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6화 (6/340)

제6화

백야는 지난 한 주와 다름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학교, 연습실, 집의 무한 반복.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월말 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신재현 :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평가라니….]

[신재현 : 연습생들 진짜 열심히 사는구나ㅠㅠ]

[김유경 : 야멘!!!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김유경 : 찢고 와라 한백야(엄지척 이모티콘)]

“찢긴 뭘 찢어. 내가 찢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백야가 핸드폰을 보며 중얼거렸다. 주말이라 그런지 회사 앞이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중간중간 슬로건이 보이는 걸 보니 소속 가수의 팬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백야는 인파를 파고들며 겨우 문을 통과했다. 막 들어선 로비는 평소보다 어수선했다.

‘다른 회사에서 온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바쁘게 뛰어다니는 직원들을 보며 백야는 연습실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도 어수선하긴 마찬가지.

겁에 질렸는지 한쪽 구석에서는 벌써 울고 있는 여자 연습생들이 있었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긴장이라곤 전혀 안 할 것 같던 애들마저 굳은 얼굴로 모여있었다.

“다들 일찍 왔네.”

이제는 제법 친해진 무리 사이로 백야가 다가갔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명이 재빨리 그를 잡아당겼다.

“형, 완전 대박 사건.”

“뭔데?”

심사위원으로 연예인이라도 오는 걸까. 백야가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데뷔조 한 명 퇴출이래요.”

“으응?”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가, 갑자기 왜?”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백야도 충격을 받았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사귀는 거 걸렸나?’

물론 연애가 금지 조항이긴 하지만, 그게 준비 다 끝난 데뷔조를 엎을 만큼의 잘못은 아닐 텐데 이상했다.

‘솔직히 안 걸려서 그렇지, 털어 보면 여기 비밀 연애 중인 커플 못해도 세 쌍은 더 나올 거다.’

잘못에 비해 처벌이 너무하지 않나 생각하던 순간, 백야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밤에 술 마시고 오토바이 탔다가 사고 났는데, 같이 타고 있던 여자연생이 지금 중환자실이래요.”

“미친 새끼가? 헙.”

저도 모르게 욕을 뱉은 백야가 놀란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다들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저희도 듣고 깜짝 놀랐다며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근데 그 형 메보라던데. 그럼 데뷔도 엎어지나?”

“빼고 가지 않을까. 이미 신인 나올 거라고 기사도 다 뿌렸다던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그 형 때문에 사람 인생 하나 종 치게 생겼구만.”

“근데 그 둘이 왜 같이 있었지?”

그 후로도 연습생들 사이에선 데뷔조를 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래서 없었구나.’

비상구에서 봤던 박하랑이라는 놈. 데뷔 막판에 사고 거하게 치고 쫓겨난 거였다.

* * *

시끄러운 내부 사정과는 별개로 월말 평가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평가 방식은 이랬다.

무작위로 호명되는 연습생 중 한 명은 자신이 겨루고 싶은 상대 회사의 연습생 한 명을 지목한다.

지목된 사람은 자신을 불러낸 연습생과 1대 1 배틀 형식으로 시합을 겨루면 됐는데. 이 자리가 평범한 월말 평가였다면 개개인의 보컬과 댄스를 모두를 봤겠으나 오늘은 다른 회사와 함께하는 자리.

더군다나 내색은 않지만 말 못 할 내부 사정도 있는지라 ID의 직원들은 한시 빨리 평가를 끝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평가는 먼저 호명된 연습생이 고르는 종목으로 진행할게요.”

그리고 첫 이름이 호명됐다.

“US 7번 연습생.”

반대편에서 갈색 머리의 남자애가 일어났다.

체격보다 두 사이즈는 더 커 보이는 오버핏 후드 위로 붙어 있는 숫자 스티커. US 7번은 딱 봐도 춤을 잘 출 것처럼 생겼었다.

호명과 동시에 스캔을 끝낸 백야는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눈알만.

‘제발 나 말고 다른 사람.’

백야가 마음속으로 비는 동안 7번 연습생은 다른 연습생을 지목했다.

“같은 ID 7번 연습생 지목하겠습니다.”

우리 7번 누구야! 7번!

한시름 놓은 백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목된 연습생을 찾았다. 다행히 춤에 일가견 있는 친구가 자리에서 막 일어났다.

연습실 가운데 나란히 선 두 사람. 평가 종목은 무엇으로 하겠냐는 진행자의 말에 US 7번은 예상대로 춤을 골랐다.

사전에 제출한 평가 곡이 준비되고 US 7번의 음악이 먼저 흘러나왔다.

“시작하겠습니다.”

빠른 템포의 힙합 비트. 박자에 맞춰 천천히 발을 움직이던 7번은 점점 동작이 커지더니 마지막을 화려한 윈드밀로 장식했다.

상체와 팔을 이용해 몸을 지탱하면서도 빠르게 다리를 돌리며 회전하는 동작. 백야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동작이었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무대 위의 댄스 마술사가 아닐까.’

백야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이어서 ID 7번 연습생의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입사 첫날 자신의 구애의 춤을 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던 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미워하는 마음은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막상 막한데.’

직전의 평가 곡과 상반되는 분위기의 곡이었다.

우리 7번의 선곡은 보다 R&B 느낌이 강하게 섞인 댄스 팝. 크고 강렬한 동작보다는 부드러우면서도 자신의 강점인 춤선이 잘 드러나는 안무가 주를 이뤘다.

두 연습생의 무대가 끝나고 다시 가운데로 모이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엄청 대단한 무대여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고생한 동기를 위한 수고의 의미 정도였다.

“양쪽 다 준비를 많이 한 게 느껴지네요.”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US 대표이사의 인사를 시작으로 ID에서도 칭찬과 채찍이 담긴 심사평을 내놓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어느 회사의 연습생이 더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대놓고 알려 주진 않았지만, 심사평을 대충 들어보면 어느 쪽이 더 좋은 무대를 보여 줬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토할 것 같다. 이 짓을 데뷔 전까지 매달 반복해야 한다니.’

연습생도 연습생이지만, 이 과정을 버티고 살아남아 데뷔한 아이돌들이 갑자기 막 존경스러워지는 거다.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이름이 호명됐다.

“ID 10번 연습생.”

왜 아무도 안 일어나지?

백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친구들이 하나같이 저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누군데?”

“네가 10번이잖아.”

옆에 있던 동갑내기 연습생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옷 위로 붙어 있는 숫자를 확인한 백야가 자리에서 허겁지겁 일어났다.

“느, 네! 10번 접니다!”

상대 연습생을 지목해 달라는 말에 백야는 그나마 제일 평범해 보이는 친구를 골랐다.

그리고 종목은.

“저는 노래로 하겠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분야였다.

연습실의 가운데. 백야가 심사위원을 마주 보고 섰다. 확실히 정면에서 보니 US 쪽 사람들과는 다르게 ID 직원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긴 저 사람들은 월말 평가고 뭐고 지금 당장 엎어지게 생긴 데뷔조 수습이 더 중요하겠지.

하지만 데뷔조는 이변 없이 그대로 데뷔하게 될 것이다. 제가 알고 있는 게 미래가 맞다면.

‘그러니 나는 US에만 잘 보이면 된다.’

음향을 담당한 직원은 연습생들이 사전에 제출한 선곡표를 뒤적였다. 그러다 비어 있는 칸을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로 고개 들었다.

그러나 백야의 목소리는 지금 막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한 상태.

- 잠들지 못하는 밤

문득 네가 떠올라 창문을 열었어

달빛에 피어난 별들이 쏟아져

무반주 라이브.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듣기 편안하면서도 독보적인 음색이 듣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어떤 반주도 필요하지 않았다.

-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했던가

I feel shy

좋아하고 있어

게다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하이톤은 또 어떤가. 백야는 노래가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박자를 놓치거나 빨라지지 않았다. 완벽한 3깡이었다.

“감사합니다.”

노래를 마친 백야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런 그를 보며 ID의 보컬 트레이너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가 제대로 해낸 모양이었다.

백야는 다음 연습생의 무대를 위해 잠깐 뒤로 물러났다. US 쪽 직원들의 눈이 저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됐다!’

코빼기도 안 비추는 우리 대표와는 다르게 남의 회사까지 행차한 US 대표이사를 보라!

데뷔조를 꾸리고 있다는 게 마냥 뜬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거물급이 직접 움직일 리 없지 않은가.

백야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저를 보고 있던 지호와 눈이 마주쳤다.

지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백야를 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겠다는 생각에 무리수를 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반응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백야는 처음으로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그러나 나만의 착각이었나.’

평가가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난 괴한이 백야를 납치했다.

“백야 군! 잠깐 저랑 같이 올라가요!”

“아, 아니 저는…!”

갑자기 나타난 동만이 백야의 손목을 냉큼 잡아챘다. 다가오던 US 직원도 당황해 멈춰 섰다.

대화 도중 백야 쪽을 여러 번 쳐다보던 US 대표님과 ID 직원들, 그리고 방금 제 쪽으로 다가 오던 직원까지. 이건 분명 높은 확률로 트레이드 제의가 틀림없었다.

‘촉이 와! 단번에 느껴!’

그러나 입 밖으로 뱉을 순 없었다. 백야는 그저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US 대표님이 떠나지 않고 기다려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왜 찾는 거지.’

득달같이 달려와 저를 들고 튀더니 정작 저는 큰 회의실 안에 갇혀있었다.

‘혹시 내가 너무 티 나게 굴었나.’

책상에 엎드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있던 백야. 그는 매우 훌륭한 개복치였다.

‘US 쪽을 자주 힐끔거리긴 했다만 좀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모든 연습생이 데뷔를 목표로 죽기 살기로 한다지만, 자신은 정말 목숨이 걸린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의리 없는 놈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ID에서 데뷔조를 그렇게 빨리 확정하지만 않았어도 여기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 있었다고.’

그때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신인개발팀 팀장과 승진을 목전에 둔 동만이였다.

“백야 군을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잘 지냈어요?”

“아, 네. 안녕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꾸벅 인사했다. 동만은 등장하는 순간부터 백야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데, 저희가 가져온 소식을 얼른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나 백야의 감상은 조금 달랐다.

‘왕부담. 개부담.’

역시 사람 첫인상은 끝까지 가는 거구나. 백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편하게 계세요.”

“네에….”

팀장의 말에 백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른 건 아니고 저희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할 것 같네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연습생 해지 계약서. 동만을 보는 백야의 눈이 배신감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쫓아다닐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동만은 백야의 마음도 모르고 윙크를 찡긋 해 보였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급격히 오르는 혈압에 백야의 입꼬리가 작게 경련했다.

“계약 해지….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역시 구애의 춤이 문제였나. 끼는 아직 D등급이니까 매력이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잠깐 사이 백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러자 그를 본 팀장이 얼른 다른 종이를 한 장 더 내밀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겁을 준 것 같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이건 오늘 저희가 새로 작성하게 될 계약서입니다. 읽어 보시겠어요?”

ID 엔터테인먼트 가수 전속 계약서였다. 백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야 군 데뷔하게 됐어요. 축하해요.”

“와아~! 백야 군 축하해요!”

팀장과 동만이 맞추기라도 한 듯 박수 쳤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