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큰일 났다.’
오랜만에 본 시스템 창에 소리를 질러 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들은 백야가 자신들에게 실망해 팀을 하기 싫어졌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이… 실망할 시간이나 주긴 했냐고…….’
이마를 짚은 백야가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첫인상을 제대로 말아먹은 것 같지.
‘갑자기 나도 눈물이…….’
백야는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들었다. 흐르지 않게.
그러나 여기서 저까지 울 수는 없는 노릇. 매니저가 전화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지금,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수습해야 했다. 새로 뜬 퀘스트를 위해서라도.
조금 전 백야의 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은 히든 퀘스트 알림. 무조건 진행해야만 하는 메인 퀘스트와 달리 히든 퀘스트는 장소와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 듯했다.
때문에 퀘스트가 발생하는 타이밍도 당연히 예측 불가. 연습실 내에서만 진행할 수 있는 <득음을 위하여>와 <연습벌레만이 살길>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히든 퀘스트는 거절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댄스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냅다 거절을 질러 버린 덕에 <첫인상이 중요해> 퀘스트는 사라진 상태였는데, 대신 이번엔 다른 퀘스트가 나타났다.
[새로운 퀘스트(히든)가 도착했습니다!]
[Q.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 나는 백야!]
기분 탓인가.
꼭 저를 놀리는 거 같지만, 전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애교였다. 백야는 몇 없는 스타 포인트를 위해 퀘스트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겸사겸사 이 사태도 해결하고.
“저기… 제 이름은 한백야라고 해요. 금용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고 ID에 입사한 지는 이제 3주 정도 됐어요. 그리고 아까는 제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말이 헛나와서…….”
늦었지만 팀에 합류하게 되어 너무 영광이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이상적인 인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저를 향한 눈빛들엔 여전히 불안과 불신이 섞여 있었다.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제발.
어쩐지 억울했지만, 백야는 빌듯이 애원했다.
‘그런데 왜 완료 알람이 안 뜨지?’
이보다 완벽한 자기소개는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백야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게다가 분위기도 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형, 저 상처 받았어요….”
“햄스터 도망가면 우리 집에 가? 나 한국 힘들게 왔는데. 큽.”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하시잖아. 너희도 그만 울어.”
눈물이 터진 막내들을 달래던 민성이 백야를 바라봤다. 축 처진 어깨에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 백야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저마다 느끼는 게 다른 법. 백야는 민성의 차가운 눈빛에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추, 춥다.’
사실 키도 크고 제일 무섭게 생겨서 마음속 경계 대상 1순위였는데 그 사람이 제일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팀의 막내들을 울린 모양이었다.
‘망했네.’
막내는 어딜 가나 사랑받는 존재. 그런 존재를 울렸으니 남자가 저를 노려볼 만도 했다.
‘…그런데 햄스터라는 게 혹시?’
백야가 가늘게 뜬 눈으로 회색 머리를 곁눈질했다. 그 순간 백야의 시야로 곱상한 손 하나가 내밀어졌다.
“정말 저희 오해였던 거 맞죠? 저는 한지한이에요. 같은 고3.”
내내 말없이 서 있던 남자였다. 검은 생머리에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적인 차가운 얼굴.
“네? 네! 그럼요. 잘 부탁드려요.”
백야가 얼른 지한의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마주 잡은 두 손 위를 포개는 더 커다란 손.
“난 율무. 나율무. 팀에 친구가 한 명 더 늘어서 기쁘네~”
지한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있던 율무는 이 중에서도 키가 제일 컸다. 율무가 힘을 주자 세 사람의 손이 위아래로 흔들린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 인싸력. 백야의 시선이 슬쩍 위를 향했다.
‘못해도 저랑 10cm는 차이 나는 느낌인데.’
율무는 키도 크고, 손도 크고, 눈도 크고 다 컸다. 그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부럽다’.
그러나 얼른 정신을 차린 백야는 시선을 내리며 제 손을 빼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 친구 사이에 존대는 무슨. 편하게 해, 편하게. 나도 편하게 할 테니까.”
‘…넌 처음부터 편하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백야의 떨떠름한 얼굴이 율무를 향했다. 그러나 율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느새 백야의 어깨 위로도 팔을 두른 그는, 백야를 민성과 막내들 앞으로 이끌었다.
“이놈들 뚝! 우리 백야가 아니라는데 너희 언제까지 울 거야.”
통성명한 지 2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우리’ 백야였다. 백야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죄송해요. 애들이 순간 울컥한 것 같아요. 하루 종일 신경 쓸 일이 많았거든요.”
민성이 고개 들지 못하는 막내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조금 전 연습실에서 나가 달라며 총대를 멨던 남자였다.
“저는 도민성이라고 해요. 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다는 이유로 리더입니다.”
장난스레 웃으며 소개하는 민성.
“에이~ 형 아니면 누가 해. 아마 형은 막내였어도 리더 했을걸.”
“그건 그래.”
율무의 말에 지한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야가 보기에도 이 팀에서 리더를 맡을 만한 사람은 민성이 유일해 보였다.
“한백야예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 그럼 백야도 편하게 해. 그리고 아까는 나가라고 해서 미안했어.”
“아니에요. 저도 여러모로 도망가고 싶었던 상황이라…. 말은 천천히 놓을게요.”
말하면서도 서로 민망한 상황. 민성이 눈썹 위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민성은 소위 말하는 토끼상이었다. 아이돌 팀이라면 하나씩은 꼭 있다는 우리 집토끼.
“아 참. 그리고 여기는 우리 팀 막내들.”
민성의 손길에 떠밀려진 유연과 청이 앞으로 나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두 사람의 턱 위로 작은 호두가 한 알씩 박혀 있었다.
코 훌쩍이랴, 눈치 살피랴. 많이 바빠 보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이런 걸 갭이라고 하던가.’
살짝 무릎을 굽힌 백야는 고개 숙인 두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자꾸 울면 제가 미안해지는데….”
그 말에 고개 숙이고 있던 유연이 슬쩍 백야를 바라봤다.
금색 곱슬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퉁퉁 부은 눈 때문인지 확실히 처음 봤을 때보다 인상이 많이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한유연이에요. 18살.”
수줍게 꾸벅인 유연이 청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너도 그만 울고 인사하라는 의미였다.
“…나 청청.”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날카롭게 생긴 청은 외국에서 살다 와 한국말이 조금 서툴렀다.
“청아, ‘요’ 붙여야지.”
민성이 넌지시 말을 보탰다. 청은 차가운 인상 때문에 종종 오해를 받곤 했는데 그게 걱정된 모양이었다.
“왜? 싫어. 그거는 나보다 높은 사람한테 하는 거야.”
“뭐 인마?”
그러나 눈치 없는 막내는 형의 보살핌을 단번에 걷어찼다. 청에게 백야의 첫인상은 햄스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데다, 누가 봐도 자기보다 어려 보였으니까.
고3이라던 백야의 소개는 흘려들은지 오래였다.
“햄스텁,”
“입 닫아.”
민성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려는 막내의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부릅떴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
하루 종일 신경을 써서 그런가, 빨갛게 충혈된 눈은 공포영화에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을 자랑했다. 청은 저를 위협하는 빨간 눈알에 순식간에 기선을 제압당했다.
“…애가 햇빛을 너무 과하게 받고 자랐어.”
그런 친구가 부끄러웠던 유연은 고개를 저으며 청에게서 한걸음 멀어졌다. 혼잣말을 하던 유연이 백야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전보다는 풀어진 분위기에 고민하던 백야가 불쑥 끼어든 것도 이때였다.
“나는 백야…!”
뜬금없지만 내 알 바냐.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완료!]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1 스타 포인트]
그제야 퀘스트 완료 알람이 뜬다.
‘역시 저 대사를 해야 하는 거였어.’
설명이 너무 불친절한 거 아니냐며 한바탕 쏟아붓고 싶지만, 그랬다간 또 무슨 오해를 살지 몰랐다. 안 그래도 뜬금포 대사에 모두가 백야를 주목하고 있던 참이지 않는가.
백야가 태연한 척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어, 어려운 거 굳이 할 필요 없으니까. 하하…. 나도 그냥 편하게 할게. 그러고 싶어졌어.”
아까까지만 해도 말은 천천히 놓겠다더니…. 말은 안 하지만 다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치만 괜찮다. 퀘스트는 성공했고, 민망한 건 한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