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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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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Scent of A Man, Dream of A Woman - 005
대사관 측이 마음을 먹으면 백화점 최고 경영자는 물론 책임 있는 오너 가문의 사람에게도 연락을 넣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프로토콜에 따라서 이건 공식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백화점이 외부 고객에게 열어 둔 창구는 오직 민원실만이다.
민원실에서도 비슷하게 이게 진짜 대사관에서 걸려 온 전화인가를 의심했지만, 필요하면 기꺼이 외무부나 상공부 혹은 행정부를 거쳐주겠다는 이야기에 해당 직원이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미국 대사관은 지금 상황을 자신들이 지정한 경호 대상자를 불법 억류 혹은 취조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경고를 받은 직원은 급하게 샤X 매장의 상황까지 파악해 상관에게 보고 했다. 그 보고는 아주 빠르게 최고선까지 올라갔다.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 해프닝이 심각한 사태로 커졌고, 백화점만이 아니라 샤X 한국 지사와 본사 쪽에도 급하게 보고가 들어갔다.
유진이 처음 자기 신분을 요구한 보안 직원을 대사관과 통화 연결해주고, 현재 은근히 유진을 가로막고 있던 보안 팀 책임자에게 담당 임원이 전화를 걸어오는 데까지 약 7분이 걸렸다.
막내를 앞에 세우고 일을 벌인 다음 유진이 대사관과 연결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긴가민가하고 있던 팀장이 화들짝 놀라 달려와 직접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손님.”
“알면 이제 길 좀 열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감금을 계속 할 생각입니까?”
“감금이라니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걸 굳이 따져보고 싶다면 나중에 법정에서 이야기해 봅시다. 보아하니 여기 보안 카메라들도 잘 갖춰져 있는 것 같고, 굳이 그걸 당신들이 처리해도 내 친구 핸드폰에 충분한 영상이 남아 있을 것 같군요.”
유진이 대사관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주다혜는 일이 재미있어진다는 생각에 폰을 꺼내서 촬영 중이었다.
유진이 사과를 받아줄 생각도 없고, 이 일을 그냥 넘어가 줄 뜻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자 팀장의 얼굴이 굳었다. 처음부터 유진에게 선입견을 품고 대하기 시작한 것 때문인지, 팀장은 이 상황이 되고도 유진을 여전히 아니꼽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모르는 척 지켜보고 있던 매장 지배인은 일이 심상치 않게 되어가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 백화점 측의 대응이지만, 장소가 이 매장이며 매장 직원들이 손님의 말을 함부로 옮긴 것이 이 일의 시작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팀장과 달리 그녀는 미국 대사관에서 관리할 정도의 VIP라면, 매장이 문제가 아니라 본사에 브랜드 차원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니저의 시선이 단골 VIP인 차수연에게 향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지만, 차수연의 시선은 냉랭했다.
그녀가 이 매장에서만 쓰는 돈이 연간 몇천 정도는 되었다. 어머니가 쓰는 것까지 합치면 억은 가볍게 넘었다. 그 정도면 이 매장에서의 매출만으로 이 백화점에서도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보다 높은 등급의 VIP는 진짜 재벌 직계나 그와 동급 정도는 되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사고 난 년과 놈의 등급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항공사 VIP 전담 크루 팀장이었던 그녀가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면 재벌 직계나 그 정도 급의 VIP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 년놈 때문에 오히려 자기 일행인 유진이 지금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이 그녀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지는 중이었다.
지금 차수연은 매니저의 요청대로 유진을 말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계산한 오늘의 구매 물건들부터 전부 클레임 처리해 버릴까 고민할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다.
아마 유진이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계산 끝났나?”
“응? 응.”
“그럼 가지. 더 지체하면 저녁 시간에 늦겠군.”
“사과는 안 받아 줄 거지?”
“사과? 그런 걸 받을 일이 있나?”
“이 사람들이 자기 가로막고 이름이랑 연락처 물어본 것 때문에 기분 나쁜 것 아니었어?”
“그 행동보다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로 기분 나쁘기는 하군.”
“그럼 사과받을 일 아니야?”
“그런 것은 내가 전화를 걸기 전에나 의미가 있는 거지. 공식적으로 해당 사항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건 내 손조차 떠난 일이다. 이제 대사관에서 알아서 하겠지.”
듣고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이제 진짜 여기서 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기분 나쁜 것은 둘째치고 이러다가 정말 저녁 식사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유진은 서두르는 의미를 담아 차수연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건 내가 들어주지.”
“짐이 너무 많지 않아? 이 정도는 내가 들 수 있는데?”
“민영씨가 신신당부하더군. 힘들지 않으면 쇼핑백 정도는 내가 다 들어주라고, 당신이 좋아할 거라고. 이거 2배가 된다고 해도 내가 힘들 일은 없지.”
“어머, 고마운 이야기.”
이상한 곳에서 이상하게 스윗한 감각을 드러내는 유진의 모습에 차수연이 방긋 웃었다. 주다혜는 슬쩍 질투하면서 나중에 자신도 단둘이 이런 기회를 만들 계획을 짰다. 차민영이 예상한 최대 쇼핑백의 수는 지금의 1/3도 안 된다는 것은 누구도 몰랐다.
유진이 잔뜩 가지고 있던 쇼핑백들을 한꺼번에 팔에 끼워서 들어 올렸다. 사람 몸통만 한 큼지막한 것으로 열 개가 넘었지만, 좌우로 나눠서 아주 가뿐하게 들었다.
유진은 물론 차수연과 주다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매장을 나서려 하자 보안 팀장이 당황해서 다시 한번 유진을 가로막으려 했다.
“잠시만요, 손님. 저희 지점장님이 지금 오고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차수연이 나섰다.
“그 손 더 내밀면 폭행으로 간주하겠어요.”
팀장은 무의식적으로 유진을 가로막기 위해서 유진의 가슴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그걸 눈치챈 차수연이 막아 세웠다.
팀장의 운이 좋았다.
그게 진짜로 몸에 닿았으면 유진은 말로 끝내지 않았을 테니까. 정말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팀장과 다른 백화점 직원들 그리고 샤넬 매장의 직원들은 이어진 차수연의 독설에 치명타를 맞은 기분이 되었다.
“길거리 좌판에서도 상인이 손님 몸에는 손을 안 대는 법인데 백화점 샤X 매장에서? 여기도 이제 다시 올 곳이 못 되겠네, 이거. 너무 병신 같아서 클레임 넣을 생각도 안들 정도야.”
팀장은 그제야 지점장에게 자기 갈 때까지 꼭 붙들어 두라고 말에 너무 집중해서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나 지점장이 하늘 같은 상관이지, 손님에게는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건 백화점 측의 총체적 실수였다.
애초부터 보안 팀장이 아니라 고객 대응 전문가인 플로어 매니저가 나서야 했을 일인데, 이걸 폭력 사건이라고 듣고 보안팀이 너무 나댔다. 그리고 그건 왜곡된 정보를 듣고 너무 편향적이며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샤X 매장 직원들의 잘못이 시작이었다.
차수연이 먼저 걸어 나가고, 유진도 뒤늦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팀장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며 그 뒤를 따랐다. 주다혜는 그 뒤에서 여전히 손에 폰을 들고 따랐다.
직원들은 감히 차수연을 가로막거나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유진에게 저지른 실수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여성 VIP의 몸에 손이라도 대었다가 성추행 같은 걸로 몰리면 그건 정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상황이 더 악화할 뿐이라는 것도 명백했다.
뒤늦게 도착한 지점장이 일행의 뒷모습을 보고 서둘러 달려가서 사과하려고 하는 걸, 상황이 악화하여 가는 것을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만 하던 플로어 매니저가 붙잡아서 말릴 정도였다.
그 이후 무난하게 주자창에서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길.
운전수 명목으로 따라온 주다혜가 운전하는 차의 뒤자석에 나란히 앉은 차수연이 유진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이었어?”
“응?”
“당신 주목받으면 안 좋은 것 아니야? 하지만 아까는 명백하게 일을 키우려는 느낌이라서 나도 좀 오버하기는 했는데, 괜찮은 것 맞지?”
차수연은 차민영에게 유진이 유럽에서 누군가와 쫓기며 싸우고 있었다는 정도는 들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이 움직이는 것에 약간 의문을 느꼈다. 하지만 차민영과 유진에 대해서는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는 너무 깊게 알려고 하지 말자고 이미 상의해 두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깊게 묻지 않았다.
그래도 유진이 일을 키우려는 느낌을 받고 자기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제대로 한 것인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유진이 방긋 웃었다.
유진은 차수연이 일부러 일을 더 키우려고 나선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가 자기 생각을 느끼고 도움을 주려고 했다는 부분에서 묘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건 또 색다른 감각이었다.
“일부러 나선 것이었나? 기분 나빠서 나선 줄 알았다.”
차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 하지만 당신 일이 아니면 그렇게 나서지는 않았을 거야.”
“어째서지?”
“별 소용 없는 일이니까. 내가 거기서 좀 센 척하기는 했고, 그래서 직원들도 좀 많이 당황했을 거야. 아마 직원들 여러 명이 징계도 받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백화점도 매장도 별로 큰 문제는 없을 거고, 나중에 나에게 앙심 품고 오히려 소소하게 복수하려고 들걸?”
유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샤X은 손님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자기들이 손님을 골라서 받겠다고 하는 브랜드야. 억만장자 VIP를 동양인이라고 리셀러 취급해서 매장에서 쫓아내고도 진심 하나 안 들어간 사과 하나 SNS에 올리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간 곳이지. 그러고도 브랜드 이미지에 실질적인 타격이 없었고. 나 정도는 명목상은 VIP라고 되어 있어도, 그냥 흔해 빠진 고객 리스트의 손님 중 하나일걸? 이야깃거리도 안 될 거야. 손해를 본 직원들이 앙심을 품고 블랙리스트에 올려서 엿 먹여도 신경도 안 쓸 정도로.”
“백화점은?”
“거기는 더하지. 거기는 태성그룹 계열사이잖아. 사장도 현 회장 막내딸이고. 대한민국 대통령도 허수아비 취급한다는 소리를 듣는 명실공히 국내 최대 재벌 가문 소속인데, 나같이 흔해 빠진 부동산 졸부 딸 따위에게 신경이나 쓰겠어? 그렇지 않아도 상류층 사이에서 애매한 내 평판이나 더 박살 나겠지. 경쟁 백화점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당분간 좀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조만간 아무도 기억도 못 할 거야. 그때가 되면 샤X처럼 나만 블랙리스트 올라간 진상이 되어 있겠지.”
유진은 약간 당황했다. 차수연의 말 대로 나름의 계산이 있어서 일을 키운 것이지만, 그녀에게도 이런 식의 영향이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기 일로 그녀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싫었다.
“괜찮나.”
“괜찮아.”
“정말?”
답지 않게 재확인하는 유진의 모습이 새삼 스윗 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차수연은 참지 못하고 살짝 유진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그거 알아?”
“뭐?”
“당신은 내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보여줄 수 있는 첫 번째 남자야. 나만의 남자는 아니고, 내가 당신의 여자라고 해도 되는지 부끄럽고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곁에 있다가 엄마 아빠에게 들켜도 자살할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고, 병신 같고 걸레 조각 같은 나를 편견 없이 대해주는 사람이지. 명품? 백화점? 내 평판? 당신 자존심과 당신 필요에 비하면 그따위 것은 나에게 고려 상대가 안 돼.”
꽤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도 차수연의 표정은 담담했다. 운전하면서 들은 주다혜도 마치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태연했다.
유진은 처음으로 이 여자들이 자신보다 사회 경험이 많은 연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애정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웃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주지.”
유진에게도 생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