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새벽부터 들이닥친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샵에 던져진 데이즈. 멤버도 많아 나이순으로 때 빼고 광냈더니 어느새 8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부랴부랴 차에 태운 남경은 또다시 악셀을 밟았다.
어디로?
“…임진각 하늘누리 공원?”
막 잠에서 깬 민성이 어디쯤 왔나 싶어 창밖을 살폈다. 그러다 발견한 간판을 소리 내 읽었다.
“…파주잖아?”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와 본 적 있는 곳이었다.
한편 차에 타기 무섭게 곯아떨어진 멤버들. 다들 잠을 설쳤는지 틈만 나면 졸아댔는데. 때문에 불안한 낌새를 느낀 건 아직 민성뿐이었다.
“형. 남경이 형.”
“어 민성아. 일어났냐? 거의 다 도착했어. 애들 깨우고 내릴 준비해.”
먼저 출발한 스태프들은 10분 전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상황. 남경은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다른 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님. 도착하셨어요?]
“네. 지금 저희 주차 중인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혹시 천막 여러 개 쳐져 있는 거 보이세요? 그게 대기실인데.]
“아! 알 거 같아요. 거기로 갈게요.”
‘……지금 나만 이상한가?’
혼란스러운 민성과 달리 남경의 통화는 자연스러웠다. 민성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 여기 파주 아니야? 우리 M사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
그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남경이었다.
“어? 맞잖아 M사. 너희 데뷔 무ㄷ….”
순간 남경은 쎄함을 느꼈다. 불현 듯 드는 안 좋은 예감에 그가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그게 여기라고? 왜?”
“응. …혹시 못 들었어?”
“뭘?”
“……에이 설마.”
주차를 마친 남경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며 뒤를 돌아봤다. 차가 멈춰 서자 하나둘씩 잠에서 깨기 시작하는 멤버들이 보인다.
“…다 왔어? 되게 금방 왔네.”
유연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말에다 새벽에 내린 눈 때문에 2시간도 더 걸린 참이지만, 남경은 지금 태평하게 그런 걸 알려 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성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다.
“너희 데뷔 무대 임진각…. 세상에. 진짜 아무도 안 알려 줬어?”
데이즈는 그저 ‘너희는 연습만 열심히 해라!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라는 회사의 말을 믿은 죄 밖에 없었다.
데뷔 전부터 의도치 않게 몰래카메라를 당하게 된 멤버들. 민성은 넋이 나간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하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슬슬 정신을 차린 멤버들도 ‘임진각’이라는 단어에 반응하기 시작했는데.
“이, 임진각이면 야외무대 아니야?”
제일 먼저 고장 난 백야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오늘 역대급 한파…….”
유연이 날씨 앱을 보며 중얼거렸다. 고급 선팅지도 무색하게 만드는 하얀 눈이 창문에 반사됐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주는 걸까?”
이를 악문 지한이 매니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우리 밖에서 해? 난 좋아!”
청만이 유일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캘리포니아 보이. 햇빛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다.
반면 회사에서 당연히 말해줬을 거라 생각한 남경은 당황스러웠다.
다른 거도 아니고 데뷔 무대인데!
물론 매니저로서 제 책임이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라도 한 번 더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이미 벌어진 일인 걸 어찌하랴. 남경은 일단 좋은 말로 멤버들을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어… 얘들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니겠니? 비록 날씨가 춥고 야외무대에다 생방송이지만…….”
그러나 내뱉는 단어마다 단점투성이었다.
라이브를 소화해야 하는 가수에게 치명적인 추운 날씨. 어떤 돌발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야외무대. 편집 과정 따위 없이 전국으로 송출되는 생방송.
무대 경험이 전혀 없는 신인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나는 분명 장점만 말하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장점이라고는 신인치고 꽤 후반부에 배치된 무대 순서?
아니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할 때 현장 생중계로 한 번 더 보인다는 거? 이것뿐이었다.
파리해진 안색의 남경이 데이즈를 바라봤다. 죄인이 된 기분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수습해야 했다.
그에겐 데이즈의 컨디션을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자, 잘할 수 있을 거야 얘들아. 하, 할 수 있다!”
불끈 주먹을 쥔 남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 * *
- 2X1231 임진각 가요 대전 리허설 프리뷰 #백야 #청 (백야 청.jpg)
- 2X1231 임진각 리허설 #DASE (데이즈.jpg)
- 애들 춥겠다 어떡해ㅠㅠㅠ 그 와중에 이름표 달고 있는 거 넘 귀엽ㅠㅠ
매니저의 걱정과 반대로 데이즈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 극강의 추위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기회라는 건 인정했기 때문에.
무대 순서도 꽤 뒤인 데다 새해 카운트다운 전, 임진각 생중계가 약 10분 정도 화면에 잡힌다.
비록 가만히 서 있는 게 전부겠지만, 데이즈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와~ 나 아까 리허설 하다가 지퍼에 부딪혔는데 손가락 부러지는 줄.”
“한국 추워….”
난로 앞에서 움직이질 않는 율무와 청. 민성이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해가 지면 기온이 더 떨어질 텐데.’
심지어 무대 위에는 난로도 없었다.
민성이 잠깐 고민하는 사이, 임시용 대기실의 천막이 걷히며 매니저와 백야가 돌아왔다. 두 사람의 손에는 카페용 캐리어가 들려있었다.
“얘들아, 이거라도 마시면서 몸 좀 녹여.”
득달같이 달려간 율무와 청이 따뜻한 컵을 손에 쥐었다.
“형 완전 땡큐!”
“나도 같이 가지. 그런데 너는 왜 아이스야? …안 추워?”
백야의 손에 들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강렬했다. 추위를 많이 탄다고 하지 않았냐는 율무의 말에 백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아이스가 좋아. 먹다 보면 별로 안 춥기도 하고.”
“독한 놈.”
핫팩을 주머니에 두 개씩이나 넣어놓곤 정작 마시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핫팩이 의미가 있나…?’
율무가 살짝 질린다는 얼굴을 하자 남경이 거들었다.
“얼죽아라신다. 이한 치한이라나 뭐라나.”
너는 특히 목 관리를 해야 한다며 남경이 2차 잔소리를 시전하려던 그때. 민성이 손뼉을 치며 해맑게 외쳤다.
“그렇지! 얘들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가자!”
“나가? 나가긴 어딜 나가. 이 추위에.”
남경이 너까지 왜 그러냐며 민성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율무와 청, 백야의 등을 떠밀어 대기실 밖으로 밀어낸 그는 남은 멤버들까지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너는 진짜 멋진 놈이야.”
“…나?”
백야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민성. 백야가 저를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이한 치한 정신에 깊게 감명받은 민성은 긴말 필요 없이 멤버들을 세 명씩 나눴다.
순식간에 대치 상태로 마주 선 1번 방과 2번 방 멤버들.
“뭐 하는 거야? 나 추워….”
청이 칭얼거렸지만 리더는 봐주지 않았다.
“무대 위에는 난로 없어 청아. 덜덜 떨면서 노래할래? 몸부터 풀자.”
그 말에 지한도 민성의 의도를 눈치챘다. 여기서 안무 연습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그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싸우자는 거잖아.’
조용한 또라이 스위치가 켜졌다. 금세 무릎을 굽혀 앉은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너 뭐 해?”
백야가 그 행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지한이 완성된 눈 뭉치를 들어 보이며 한쪽 입꼬리를 잔뜩 끌어 올리고.
“잘 봐. 한백야.”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잠시. 가차 없이 청에게 내리꽂히는 눈 뭉치에 백야는 경악했다.
“What the…!”
“너 뭐 해 지금?!”
지한의 선방으로 시작된 눈싸움. 이 소식은 한 홈마에 의해 빠르게 퍼지기 시작한다.
- 2X1231 임진각 리허설 대기중 #DASE (데이즈 눈싸움.jpg)
- 영하 21도 임진각에서 아아 마시는 얼죽 아이돌 (백야.jpg)
└ 보는 내가 다 추워ㅋㅋㅋㅋ
└ 와.. 진정한 얼죽아다
└ 얼죽아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 임진각 유배 보내놨더니 눈싸움하는 남돌 (데이즈.jpg)
- 눈싸움이요? 임진각에서요? 지금 파주 영하 20돈데요?
- 극한 한파에 돌아버린 아이돌 (눈싸움하는 데이즈.jpg)
└ 얘네 대박이다ㅋㅋㅋ 누구야?
└ 심지어 청 저 친구는 패딩도 안 입고 있네;
└ 오늘 임진각에서 데뷔 무대 하는 DASE입니다!
└ 젊은 애들이라 그런가 역시 다르네...
- 눈싸움 아이돌 저러다 데뷔가 아니라 깁스 먼저 하겠던데? 잡으러 가는 애 눈빛이 진정으로 돌아있음 (달리는 율무.jpg)
- 쟤네 결국 스텝들한테 끌려갔대ㅋㅋㅋㅋㅋ
* * *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재현과 유경은 거실 TV 앞에 앉아 제 친구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인이라 초반에 나올 것 같았는데 10팀이 넘어가도록 언급 한 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목이 빠지기 직전이었다.
[김유경 :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백야 지나갔니?]
[신재현 : 그룹명이 데이즈가 아닌 걸지도...]
SNS를 하지 않는 그들이 큐시트를 봤을 리도 없었다.
그저 MC가 언급해 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그때. 마침내 단조롭던 흐름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M가요 대전! 열기가 엄청난데요. 지금 일산 M센터와 임진각 하늘 누리 공원과 이원 생중계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해맞이를 위해 영은 씨가 임진각 하늘누리 공원에 지금 나가 계신데요. 한번 불러 볼까요? 영은 씨~”
[네 안녕하세요! MC 유영은입니다.]
“반갑습니다! 그곳 열기는 어떤가요?”
[네, 이곳 분위기 궁금하시죠? 갑작스러운 한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이 M가요 대전과 함께하기 위해 이렇게 모여 주셨습니다. 소리 들리시나요?]
“와~ 그곳 역시 열기가 대단해 보입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 추위를 한층 더 날려 보낼 수 있도록 아주 특별한 네 팀이 이곳, 임진각 하늘누리 공원에 와 계신데요.]
이어서 청팀과 백팀의 남녀 그룹이 두 팀씩 소개됐다. 청팀의 BB9와 블라썸. 백팀의 데이즈와 플라워문.
[기대되는 새해에 가장 뜨거울 것 같은 네 팀을 모셔 봤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이 자리가 아주 특별한 팀이 있는데요. 바로, 무려 8년 만에 ID에서 나온 보이그룹! DASE입니다.]
드디어 언급되는 데이즈에 메신저를 주고받던 재현과 유경이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엄마엄마엄마! 아빠! 이제 내 친구 나와!”
소파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가족들을 깨운 재현은 볼륨을 키우고.
“미친. 개 떨려. 아 너무 떨려. 토할 것 같아.”
“무대는 네 친구가 하는데 왜 네가 지랄인데. 좀 닥쳐 봐.”
호적메이트의 신랄한 욕도 들리지 않을 만큼 유경은 긴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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