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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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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Scent of A Man, Dream of A Woman - 12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굉장히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약간 슬프게도 차수연이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본 얼굴은 유진이 아니라 주다혜의 얼굴이었다.
“우와, 얼굴 일그러지는 것 봐. 저 상처받아요.”
호들갑 떠는 주다혜의 태도에 차수연은 서둘러 얼굴을 펴기는 했지만,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너라면 눈뜨자마자 잘 때까지 옆에 있던 그이의 얼굴 대신에 내 얼굴이 보이면 얼굴 안 일그러질 것 같아?”
“진의 얼굴을 보고 싶으면 더 일찍 일어났어야죠. 아침밥 챙기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 뻔히 알면서.”
“응?”
차수연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잤다고? 자기 방으로 안 가고?”
“새벽에 목말라서 눈 뜨고 보니까 언니 꼭 끌어안고 자고 있더군요. 나한테는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 치사하게. 뭐. 물 마시고 와서 내가 그 사람 등 끌어안았을 때, 퉁겨내지 않았으니까 상관없기는 해요. 우와. 나 정말 감탄했어요. 어떻게 남자 몸에서 그렇게 달콤한 냄새가 날 수 있을 걸까요? 아로마테라피가 따로 없더라고요.”
주다혜가 감탄하는 동안 차수연은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유진이 섹스는 같이해도 잠은 같이 안 잔다는 것은 차민영에게 여러 번 들었었다. 차민영 본인도 혼자가 아니면 많이 불편하게 느끼는 스타일이라서 그녀는 불만이 없었다. 차수연에게 이야기해 준 것은 그런 행동이 여자를 하찮게 여기는 것보다 습관에 가까운 것이니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고 해준 이야기였다.
그래서 일어났을 때 유진의 얼굴 대신 주다혜의 얼굴이 보이는 것을 보고 자신이 잠든 다음에 자신의 방으로 갔다고 생각해서 서운함이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밤새도록 서로 끌어안고 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언니. 나 이걸로 빚 하나 더 깐 거예요. 원래 같이 끼워 주기로 약속했으면서 혼자 하다니 반칙이었어요. 그것도 밥상도 내가 차린 것이었는데. 어젯밤 일은 솔직히 나에게 많이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 알죠?”
“뭐? 너 잠들었던 것 아니었어?”
“흥. 거기 끼어들 정도로 멀쩡한 정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 보고 있었고 기억도 선명하게 난다고요.”
차수연은 얼굴을 붉혔다. 주다혜가 바로 옆에서 그걸 다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너무 창피했다.
주다혜도 어쩐지 계속 이야기하기에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함께 차민영도 포함해서 함께 섹스한 사이이고, 예전에는 그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추접한 일도 함께 경험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젯밤의 일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고 누군가는 보여지고 있었다는 것이 어쩐지 서로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쨌든 이건 빚을 깐 정도를 넘어서 언니가 빚 하나 진 거예요. 잊지 마세요.”
“알았어. 그만해.”
차수연이 손사래를 쳤고, 주다혜도 그걸로 끝냈다.
주다혜는 사실 어젯밤의 일을 이 정도로 넘기기에는 억울한 부분이 굉장히 많았지만, 어제 그걸 자기 눈으로 보면서 끼어들 생각조차 못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술이 원수일 뿐.
‘오늘은 미리 약 먹어 둬야지.’
주다혜는 오늘은 음주 전 술 깨는 약을 먹어 두겠다고 그래서 오늘은 자기도 기회를 잡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어제 백화점에서의 의류 쇼핑에 이어서 오늘은 차량과 오토바이 구매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건 차민영이 담당할 예정이었는데, 주다혜는 어제 차수연이 담당할 쇼핑에 따라갔던 것처럼 오늘도 따라갈 생각이었다. 젊은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과 여러모로 바쁜 탓에 낮에는 손에서 전화기를 놓지 못하는 차민영 대신 자신이 운전하겠다는 필요성을 주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침 식사 시간에 잊고 있었던 강적이 그녀의 그 계획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망쳐버렸다.
“나 오늘 유치원 안 갈 거야!”
아침 식사 내내 명백하게 어제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차수연은 유진을 제외한 모두의 눈길을 받았고, 그 결과 가장 뾰루퉁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진이가 독점권을 행사했다.
“응? 왜 유치원에 무슨 일 있어?”
“아니. 나도 오늘 엄마랑 오빠랑 같이 갈 거야. 오빠 차 고를 때 나도 같이 있을 거야!”
소진이의 말에 차민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진은 자기 의견을 물어보는 그녀의 눈빛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조차도 소진이가 지금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귀여운 마음을 꺾어서 소진이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엄마가 선생님에게 전화해 둘게.”
차민영이 아이의 개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향의 엄마였다면 이건 소진이가 혼나도 크게 혼날 일이었다. 하지만 차민영은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그녀가 소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은 그곳에서 배우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곳이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일 뿐이었다.
거기에 생각해보니 본인과 유진과 소진이가 함께 차까지 타고 외출하는 것은 함께 살기 시작하고 꽤 시간이 되었는데도 지금껏 없었던 일이었다. 차민영은 이 기회에 유진의 것뿐만 아니라 소진이 필요한 것들도 쇼핑할 생각까지 했다.
거기에 유진이 덤도 붙였다.
“어? 그럼 다 같이 나가는 김에 저녁까지 먹고 들어올까? 나 패밀리 레스토랑 한번 가보고 싶었어.”
끼어들 틈을 노리던 주다혜는 그 패밀리 레스토랑이 꼭 가족이 가야 되어서 그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차민영도 괜찮고, 유진도 괜찮았는데, 소진이가 삐지는 것은 그녀도 조금 무서웠다.
결국 이날 유진과 차민영 소진이는 유진의 운전으로 셋만 함께 외출해서 저녁까지 먹고 늦게 들어왔고, 그 이후로도 로맨틱하거나 긴장감이 주어지는 어떤 분위기도 만들어지지 않아서 주다혜에게는 유진과 함께 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소진이가 엄마랑 오빠랑 밖에서 온종일 놀고 들어와서 기분이 완전히 풀어진 덕분에 견제 시기를 잘 넘긴 차수연만 덕을 봤을 뿐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틀 후 유미향이 식사 매너를 채크 해 보고, 한국 상류층 분위기를 알려준다는 명분으로 유진과 저녁 식사를 위해 외출할 때는 주다혜에게 정말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유미향은 자신도 같이 데려가 달라는 주다혜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명백하게 선을 넘는 요구였고, 주다혜도 그걸 알기에 딱 한 번 물어봤을 뿐 구질구질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래도 감정을 숨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였을까?
외출 내내 유진을 향해서는 사적인 대화는 한 마디도 없던 유미향이 유진이 메인 요리인 T본 스테이크를 맛볼 무렵 가장 처음 꺼낸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재미없나요? 말이 없네요. 다혜랑 그냥 같이 올 걸 그랬나요? 다혜 시선이 굉장히 무섭던데.”
유미향의 시선은 유진도 아니고 요리도 아닌 창밖의 한강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은 주다혜가 당신을 노려볼 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하는 지금도 그녀를 전혀 떠올리지 않고 있군. 여기까지 오는 한 시간 반 가까운 시간 아무 말도 없더니, 처음으로 꺼내는 말이 그런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라고?”
창밖으로 향했던 유미향이 시선이 다시 유진을 향했다. 그녀는 눈빛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은 정말로 그게 궁금하군요. 내가 왜 마음에도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지.”
“당연한 것 아닌가?”
“전혀 당연하지 않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대부분 원래 쓸데없고 의미 없는 것들이에요.”
유진을 향한 유미향의 말투는 평상시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사적인 대화의 느낌보다는 조금 더 딱딱하고 엄숙한 느낌이 있었다. 유진은 잘 몰랐지만, 그건 유미향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 할 때 사용하는 말투였다.
그에 비해 유진의 말투는 항상 비슷하고 건조하고 무뚝뚝한 느낌이었다. 소진이와 대화할 때 달라지는 것을 제외하면 유진의 말투와 느낌은 심지어 섹스 중에도 별로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짓을 왜 하지?”
그래도 유미향은 지금 유진이 꽤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질문도 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힘을 내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대화의 목적이 정보 교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죠. 용건만 간단히, 용건이 없으면 굳이 가족이나 친구와도 대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서서히 고립당하게 되죠.”
“어째서?”
“의외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교환이 필요한 정보는 아주 적어요. 사실 대화의 진짜 의미는 그것보다는 대화 그 자체에 있죠. 악수와 비슷하죠.”
“악수?”
“악수에는 상대방에게 자기 주 손을 확인시켜서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죠. 대화도 비슷해요. 별 의미가 없더라도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 내가 너와 교류하고 있고 너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호의의 의미가 있어요.”
“대화만 나누면 적이 아니라고, 말이 되나?”
“적대적 대화도 있지만, 그건 적대적 의사가 명백한 상황에서 적의를 표현하는 거죠. 하지만 침묵은 단절의 방식으로 내게 적의가 없어도 상대방이 내게 적의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의미가 있죠. 그래서 국가 간 외교에서 국교 단절이 선전포고를 제외하고 최대의 적대적 조치인 거죠. 한국과 북한같이 상시 교전 위험이 있는 국가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침묵의 오해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대화로 막기 위해서 핫라인이 있는 거고.”
“주제가 굉장히 거창해지는군.”
“이런 것은 지금은 굉장히 사소한 상식으로 여겨지는 일들이지만, 사실 옛날에는 제왕학이라고 불리는 학문 일부였어요. 그래서 지금도 사회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교육에는 대화술이 필수적으로 들어가 있죠. 그리고 그래서 이상해요. 당신은 왜 이런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걸까요? 나이프와 포크 놀리는 것만 봐도 정통 유럽 귀족식의 예절 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화와 별개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고기를 맛보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던 유진의 손길이 멈추었다.
유진은 자신이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인 기억을 반추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뭔가 특별하거나 과거를 특정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정통 유럽 귀족식 예절 교육을 받았다고?”
“그냥 보면 느낄 수 있는 거예요.”
“나는 미국인인데?”
“그것도 이상해요. 당신은 미국인이고, 차 이사는 당신을 프랑스에서 만났다고 했죠. 그런데 왜 당신의 몸에서는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오스트리아 느낌이 나는 걸까요?”
그건 유진의 모든 생활 예절이 전통 명문 오스트리아 귀족인 마리아 리페에게서 그녀가 교육받은 방식 그대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진은 일부러라도 그때 배운 것들을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 그걸 알아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좀 많이 놀랐다.
“그게 티가 나다니 몰랐군.”
“부정하지 않는군요.”
“사실이기는 하니까.”
“그럼 혹시 사교댄스도 배웠나요?”
“배웠지.”
“그런데도 사교 대화술은 모른다구요?”
“그것도 맞지.”
유미향에게 이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말이었다. 원숭이와 황태자라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상호 견제하에 이루어진 유진에 대한 UE의 교육이 가져온 일그러짐의 나타난 것이었지만, 유미향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유미향은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유진의 과거가 굉장히 심상치 않으니 유진이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깊게 캐물어서는 안 된다는 차민영의 경고는 그녀도 동의한 것이었다.
“그럼 이제 배워요. 당신 눈앞에 있는 상대가 말을 걸면 일단 쓸데없어 보이거나 무의미하거나 짜증이 나더라도 상대방의 말에 대꾸해주고 일단은 친절하게 어울려 줘요. 상대가 굳이 당신의 적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면.”
“적이라면?”
“적이라면 더 친절하게 대해야죠. 전술의 기본 몰라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정보전의 중요성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상식이었잖아요.”
전술로 비교하자 유진도 쉽게 그녀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맞는 말이군.”
“알면 배워요.”
그 이후로 식사 내내 유미향은 사소하지만 도움이 될만한, 그리고 상식적인 것들이지만 유진이 놓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서 조언했다. 그중 일부는 유진도 아는 것들이었지만, 일부는 알고는 있어도 의미를 깊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었고, 일부는 전혀 생각도 못 한 것들이었다.
유진은 단순히 맛있는 것 먹으면서 태도나 확인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던 저녁 식사가 꽤 유익한 자리로 변모했다.
그리고 덤도 있었다.
디저트가 나올 무렵, 레스토랑 지배인이 메모 하나를 유미향에게 가져왔다.
“손님, 실례지만 저쪽 손님께 전달을 부탁받았습니다.”
꽤 무례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미향은 메모의 내용을 보자 굳이 지배인이 이걸 가져온 이유도 알 수 있었다.
-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예의 바른 척하면서도 꽤 고압적인 내용의 메모와 함께 전달된 명함은 확실히 그 정도의 힘이 있는 물건이었다.
- 태성전자 경영전략 이사 김명운
이사회에 참석할 정도의 최고위 임원이 아닌 이상 직원수 30만 명, 이사급만 6백 명에 가까운 태성전자의 이사라는 직책은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유미향 정도 되면 무시할 수는 없어도 겁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 이름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걸 굳이 안면도 없는 자신에게 가져온 이유도 모를 수가 없었다.
유미향은 메모와 명함을 유진에게 내밀었다.
“태성 회장의 손자쯤 되시는 분이 친히 접견을 요청하시는군요. 어때요? 만나볼래요?”
유미향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