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백야야. 너 음색, 음감, 음역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너무 좋다. 평가 때도 이대로만 하자.”
그것참 1일 3깡 한 보람이 있네요….
제 목소리가 코로 나왔던가 입으로 나왔던가. 백야는 보컬 레슨을 무슨 정신으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득음을 꿈꾸며(1)> 완료!]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1 스타 포인트]
그러고 보니 상태창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구애의 춤을 췄을 때보다는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그러나 백야는 아웃 오브 안중.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배드 엔딩에 백야는 생각이 많았다.
‘소속사를 옮겨야 하나….’
다른 회사에 친구가 있다는 연습생에게 물어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형 칭찬받았는데 기분 안 좋아요?”
“어? 어어 좋지.”
자리로 돌아온 백야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호는 백야가 자신의 실력을 다 드러내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원래 지호는 보컬 C반이었지만, 백야의 소문을 들은 트레이너가 돌연 A반과 합동 레슨을 추진해 모두가 한곳에 모이게 됐다.
춤은 많이 별로지만, 노래는 지호가 듣기에도 최고였다.
“형은 목소리가 진짜 좋은 것 같아요!”
“그래? 고마워.”
겨우 정신줄을 잡은 백야가 피식였다. 저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은지 지호도 방긋 웃는다.
“월말 평가 때는 무슨 노래 부를 거예요?”
회사는 자신의 기준을 토대로 뽑은 연습생들에게 양질의 수업과 환경을 제공한다. 이 친구는 과연 저희가 그리는 그림과 어울리는 재목으로 성장할 것인가.
반대로 계약을 맺은 연습생들은 한 달에 한 번, 평가를 통해 자신의 역량과 가능성을 증명해 내야만 했다.
이때 수치화된 평가를 바탕으로 회사는 해당 연습생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여부를 판단했는데. 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거나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다고 판단될 시에는 가차 없이 전속 계약을 해지했다.
‘그런데 그거 입사 한 달 이상부터 해당되는 거 아니었나…?’
백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나도 해? 난 아직 입사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맞다. 어? 그런데 왜 아까 선생님한테 하고 싶다고 했어요?”
금시초문이었다. 제가 언제 트레이너와 그런 대화를 나눴단 말인가.
백야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백야야. 너 음색, 음감, 음역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너무 좋다. 평가 때도 이대로만 하자.」
「네에…….」
「참, 너는 이번 평가 대상자가 아니겠구나?」
「네에…….」
「얘 좀 봐. 평가 안 받으면 너야 좋은 거지. 그게 그렇게 시무룩해 할 일이야?」
시무룩이요?
누가요. 제가요?
「네가 참여하고 싶다는데 안 될 건 없지. 위에는 내가 말해 놓을게.」
잠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보컬 트레이너의 엄청난 착각계에 당하고만 백야였다.
* * *
월말 평가는 약 2주 뒤. 백야는 근 일주일 동안 학교, 연습실, 집을 오가는 생활만 반복했다.
처음엔 이미 확정 나 버린 데뷔조의 존재로 의지가 박살 나 버렸던 백야. 그러나 그는 다른 연습생들에게서 뜻밖의 희소식을 듣게 되는데.
“이번 평가 때 US 엔터도 온대요. 근데 거기 지금 데뷔조 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래서 오는 거라고.”
대한민국엔 아이돌 명가라 손꼽히는 3대 기획사가 있었다. 바로 ID, US, 하이틱.
이들은 종종 소속 연습생들을 모아 회사 대 회사 구도로 배틀 평가를 치르기도 한다는데. 그게 마침 이번 월말 평가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드물긴 하지만 가끔 연습생을 서로 트레이드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백야는 귓가에 상투스가 울리는 줄 알았다.
‘월말 평가 때 눈도장 제대로 찍어서 US로 튄다.’
전에 없던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 그러나 백야는 아직 연습실이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친구마저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공간. 백야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로 한다.
최근 연이은 히든 퀘스트 달성으로 현재 스타 포인트는 5점.
<득음을 꿈꾸며(2)>와 <연습만이 살길(2)>이 각각 보컬과 안무 연습 10회씩 달성이었고, 그 결과 2포인트를 얻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의 레벨업으로 1포인트가 더해져 제법 모인 상태.
‘월말 평가 전에 스킬 뽑기 한 번 돌리면 좋을 것 같은데.’
백야는 자신의 스킬창을 띄웠다.
Lv.4 백야 (동기화 중)
외모 : B
보컬 : A
댄스 : C
끼 : D
스트레스 : 48%
칭호 : 천재 아이돌 (비활성)
패시브 : R
아니 근데 잠깐만. 스트레스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저게 뭐야?!”
데뷔조 소식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지 않나?
백야는 억울했다.
“이대로라면 데뷔 실패보다 스트레스로 사망이 더 빠를지도….”
스킬에만 눈이 멀어 스트레스 관리는 소홀히 한 탓이었다. 허공을 향한 백야의 눈빛이 우수에 젖었다.
그러자 그를 격려라도 해 줄 요량인지 시스템이 오랜만에 대화를 걸어왔다. 그 뭣 같은 이모티콘과 함께.
[걱정하지 마세요! 스타 포인트로 스트레스 지수를 낮출 수 있어요! v(°∇^*)⌒☆]
[1포인트 사용 시 30% 감소]
“그렇구나~ 스타 포인트~”
뽑기도 돌려야 하고 스트레스도 낮춰야 하고. 모으는 건 힘든데 쓸 데는 더럽게 많았다.
‘왜! 아주 그냥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지!’
백야는 눈물을 머금으며 스트레스 지수 감소에 포인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개복치한테 스트레스는 치명적이니까.
▶ 2포인트 사용
“내 피 같은 포인트가…….”
이로써 남은 스타 포인트는 3점. 안 그래도 확률 똥망인데 그마저도 기회가 한 번으로 줄었다.
‘하아…… 연습할 맛 안 난다. 집에나 가자.’
불을 끈 백야는 연습실을 나섰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었는지 복도를 밝히던 불도 전부 꺼져 있었다. 어두컴컴한 게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비주얼이었다.
‘여, 여기 아직 집에 안 간 연습생 있다고요…!’
긴장감에 침을 삼킨 백야가 덜덜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걸음걸이가 저절로 빨라졌다.
‘엘리베이터. 빨리 엘리베이터.’
곧장 승강기 앞으로 향한 백야는 올라가는 버튼을 연타했다. 그러나 4층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생각을 않았다.
남은 한 대는 점검 중.
이 시간에 진짜 점검 중일 리는 없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한 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동으로 전원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근데 왜 하필 4층이냐고!’
백야는 개복치 패시브에 충실하게 겁도 많았다.
예로부터 4는 죽음의 숫자. 초조함에 입술을 물어뜯던 백야는 결국 비상구를 뛰어 올라가기로 했다. 보컬 연습실이 위치한 게 지하 1층이니까 눈 딱 감고 뛰어 올라가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큰맘 먹고 비상구로 향했는데…. 오늘따라 비상등 색깔도 조금 이상했다.
‘원래 이런 색이었나?’
초록색과 주황색 사이 그 어딘가쯤의 졸라맨이 백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 분신사바 분신사바….”
김유경이 이게 귀신을 쫓는 주문이랬지 아마.
백야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며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기 무섭게 환한 빛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센서 등이 켜져 있었다.
백야의 영혼은 이미 회사를 벗어나 집 앞 건널목이었지만, 그의 본체는 아직 비상구 앞에서 한 발짝도 못 뗀 상태. 그렇다면 선객이 있다는 의미였다.
“하아… 읏….”
가쁜 숨과 뒤엉키는 외설적인 소리가 백야의 고막을 때렸다.
‘미, 미, 미친!’
백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살색의 향연은 아니었지만, 이 늦은 시각! 외진 곳에서! 그것도 연습생이! 저렇게 붙어 있는 건 계약 사항 위반이었다. ID뿐만 아니라 연습생 간의 연애는 어디든 No.1 필수 금지 조항.
그러나 제 인생도 한 치 앞을 모르겠는 마당에 남 걱정해 줄 시간이 어디 있나. 백야는 수습 가능한 한 지금 조용히 도망가기로 했다.
‘판사님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백야가 삐거덕거리며 뒤돌았다.
그러나 사람이 죄짓고는 편히 못산다든가. 문고리에 옷이 걸렸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다 망했다.
“으갹!”
“꺄악!”
“너 뭐야!”
초면의 남자 연습생이 한달음에 달려와 험악한 얼굴로 백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봤어요?!”
“무, 무, 뭐를요? 저는 갑자기 바퀴벌레가 나와서….”
무조건 못 봤다고 잡아떼자.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렀지만, 백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조금 찔리긴 했으나 방법 있나. 봤다 하면 죽일 기세인데.
붙잡힌 뒷덜미의 악력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제가 본 게 바퀴벌레 한 쌍은 맞으니까.
그 사이 여자 연습생은 도망가고 없는지 비상구엔 백야와 남자 둘뿐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들어온 연습생?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요.”
“여, 연습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라서요. 나와 보니 엘리베이터도 다 멈춰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쪽은 왜 여기에…?”
순수 100%의 얼굴. 백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얼굴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손은 여전히 옷깃을 잡고 있었고, 백야도 자기가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엮이지 않으려면 여기서 확실히 끝내야 한다.’
그런데 마침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랑이 형, 거기 있어?”
구원투수 등장이었다. 한 명 이상인지 여러 개의 발소리가 엇박자로 울렸다.
머지않아 나타난 두 개의 태양. 난간 위로 내밀어진 머리 색이 화려했다. 눈부시다.
“숙소 가야 되는, 아 미안. 얘기 중이었어?”
“어? 그때 식당에서!”
백야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데뷔조 연습생들. 한 명은 낯이 익었다.
두 사람이 잡힌 백야와 하랑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숨통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눈은 여전히 저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놓아준다는 얼굴이었다.
“별거 아니야. 계단에 뭘 좀 떨어뜨렸는데 못 봤으면 됐어요. 실례했습니다.”
백야를 향해 살짝 고개 숙인 하랑은 어느새 계단을 반이나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저를 데리러 왔던 연습생들과 금방 합류했고, 전후 상황을 모르는 두 사람은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하며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저런 멤버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룹에 저런 얼굴은 없었던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