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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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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Scent of A Man, Dream of A Woman - 004
유진의 손가락이 꿈틀거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에 담긴 감정과 생각이 진짜 소리라도 된 것처럼 들려온다.
‘와, 이 백화점 VIP 샤X 매장도 이제 좆이네. 남창 새끼가 들락거려? 물 관리 안 하나? 얜, 또 눈빛이 왜 이래? 설마 외모 좀 멀쩡하다고 나랑 비교하는 건가? 아, 씨발. 내가 여기서 내가 누구인지 한 번 보여줘야 하나?’
저 남자가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텔레파시 계열의 마인딩 리딩 능력으로 엿들은 것인지 아니면 머릿속에서 뭔가 이상한 망상 감각이 돌아가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는 않았다.
유진의 다른 능력에 비해 텔레파시 계열 능력은 발현 당시에 비해 거의 성장을 안 하는 편이었다. 가장 자주 사용하는 디텍션(Detection)계열인 거짓 탐지나 진실 탐지도 정확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닐 정도이니까.
마음속 어디인가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선명해서 더 의심스럽다.
- 참을 거야? 참는 거야? 이걸? 그냥 질러 버려. 대가리를 날려 버려. 갈기갈기 찢어 버려. 답답하고 숨이 막히지 않아? 네가 원한 현실이 이런 것이었어? 이런 걸 참으려면 뭐 하러 연구실에서 도망쳤어? 왜 참아? 참지 말아! 이 세상에 널 막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도, 널 막을 힘이 있는 것도 없어!
그 목소리가 별로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몹시 설득력이 느껴졌다.
“자기? 저기, 유진씨? 여보세요?”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리지만, 인식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조금씩 감각이 고조되어 간다.
마주 바라보던 상대의 눈빛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느껴지지 않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대가리 날아가서 뒈질 놈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목소리가 계속 그런 유진을 부추긴다.
- 그래, 그 거지. 뭐든 다 네 맘대로 하는 거다.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넌 왕이다. 이 망가진 세계의 선택을 받은 주인이다. 참을 필요 없지.
유진이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에 살짝 힘을 주었다.
이제 살짝 구부러진 다리를 뻗기만 하면 유진의 몸은 남자의 앞으로 이동할 것이고, 손은 그 남자의 머리를 부숴버릴 것이었다.
목소리가 신이 나서 외쳤다.
- 그래 이 거지! 이것이 삶이지!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하는 것!
유진이 행동을 멈추었다.
도저히 들어 넘길 수 없는 소리가 있었다.
‘뭘 범해? 저딴 여자 따위를 내가 왜?’
살짝 꼭지가 올라갔던 유진이 마음속 흥분이 가라앉고, 정신이 돌아왔다.
상대의 눈을 마주 보던 눈을 깜박이자 주변의 소리가 들려왔다.
“진! 진! 진! 나 좀 봐, 자기!’
옷 갈아입으러 자리를 비웠던 차수연이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까 말까 고민하면서 애타게 유진을 부르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의 옷차림을 살폈다.
검은색 라인으로 포인트를 준 흰색 미니 원피스에 푸른색 브랜드 마크가 큼지막하게 강조된 굵은 은색 체인 허리띠가 눈에 들어왔다.
“흰색 옷에 은색 체인이라고? 나만 이상 한 건가?”
“허리선에 들어간 블랙 라인과 대비를 주려고, 아니. 자기 지금 그게 중요해?”
“옷 가게에서 옷을 고르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것이 있나?”
조금 전까지 근처에도 가기 어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겨서, 옆에 바짝 붙어 있던 주다혜가 멀찌감치 도망가게 만든 남자의 태연한 소리에 차수연은 기가 막혔다.
이어진 소란만 없었다면 차수연도 그냥 어이없지만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단지 주변으로 새어 나온 감정만으로도 유진이 무의식적으로 보호 중이던 주다혜가 처음에는 말려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질겁을 하고 거리를 벌리고, 훨씬 담대한 차수연조차 말은 걸어도 차마 손은 못 대고 있었다.
그 주 대상이 된 존재들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꺄아아아악!”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무슨 귀신을 만난 사람이나, 누군가에게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숨이 넘어가라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다가 숨을 몰아쉬다가 다시 비명을 지르는 꼴이 저러다가 진짜 숨이 넘어갈 것 같아서 걱정될 정도였다.
하지만 매장의 직원들은 그런 그녀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바로 옆에 그보다 훨씬 심각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수연과 사이가 나쁜 여자 및 그 일행들과 어울리면서 아무런 근거나 이유도 없이 자기 맘대로 차수연과 유진 등을 깔보고 특히나 같은 남자로서 자신보다 외모 면에서는 확실히 더 뛰어난 유진에게 질투를 느낀 그 남자는 돈과 신분을 이용해 유진을 깔아뭉갬으로써 자기 자존감을 채우려 했다.
그것은 유진이 진짜로 그가 생각하던 대로 남창에 호스트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그럴 권리가 없는 매우 저열하고 비겁한 짓이라는 것은 안중에는 없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들여다본 것은 그가 깔아뭉갤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범주에는 있지만 약간 많이 다른 어떤 것이었다.
[당신이 그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남자는 인간이 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심연을 들여다본 대가를 치렀다.
“손님, 손님!”
“비상 요원 불러! 빨리!”
“머리 이거 괜찮을까요?”
“만지지마! 뇌진탕은 우리 같은 일반인이 건드리면 더 위험해!”
멀쩡하게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뻣뻣하게 선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지면서 뒤통수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가게 안에 그걸 못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직후 함께 온 일행인 여자가 옆에 주저앉아서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직원들이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 없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 흰자만 보일 뿐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돌아간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만이었다.
“뭐야? 저 여자 오줌 싼 거야?”
소란이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모인 구경꾼 중의 누군가가 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고, 직원들은 그제야 역한 냄새를 느꼈다. 비명을 지르던 여자 손님의 치마 사이가 축축하게 젖은 정도를 넘어 바닥에 노란색 액체가 번져 있었다.
여성은 VIP는 아니어도 뜨내기손님도 아니었다. 나름 고객 관리 명단에 이름이 있는 손님이었다. 명품매장의 직원으로서 최소한의 관리는 해야 하는 상대라는 뜻이었다.
직원들이 여성을 감싸고는 급하게 가게 안쪽의 사람들 눈길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대피시켰다. 타월들을 가져와서 서둘러 흔적도 치웠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매장이 아니라 백화점 측의 안전 요원들이 급하게 출동해서 남자의 안전을 살피고, 119가 출동해서 남자를 실어 나가는 과정에서 남자는 소변만이 아니라 대변까지 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바지를 입고 있어서 여자처럼 표가 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와? 똥을 지려? 무슨 일이야?”
“몰라. 뭔 일이야, 이거?”
잔뜩 몰린 사람들이 다 그 꼴을 보고는 엄청나게 수군거렸다. 핸드폰을 들어서 사진과 영상을 찍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유진은 차수연과 주다혜를 살짝 가려서 그 카메라들에 자신이 그녀들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백화점 보안 직원들이 서둘러 손님들을 제재해서 촬영을 막았다. 손님 중 VIP가 제법 있었지만, 문제가 된 손님들도 VIP들이었다. 백화점 측에서 전력으로 제지하자 손님들도 대충 촬영을 멈췄다.
그래도 매장에서 소변을 지린 여자와 똥까지 지리고 실려 간 남자의 사진과 영상은 많은 손님의 스마트 폰에 담겼고, 백화점은 그걸 찾아서 지우기까지는 할 수는 없었다.
그 모든 소란이 매장의 입구를 막고 벌어졌기 때문에, 그때까지 유진과 차수연과 주다혜는 매장을 떠나지도 못한 채로 그 모든 일을 지켜 보고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유진만 태연했지만, 차수연과 주다혜도 곧 그런 유진에게 전염되어 태연한 마음으로 바뀌어 갔다.
그녀들은 이 일에 유진이 뭔가 관련된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냥 잠깐 생각만 하다가 관뒀다.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서로 쳐다보기만 하다가 한쪽이 갑자기 쓰러진 일이었다. 뭐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고, 증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서로 걱정할 사이도 아닌데 더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원래 자신들의 일에 다시 집중했다.
“그래서 그 흰색 미니 드레스로 결정한 건가?”
“응, 이 체인벨트랑.”
“난 그 벨트는 반대다. 같은 실버 벨트라고 해도 그것보다는 가죽이랑 은을 교차해서 만든 체인을 쓰는 그 전의 검은 벨트가 더 어울리지 않나?”
“그건 너무 수수하잖아. 포인트가 필요해.”
유진과 차수연은 태연하게 차수연의 옷에 대해서 품평하는 시간을 보냈다.
유진이 발산하던 그 무시무시한 기운과 살의를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던 매장 직원들은 그런 그 둘을 미친 것들 보는 눈으로 질려서 바라보았지만, 그것도 그들의 관심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분위기 이런데 결제는 가능한가?”
“나중에 다시 오던가.”
“그럼 그때도 같이 와줄 거야?”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
“쳇, 이거 오늘 안 사가면 나중에도 남아 있다는 보장 없어. 손에 들어왔을 때 사 가야지.”
드레스와 액세서리는 막말로 개나 소나 돈 모아서 하나둘쯤 장만한다는 핸드백과는 취급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샤X은 어떤 품목이든 매진되었다는 명목으로 사라질 수 있는 브랜드였다. 차수연은 유진이 골라준 기념비적인 첫 번째 옷을 놓칠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사고가 나긴 했지만 샤X 정도의 매장이 이 정도로 영업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증도 풀 겸 지나가다 들리는 VIP급 고객들로 오히려 손님이 늘었다.
매장은 곧바로 정상화되었고, 차수연은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차수연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매장 직원이 아니라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급하게 달려왔던 백화점 측의 직원이 유진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손님. 혹시 성함과 연락처를 제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질문 자체가 불손한 것에 비해 말투나 태도는 물론이고 눈빛까지 굉장히 공손했다. 말은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우며, 유진에게 거절해도 된다는 의지도 확실하게 전해지는 어조였다.
유진은 피식 웃었다.
비명을 지르고 소변을 지리는 추태를 벌이던 여자가 자기를 돌봐 주던 직원들에게 유진이 호스트바 남창이며, 유진이 자기들에게 해코지했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유진도 들었었다. 그리고 그 직원들이 상황을 물어보는 백화점 측 보안 직원에게 그걸 가감이 없는 정도를 넘어 어느 정도 부풀려서 전달하는 것도 들었다.
보안 직원들끼리 쓰러진 남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이걸 제대로 해결 못하면 백화점 위쪽에서도 난리가 날 정도로 나름 거물이라는 소리가 오가는 것도 들었다. 쓰러진 남자의 집안에서 백화점에 항의할 경우를 대비해 유진에 대한 신병을 확보해 두라는 이야기가 오갔고, 경찰에 고발해야 하니까 영상 녹화본 확인하라는 소리도 있었다.
유진의 이름과 연락처를 물어보는 것은 그런 것들의 일환이었다.
잠시 다시 겪게 되는 이 가소로운 짓거리는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 온 사람 치고 보안 직원이 유진에게 너무 공손해서 유진이 피식 웃은 것이었다.
그들도 이것이 꽤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걔 중 가장 젊은 직원이 유진에게 말을 걸었고, 그 직원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유진을 대하고 있었다.
다시 과격하게 변하려고 하던 유진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 쳇.
누군가의 혀 차는 소리를 들으니 흥분은 더 가라앉았다.
유진은 혹시 이럴 경우를 대비해 논의된 적이 있는 프로토콜 중 하나를 선택해서 전화를 걸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오면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만 해도 기분이 참 더할 나위 없이 더러웠는데, 이제는 몇 번 썼다고 익숙해진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습기는 했다.
“헤이즈입니다. 백화점 쇼핑 중에 작은 헤프닝에 휘말렸는데, 여기 직원들이 경찰도 아니면서 내 신분을 요청하는군요. 내가 뭔가 만만해 보여서 사건에 엮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대신 대응 좀 부탁합니다.”
유진이 전화기를 내밀자 직원 그걸 받았다. 어떻게 되었던 명품매장을 방문한 손님이다. 그런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는 전화기 너머를 상대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는 맞았으니까.
유진이 언급한 서류상 성을 들은 백화점 직원은 그걸 예명이라고 생각했다. 호스트라고 들었으니 그쪽에서 쓰는 별명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아니면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이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연예기획사인가? 아니면 깡패? 이거 혹시 변호사는 아니겠지?’
어쨌든 유진이 태연한 정도를 넘어서 꽤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직원은 혹시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름 조심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하지만 수화기로 들려온 이야기가 그의 뇌를 태워버렸다.
“저는 주한 미국 대사관 보안과의 보안조사관 앤드류 최입니다. 전화 받으시는 분 소속과 직함 그리고 성함 부탁드립니다.”
“예, 누구시라고요?”
“주한 미국 대사관 보안과의 보안조사관 앤드류 최입니다. 거기가 백화점이라고 하던데 어디 백화점이죠? 제 신분을 믿을 수 없으신 것 같은데, 대사관 공식 절차를 거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걸로 상황은 끝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