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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이지만, 히어로나 빌런이 되는건 거절한다-196화 (19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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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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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Scent of A Man, Dream of A Woman – 15

차민영은 습관이 확실히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유진이 외출 준비하면 대번에 삐지던 딸이 오늘은 꽤 무덤덤한 상태였다. 아니 무덤덤한 정도를 넘어서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은 유진을 보고는 얼굴 붉히면서 좋아하다가, 유진의 품에 안겨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요 며칠 하루걸러 하루꼴로 유진이 계속 외출하다 보니까 소진이도 이제 슬슬 유진이 없는 저녁에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빠 없는 저녁에 익숙해지면 결국 손해 볼 텐데. 악!”

주다혜가 소진이 놀리려고 쓸데없는 소리 했다가 차수연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등 파인 드레스를 입었다면 멍 자국으로 옷을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어쨌든 가장 어려운 문제인 소진이를 유진이 해결하고 있는 사이에, 나머지 일행은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 사용할 차 앞에서 주다혜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이걸 타고 갈 거예요?”

차수연이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타면서 말했다.

“이야기 다 끝난 지가 언제인데 왜 또 지랄이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주다혜는 아무리 그래도 연예인과 상류층 사람들 모이는데 파티에 픽업트럭을 타고 가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었다.

유미향이 첨언을 붙였다.

“이게 우리가 가진 유일한 미국차니까 어쩔 수가 없어. 지금 상황이 꽤 정치적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미국 VIP가 독일차나 일본차 타고 도착한다? 이상한 소리 나올걸?”

“캐딜락 같은거 렌트해도 되었잖아요.”

“그런 상류층 사교 파티에 렌트카를? 너 우리나라 분위기 몰라? 또 이건 전형적인 아메리카 마초 스타일이야. 캐딜락 따위보다 이게 오히려 훨씬 더 유진의 분위기에 어울려.”

“그래도.”

“아 적당히 닥치고 빨리 타기나 해. 그이 성격이면 자기 내려왔을 때 너 안 타고 있으면 그냥 두고 갈 수도 있다?”

“흥, 설마.”

주다혜는 아무리 유진이라고 해도 그 정도까지 막 나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더 이상 군말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굳이 위험한 확인을 해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들이 차에 타서 안전벨트까지 다 채우고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유진이 내려왔다. 여자들은 어쩐지 유진이 살짝 지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진이가 그렇게 쉽게 놔준 것은 아닌가 보네.”

“이 정도면 좀 위험한 거 아냐?”

“나도 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의외로 소진이 같은 아빠 홀릭 아기들 꽤 많다더라. 그래봐야 초등학교 들어가면 싹 바뀐다고 좋아해 줄 때 즐기라고 하더라.”

“소진이도 그러려나?”

“그야 뭐 그때 가봐야 알겠지. 하지만 아직 그런 걸 걱정하기에는 둘이 함께 산 지가 너무 짧잖아. 소진이도 좀 더 세월이 지나면 무난해지겠지.”

여자들 사이에서는 소진이와 유진이 과연 그 정도까지 오래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없었다. 그건 정말 위험한 금기라서 그 누구도 티조차 내지 않는 이야기였다.

“다들 문제없지? 출발한다.”

오늘 운전은 유진이 맡았다. 초보라서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유진이 초보라는 것은 오직 차민영만이 아는 사실이었고, 공식적으로는 유진은 경력자였기 때문에 초보운전 마크 같은 것을 달 필요는 없었다.

가는 동안에는 조용했다.

주다혜는 사실 진짜 스타들이나 참석한다는 샤X의 패션쇼를 현장에서 탑스타들 사이에 앉아 구경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지만, 담담한 차수연이나 유미향의 분위기에 눌려서 최대한 표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혼자 들떠 보이는 것이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유미향은 이런 파티 한두 번 참석하는 것이 아니었고, 차수연은 사 입는 것이라면 몰라도 남이 입은 것 구경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그냥 파티 참석 자체가 가진 의미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으며, 유진은 싫은 자리지만 노리는 것이 있어서 끌려가는 처지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리 텐션이 높을 이유가 없었다.

차수연이 유진의 운전 실력에 약간 감탄한 것이 전부였다.

“당신 아주 부드럽게 운전하네? 당신 성격이면 좀 과격하게 운전할 줄 알았는데. 픽업트럭 타고 있는데 무슨 세단 타고 있는 느낌이야.”

“주로 소진이 태우고 다녀야 하니까.”

기승전소진이로 끝나는 유진의 사고방식에 여자들 모두 혀를 내둘렀지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진이 그런 식이어서 약간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들 모두 차민영에게 가진 감정에는 각각 차이가 있었지만, 소진이의 사랑스러움과 소중함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진이의 존재 자체가 그녀들에게는 여러모로 몹시 특별했다.

목적지인 태성 예술관이 가까워져 오자 일행은 꽤 주목받게 되었다.

레드 카펫을 밟는 연예인들 외에 나머지 참석자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창문을 완전히 가린 초대형의 검은색 세단들을 이용했고, 그래서 도로에는 검은색 대형 세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검은 세단들 사이에 카디널 레드 칼러의 초대형 픽업트럭은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특이하고 너무 이상해서 안내 요원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초대장 보여주시겠습니까?”

차수연이 내민 초대장을 본 안내 요원이 초대장을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대장에 명시된 인원은 2명인데, 4명이시군요.”

차수연의 안색이 확 굳어 버렸다.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거물급 정도 되면 자기가 운전하는 경우가 아니라 기사를 동행하는 경우가 많다. 또 가끔은 파티에 참석하는 다른 일행과 동행하게 되는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누군가 대표로 초대장을 내밀면 그만이지 참석 인원 전체의 초대장을 일일이 다 확인하는 경우는 없다.

초대장을 발급한 사람의 안목과 초대장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 가진 신용을 믿고 동행한 인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보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건 초대장을 내민 차수연만이 아니라 초대장을 발행한 사람들까지 깡그리 무시하는 대단히 무례하고 모욕적인 행위였다.

이런 경우에 나머지 인물 초대장을 일일이 다 확인받고 들어가면 그 자체로 병신 인증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이대로 차를 돌려 돌아가는 것이 보통의 대응이었다.

하지만 차수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뒷자리의 유미향이 자신과 유진의 몫의 초대장을 안내 요원에게 내밀었다.

“아, 실례했어요. 여기 있어요, 초대장.”

안내 요원은 유미향의 초대장까지 받아서 내용을 확인한 다음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차 안의 일행을 한번 훑어 본 다음에야 초대장을 다시 돌려주었다.

“실례했습니다, 차량은 D-14에 주차하시면 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초대장을 돌려받고, 유진은 별생각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이런 종류의 일에 경험도 없고 관심도 없는 유진은 지금 자신들이 대놓고 개무시를 당했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내 요원의 불손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거기에 관심이 없었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은 인간의 위험하지 않은 사소한 행동이나 감정 하나하나에 반응하기에는 유진의 감정과 감각이 너무 무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수연은 아니었다. 차량이 지하 주차장에 진입해서 안내 요원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차수연이 유미향에게 정색했다.

“아니 교수님, 이 꼴을 그냥 넘어간다고? 우리가 굳이 무시당하려고 여기에 올 필요가 있는 거야?”

하지만 몸을 돌려 따지던 차수연은 유미향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말을 줄였다. 유미향이 웃고 있었는데, 굉장히 의미심장한 표정이기 때문이었다.

“이거 굉장히 재미있게 되었네. 잠깐 기다려봐. 주차장 넘버도 좀 이상한데, 거기 차 세우면 견적이 나올 것 같으니까.”

태성 예술관은 지상에 3개의 독립된 건물을 지하의 넓은 단일 공간이 연결하는 구조로 되어 있고, 입구 로비가 지하 1층인 구조였다. 지상에도 주차장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는 진짜 태성 오너 일가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고, 나머지는 VIP라고 해도 지하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같은 지하 주차장이라고 해도 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로비 입구에 가까운 A 주차장부터 거리가 멀어질수록 B, C로 넘버가 늘어났고, D 구역은 아예 지하 2층의 화물 하역장 바로 옆에 있는 구역이었다.

유진과 차수연 등이 어떤 이유로 이 파티에 초대되었는가를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자리 배치였다.

유진조차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고, 눈치 없는 주다혜조차 이러고도 굳이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유진 때문에 국가 규모의 문제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주다혜는 이게 어쩌면 자신들에게 사과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들을 모욕하기 위한 초청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미향은 오히려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

“잘되었다. 이 병신들 제대로 정리가 안 되었어. 이러면 우리야 신나게 즐기면 그만이지.”

차수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들에게는 말 안 했지만, 오늘 여기서 유진씨와 태성 그룹 넘버 3인 태성 전자 부사장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거든? 그런데 보아하니 밑에는 내용이 전혀 전달이 안 된 것이 분명하잖아. 자, 이 상황에서 우스워진 것은 누구일까? 귀찮지만 구경거리 있으니 참석한 우리일까? 아니면 터진 사고 수습하려고 필사적으로 초대장 보내고 설득까지 한 사람들일까?”

유미향의 말에 차수연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무시당한 것은 조금 기분 나쁘지만, 상대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될 상황인 것이 마음에 든 것이다.

“자 그러니까 우리는 이 새끼들 좀 좆 되어 보라는 의미로 메인 파티 같은 것은 젖히고 사람들 별로 없는 곳으로 가자고. 그렇지 않아도 내가 너희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었어.”

유미향의 말에 주다혜가 약간 반항했다.

“패션쇼는요? 그게 오늘 행사의 메인 이잖아요?”

유미향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유진씨, 패션쇼에 관심 있어요?”

“아니.”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을 들은 유미향이 주다혜에게 물었다.

“혼자라도 갈래? 유진 씨만 안 가면 상관없거든.”

주다혜가 차수연을 바라보았다. 혼자는 무섭지만, 차수연이라도 같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차수연도 패션쇼에는 관심 없었다.

“나도 별로.”

주다혜가 고개를 숙였다.

“같이 가요.”

유미향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낄낄 웃으면서 일행을 안내했다. 주차장을 한쪽의 계단실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가서 로비를 통과했다. 추가로 초대장 같은 것을 확인하는 절차는 없었다.

로비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남자 하나에 여자 세 명 그것도 각기 다른 연령대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특이한 일행의 모습이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유미향의 선도로 일행이 서쪽으로 향하면서 곧 관심 밖이 되었다.

메인 패션쇼는 동쪽의 공연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고, 메인 파티는 북쪽의 중앙 전시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서쪽의 제 2 전시관은 공개는 되어 있지만, 따로 진행되는 행사는 없는 곳으로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은 그들 일행 외에 아무도 없었다.

오죽하면 전시관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안내원이 다가오는 그들을 보고는 당황했을 정도였다.

“손님, 행사는 공연장과 제 1 전시관에서 진행됩니다. 패션쇼에 참석하시려면 반대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친절하게 안내하는 여성 안내원에게 유미향이 밝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여기는 그림 보러 온 거에요. 혹시 지금 봄의 악몽 전시 중인가요?”

유미향이 작품 이름을 거론하자, 안내원이 잠시 유미향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유미향 화백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유미향입니다.”

“존경합니다, 화백님. 이렇게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화백님 작품은 지금 전시 중입니다. 전시 장소는.”

“어디에 걸려 있는지는 알아요. 알아서 찾아갈게요. 수고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화백님.”

안내원을 지나쳐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전시관 내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유미향은 거침없이 한쪽을 향해 걸었고, 그녀를 따라 걸으면서 주다혜는 조금 감탄했다.

“우와, 교수님. 그냥 꼰대는 아니셨나 보네요.”

머리 한 대 쥐어박히기 딱 좋은 소리였지만, 유미향은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걸었다.

그 사이 유진은 주변의 그림들과 조각들을 둘러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그림이고, 그냥 조각인데 일부의 그림들과 일부의 조각들은 다른 것들과는 명확하게 다름이 느껴졌다. 무엇이 그려져 있고, 무엇을 조각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과 조각 자체가 가진 무엇인가가 유진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목적지.

유진은 따로 설명이 없어도 유미향이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대한 유화를 보며 전율을 느꼈다.

유미향이 유진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그녀의 작품은 놀랍게도 지옥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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