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4화 (4/340)

제4화

백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댄스 마술사(C)>

: 무대 위에서 마법처럼 댄스 실력이 좋아진다.

<이 헤드폰에 내 몸과 영혼을(C)>

: 음악에 몸을 맡기게 된다.

<눈새(C)>

: 외부환경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오뚝이(C)>

: 넘어져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역시 예상대로….”

스킬 상세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뚝이는 뭐에 쓰는 건지 감도 안 와.’

그래도 D보다는 C가 나을 것 같긴 한데 어느 것 하나 고르고 싶지 않은 이 마음.

특히 저 <눈새(C)> 스킬은 욕먹기 딱 좋아 보였다. 설명은 그럴듯한데 그냥 기분이 그랬다.

“<나에게 취한다(D)>는 선녀였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해 보이는 스킬을 보고 나니 갑자기 현재 스킬이 만족스러웠다. 고민할 것도 없이 눈새를 지워 버린 백야는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무대 위에서 마법처럼 댄스 실력이 좋아지는 것과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것 중 하나라…….’

특히 후자는 구애의 춤과 결이 비슷해 보이는데. 저걸 고르는 순간 제 몸이 또 어떤 흑역사를 만들어 낼지 몰랐다. 한마디로 최악.

“그렇다면 무대 위의 댄스 마술사로….”

최악과 차악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차악이지.

우주의 기운으로 몸을 움직이고, 헤드폰에 영혼을 맡긴다는 정신 나간 설명보다는 ‘댄스 실력이 좋아진다’가 조금은 더 안전하지 않을까.

물론 무대 위에서라는 전제 조건이 붙긴 하지만.

“연습실도 무대로 쳐주길 바라는 수밖에.”

* * *

백야는 학교에 연습생 계약 사실을 알렸다. 정규 수업만 듣고 남은 시간은 연습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네가 백야라고? 한백야?”

“네. 이건 회사에서 작성한 연습생 계약서예요. 혹시 필요할지도 몰라서 가져오긴 했는데.”

3학년 2반 담임 강동수.

동수는 하루아침에 달라진 얼굴로 등교한 제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주말에 사고를 당해서 수술했다더니…. 혹시 그때 얼굴도 한 건가?’

동수의 눈이 의심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수상한 점은커녕 백야의 얼굴은 붓기 하나 없이 깔끔 그 자체였다.

‘아니 그럼, 안경 하나 바꿨는데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다고?’

그러고 보니 줄곧 끼고 다니던 검은 뿔테가 아니었다. 제 것과 비슷한 얇은 은테의 동그란 안경을 끼고 나타난 백야는 정말…….

“잘생겼다.”

“네?”

“어? 아니, 어어 그렇게 해.”

백야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던 동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잠깐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비밀이었다.

“이거는 필요 없나요?”

ID 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전속 계약서. 동수가 내밀어진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래? 바로 복사하고 돌려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동수는 교무실의 가운데로 향했다.

복사기는 교감의 바로 앞자리. 혹시라도 제자가 노예 계약을 당한 건 아닐까 조항을 꼼꼼히 살펴보는데, 앞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불쑥 올라왔다.

“강 선생님? 저 학생은 누구죠.”

교감이었다.

순간 눈이 부셔 눈을 감을 뻔한 동수. 그는 눈알이 뻑뻑한 척, 일부러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아 교감 선생님. 저희 반에 한백야라는 친군데 예체능 조퇴 신청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ID 엔터테인먼트에서 저 친구랑 계약을….”

그런데 말하다 보니 뒤통수가 따가운 거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교무실 안의 모든 선생님이 동수의 주변에 몰려 있었다.

“오호호.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말씀 계속 나누세요.”

수학 선생님의 자발적 총대에 함께 있던 선생님들이 늦을세라 맞장구를 쳤다.

그 결과.

“백야야. 음……. 생각보다 승인이 빨리 나서 원하면 오늘부터 조퇴가 가능할 것 같다.”

금용 남자 고등학교 전설의 시작이었다.

[친구1 : 백야야 로즈데이 만나면 싸인좀ㅎ]

[친구2 : 대체 그동안 그 쓰레기 같은 건 왜 쓰고 다닌 거냐?]

[친구3 : 미친 너 진짜 ID연생됐냐???]

[친구4 : 똑똑 얼굴 맛집 되셨다는 소문 듣고 왔습니다~]

웬만하면 조용히 다니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망한 것 같지.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던 놈들까지 연락이 우르르 와 있었다.

‘부담스럽다.’

백야가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순간 번호를 해지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드는데.

[신재현 : 백야 조심히 가고 연습 잘해!]

[김유경 : 미친노뮤ㅠㅠ잘가라ㅜ]

[김유경 : 내 친구가 연예인이라니(눈물 이모티콘)]

[신재현 : 아직 연습생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김유경 : 야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ㅠㅜ 손 붕대 조낸 맴찢]

단체방 메신저를 보자 이내 웃음이 터졌다.

“그래. 너희가 내 유일한 버팀목이다.”

게임에 동기화된 것도 억울한데 재현과 유경마저 없었더라면 아마 더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도착한 백야는 배정받은 개인 사물함에 핸드폰과 가방을 집어넣었다.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보컬 연습실로 향하는데, 주말 동안 친해진 연습생 한 명이 백야에게 다가왔다.

“형!”

“지호 안녕.”

ID의 최연소 연습생 이지호. 작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지호는 밝고 에너지가 넘쳤다.

“팀장님이 형 다음 주나 돼야 평일 연습 나올 거랬는데. 어떻게 온 거예요?”

“담임 선생님께서 편의를 봐주셔서 일찍 오게 됐어. 학교가 회사랑 그렇게 멀지도 않고.”

백야는 몇 명 없는 연습실을 둘러봤다.

“다들 아직 안 온 거야?”

“아니요. 밥 먹으러 갔어요! 아, 근데 5시 넘어서 오는 형들도 있고 그래요.”

지호의 대답에 백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밥?”

“3층 가면 밥 먹을 수 있는데 형 몰랐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지호는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곤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는데. 대충 회사 밥이 맛있어서 다른 회사에서도 먹으러 온다는 내용이었다. 방송국에서도 몇 번 촬영을 나왔었다고 한다.

“말 나온 김에 가요! 아직 시간 충분해요.”

“어? 나 밥 먹고 왔는데….”

그러나 지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 번 결심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 같았다.

어린놈이 제법 강단 있었다.

“완전 맛있죠!”

“으응…. 맛있다.”

그나마 가벼워 보이는 샐러드를 고른 백야는 식당 한쪽에 지호와 마주 본 채 앉았다.

“다른 반 형들은 벌써 먹고 갔나 봐요. 형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조그마한 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백야가 웃으며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만으로도 고마워.”

ID에서는 남자 연습생과 여자 연습생을 따로 나눠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력별로 또 반을 나눴는데.

연습생은 부여받은 등급에 맞는 수업을 듣게 되고, 매월 치르는 월말 평가에서 받게 된 성적으로 더 높은 반으로 올라가거나 낮은 반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근데 주말에 내가 들어갔던 반은…….”

“안무 레슨이요? A랑 B반 모여서 하고 있었는데 형이 왔어요. 가끔 같이 수업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한다.

바로 옆에 C랑 D반을 놔두고 신인개발 팀장님은 왜 하필 그 문을 두드렸을까. 그때 췄던 구애의 춤을 생각하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고개 숙인 백야는 샐러드를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초록 풀떼기가 무서운 속도로 자취를 감춰 갔다.

그런데 그때, 지호가 제 뒤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율무 형! 민성이 형!”

“이게 누구야~ 죠죠죠 잖아?”

“지호 밥 먹으러 왔구나. 근데 왜 아무것도 없어?”

낯선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입안에 풀을 가득 머금은 채 뒤를 돌아보자, 시야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아, 식사 중이셨네. 안녕하세요.”

AIM의 후배 그룹이자 ID의 유일한 망돌이라 불렸던 그룹의 멤버들이었다.

“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들어오셨나 보다.”

“맞아! 백야형이야. 형들 연습은 잘 돼가?”

“그럼. 너도 얼른 커서 데뷔해야지.”

과연 남다른 친화력의 지호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각, 씹어도 씹어도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 입안의 샐러드에 강제 묵언 수행 중이던 백야. 얼른 삼키고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는데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우옼!”

급한 마음에 그대로 삼켜 보려다 죽을 뻔만 했다.

백야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황급히 물을 찾았다.

“우리 때문에 불편하시겠다. 지호야 우린 이만 가 볼게. 가자 율무야.”

“앗. 죄송합니다. 식사 편하게 하세요~”

“지호 연습 잘해.”

‘뭐? 아니야! 그거 아니니까 가지 마…!’

백야는 공허한 눈으로 망돌, 아니 연습생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들은 대화를 황급히 마무리했고 백야가 할 수 있는 건 옹알이뿐이었다.

“…응느흐ㄱ스으.”

솔직히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안 가 겨우 음식을 삼킨 백야. 다급해진 백야는 지호에게 모르는 척 방금 만난 이들에 대해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연습실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아~ 형들이요? 데뷔조예요. 이번에 데뷔 확정돼서 준비 들어갔어요. 완전 부럽죠. 나도 빨리 커서 데뷔 하고 싶다.”

콰과가앙!!!

청천벽력이었다.

“아… 데뷔조가 이미 확정이 났어?”

“네! 형들 합숙 들어간 지도 꽤 됐어요.”

“……….”

어디서 소리 안 들려요?

개복치 죽는소리.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