이 그 아이랑 직접 얼굴 보면서 나눈 이야기로 예감한 거면, 이건 진짜라고 봐야겠지. 하아. 조만간 딸들만으로도 모자라 손녀들 장례식까지 내 손으로 치르겠구먼.”

고주희의 속에서 이미 증손자인 정동후 장례식 치렀습니다만 생각이 불쑥 튀어 올랐다.

사실 고주희는 지금 분위기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이 모든 일이 유씨 일가의 선대부터 쌓은 악업이 튀어나온 일이고, 유씨 일가가 지금도 저지르는 악업의 결과인데, 그 피해는 오히려 고주희 그녀를 포함한 애꿎은 성화의 직원들이 보고 있다.

정동후의 일 당시에 죽은 성화 건설 직원을 제외하고도, 이번 일에서만 유진이 요구하던 여자들을 확보하는 가운데 벌어진 총격전으로 죽은 외부 고용 직원만 셋이었다.

아무리 성화의 밥을 먹고 사는 처지이고, 그것도 나름대로 배려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절대로 그럴 만하다고 받아들일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분위기를 보니 유진이 자기들 혈족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진짜 자기들 가문 내의 싸움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그런 고주희의 속내가 뻔히 보였기 때문에 유혜선 여사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고주희를 탓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건 확실히 유씨 일가의 잘못이고, 따지고 보면 그 모든 원죄는 신과의 약속을 회피할 수 있다고 철없는 생각을 했던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유혜선 여사의 시선이 고주희가 아닌 사위 유명선 회장에게도 향했다.

“명선아, 너도 이거 다 본거지?”

“네, 어머니.”

“어떻니? 민영이랑 인영이 애들 다 죽어 나가도 회사 괜찮을까?”

유혜선 여사는 성화의 창업주였다. 그리고 성화는 죽은 남편과 그녀가 함께 남긴 자식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회사에 대한 애정은 유명선 회장보다 그녀가 더 높았다.

유명선 회장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오너 바뀌었다고 문제 있을 회사라면 망해야죠. 애초에 민영이나 인영이가 회사를 위해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동후나 성준이가 제법 유능하다고 해봐야, 회사에 걔들보다 훨씬 우수한 직원들 한둘이 아닙니다. 막말로 성화에 더 이상 유씨가 남지 않는다고 해도 회사는 살아남을 겁니다. 저 회사 그렇게 허술하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고주희는 자신과 손자의 일임에도 차갑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과연 회장님이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유혜선 여사는 아니었다.

“쯧쯧, 말은 그렇게 차갑게 해도 마음은 미어지는구먼.”

“하아,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고 손자인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민영이랑 인영이 보호하자고 그 아이를 막아서는 순간, 재앙이 딸들을 넘어 저와 집사람은 물론이고 어머니와 혜주 그리고 준선이네 애들 에게까지 덮쳐올 거라는 걸요. 성화 전체가 불타오르는 꿈도 꾸었습니다. 아무리 제 딸이고, 제 손자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서 지킬 수야 없지요.”

방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씨발, 회장님도 그냥 평범한 엘리트는 아니라는 거지, 이거?’

고주희는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더 깊어지는 이 심연에 점점 더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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