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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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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Scent of A Man, Dream of A Woman - 010
본인 취향에 맞춰 고른 멋진 와인 잔의 목을 붙잡고 잔 안의 와인을 돌리고 있던 주다혜가 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기다리면 언젠가 쥐구멍에도 해가 뜨는 일도 있기는 있네요.”
위스키에 탄산수 섞어서 단순한 스타일의 하이볼을 만들고 있던 차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또 뭔 소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영 언니가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그 남자만이 아니라 차민영은 유독 미친놈들과 그 쓰레기들 사이에서도 가장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자들이 엄격한 차민영에게 반발이 적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나마 가장 싫은 쓰레기들은 그녀가 주로 처리했기 때문일 정도였다. 그리고 여자들이 생각하는 차민영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쓰레기를 제대로 쓰레기라고 구별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부분이었다.
차민영은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철저하게 능력과 성격 등을 칼같이 구별하면서, 이성으로서 남자 보는 눈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어질 정도라는 것이 그녀를 아는 모든 여자의 평이었다.
사실 유진도 좋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유미향은 유진에 대해서는 차민영이 또 이상한 것에 물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달이라면 몰라도 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밝은 곳의 사람은 아니잖아.”
감탄으로 내뱉은 말이라고는 해도 술맛 떨어지는 소리라서 유미향이 좀 웃겨보려고 했는데, 더 분위기 썰렁하게 만드는 아재 개그만도 못한 말이 나왔다.
“하아, 교수님들이란.”
주다혜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고 유미향이 욱했으며 이어지는 차수연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마저 나락까지 보내버렸다.
“우리 같은 떨거지들까지 추가로 붙고?”
원래 하이볼이 그렇게 마시는 술이 아닌데, 눈앞의 잔을 원샷 한 차수연이 벌써 세 번째 잔을 제조 중이었다.
결국 셋 다 입 다물고 건배도 없이 자기 잔들을 비우고 채우는 것에만 열중했다.
덕분에 정작 유진이 멘보샤를 내왔을 때는 그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에 셋 다 꽤 취한 상태였고, 그 취기에 이성이 살짝 마비된 주다혜가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행동을 선보였다.
“진. 너도 여기 좀 앉아봐. 누나들 마시는데 빼지 말고 같이 마시자.”
이미 2병이 넘은 소주를 들이켠 유미향은 눈을 크게 뜨면서 약간 놀라는 수준이었지만, 차수연은 마시던 하이볼을 컵에 뱉어냈다.
‘이년이 미쳤나?’
끽해야 포도주 한 병밖에 안 마신 년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지 경악하던 차수연은 그제야 주다혜가 마시던 와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 와인은 알콜 도수가 20도에 가까운 셰리 와인 중에서도 달달한 맛으로 유명한 제품으로, 달달한 맛에 음료수 마시듯 아무 생각 없이 홀짝거리다가 한 방에 훅 가는 것으로도 유명한 와인이었다.
그걸 거의 한 병을 비웠으니 맛이 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도가 있어야지, 미친년아!’
차수연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해맑게 웃으면서 유진의 손을 잡고 흔드는 주다혜의 모습이 지켜보는 차수연에게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차수연은 유진이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위압적인 모습을 보일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비록 좋게 좋게 끝나기는 했지만, 매장에서 보여주었던 유진의 공포 유발하던 모습이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술 좀 마셨다고 그걸 다 잊고 저러는 주다혜가 오히려 대단하고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어진 유진의 대응은 차라리 유진이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무서운 느낌이었다.
“그럴까?”
유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차수연과 주다혜의 사이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어?”
유미향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랐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차수연도 꽤 놀랐다.
만취해서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주다혜만이 아무렇지 않게 유진에게 엉겨 붙을 뿐이었다.
“이거, 맛있어. 너도 이거 먹어봐.”
“음. 이게 달달 해서 맛있기는 하지. 확실히 합성 술 같은 것보다야.”
두 사람의 대화에 유미향이 욱했다.
“소주 맛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작게 중얼거린 것이기는 했지만, 그녀도 만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을 그렇게 표를 냈다.
나름 멀쩡한 편인 차수연만이 그런 둘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까 술이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가 나오지. 이 년들이 다 미쳤나 정말?’
남들보다 주량이 세다는 이유로 술 취해서 주사 부리는 동료의 뒤치다꺼리를 도맡던 회사 생활의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차수연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주다혜는 유진에게 술을 따라주고 안주를 입에 넣어주고 팔짱을 끼려고 시도하다가 퇴치당하면서 애교를 떨고 있었고, 유미향은 은근슬쩍 툭툭 꼰대 소리를 하면서 유진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차수연은 물론이고 취해서 정신 나간 두 사람에게 무척 다행스럽게도, 유진은 그런 그녀들의 행동을 기분 나쁘게 여기거나 하지 않았다.
차수연과 주다혜의 경우, 그날 밤의 일 이래로 살짝 친해지면서 조금씩 벽을 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벽이 오늘 일로 거의 허물어졌다. 그래서 주다혜가 애교부리며 엉겨 붙는 것이 조금 귀찮기는 해도 경멸스럽거나 짜증 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유미향의 경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여러모로 부려 먹을 방법만 고려하는 상대였고, 차후에 필요한 일만 잘하면 되는 상대이니, 말로만 하는 불평불만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행동으로 선을 넘으면 전혀 달라지겠지만, 그런 기미는 없었다.
결국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만취한 두 여자의 주정을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자 차수연도 살짝 끈을 놓았다.
“이게 싫다고?”
“내 취향은 아닌데?”
“이, 이런 술맛알못을 보았나! 하이볼이 요즘 얼마나 대세인데!”
“술맛알못? 그건 또 뭐 말이야?”
“술의 맛을 알지 못함의 준말이다!”
“나한테 미각을 논한다고? 가소롭군. 술맛? 독성 물질 먹기 좋게 만들려고 위장하는 맛 따위에 무슨.”
“야! 너 지금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위대한 문화를 모욕한 거야!”
“수천 년간 극복 못 한 중독이겠지. 이 알콜 중독자들 같으니라고.”
“사악한 콜라의 설탕 맛 따위에 중독된 놈이 감히 술을 욕해!”
“단맛이 얼마나 귀중한 맛인데! 그걸 어떻게 알콜 따위에 비교하지?”
“자, 자. 진 그러지 말고 이거 먹어봐. 수연 언니 먹는 하이볼에 탄산수 대신 콜라 섞어서 만드는 잭콕이라는 건데, 네 취향에 맞을 거야.”
알콜에는 안 취해도 술자리 분위기에는 살짝 취한 유진과 만취해서 이성을 잃은 여자들 간의 난장판 술자리는 꽤 즐겁게 이어졌지만, 시간 한계가 있었다.
“우와, 정말로 듣던 것처럼 엉망이야.”
실컷 놀고 들어온 소진이의 감탄에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모두 움찔했고, 차민영의 한심한 것들 바라보는 눈길에 결국 두어 시간 이어지던 술자리는 주섬주섬 정리되며 종결되었다.
이 집의 최강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유미향은 상태가 많이 안 좋기는 했지만 큰 문제 없이 혼자서 자기 방을 찾아갔다. 그 와중에 소주랑 안주 남은 것들을 챙기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멀쩡함을 과시했다.
유미향은 꽤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만취한 것은 아니었고, 취한 김에 유진을 살짝 떠본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보여준 유진의 모습이 그래도 당분간 믿고 맡겨도 될 사람으로 느껴져서 조금 더 안도했다. 안심하고 마저 취하기 위해서 술과 안주를 더 챙길 수 있을 정도로.
그에 비해 주다혜는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나름대로 발음도 제대로 하고 술이나 안주를 흘리지는 않아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다리가 풀려서 쓰러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 꼬락서니에 결국 유진이 그녀를 들쳐 안고 방으로 향해야 했다.
“나 괜찮은데, 내 발로 걸을 수 있는데.”
“좀 닥쳐, 이년아. 창피한 걸 몰라.”
그 와중에 주다혜가 헛소리를 계속했고 차수연이 그런 주다혜를 구박했지만, 유진은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그리고 유진이 그녀들이 같이 쓰고 있는 안방 큰 침대에 주다혜를 눕히고 다시 나가려는 순간, 주다혜가 유진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정말 그냥 갈 거야?”
술자리에서의 철없는 아이 같던 목소리가 아니라 끈적임이 묻어 나는 관능적인 목소리였다.
유진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유진에게 여자가 보내는 성적인 유혹은 여전히 약간 꺼림직함이 남아 있는 부분이었다.
차민영과의 관계에서조차 차민영이 가끔 보내는 신호에 살짝씩 거부감을 표현한 적이 있어서, 차민영조차 유진이 원할 때만 응하거나, 정말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는 경우가 아니면 조심할 정도였다.
유진은 혹시 주다혜가 술자리에서 보인 행동이 이걸 위한 가식이었던가를 생각했다.
귀찮기는 해도 나름 재미있고 즐거운 자리였기 때문에, 만약 그랬다면 꽤 불쾌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주다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목소리는 나름 꽤 관능적인 느낌이었는데, 주다혜의 얼굴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얼굴 근육이 완전히 풀어져서 입은 헤 벌리고 있었고, 눈의 초점도 맞지 않고 있었다. 연기로 꾸밀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유진은 만취한 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금 주다혜가 자기가 무슨 소리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웃으면서 다시 몸을 돌리다가, 순간 차수연과 눈빛이 마주쳤다.
차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녀의 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목소리는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유진이 손을 내밀었고, 차수연이 그 손에 얼굴을 살짝 기대었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당신도 내가 가지 않았으면 해?”
유진의 질문에 차수연이 유진의 손바닥에 키스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유진이 그 손으로 그녀를 살짝 잡아당겼다.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차수연의 몸이 유진의 품으로 날아들어 왔고, 둘의 입술이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