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하아…….”
스태프들이 나가기 무섭게 바닥으로 무너진 백야. 무릎 위로 얼굴을 파묻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귀는 숨길 수 없었다.
“잘해 놓고 왜 그래~ 귀엽던데. 앙!”
율무가 백야의 옆에 앉으며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이 꼭 저를 놀리는 투. 백야가 어깨를 튕기며 팔을 털어냈다.
“저리 가.”
순간 터질 뻔한 웃음에 율무가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든 백야가 율무를 흘겨봤다.
“너, 씨이….”
“나율무. 당장 백야한테서 떨어져.”
빠르게 내려지는 리더의 접근 금지 명령. 대기하고 있던 청과 유연이 달려가 율무를 떼어냈다.
“저희 복숭아 님 심기 거스르지 마실게요.”
“햄스터 놀리면 안 돼!”
청과 유연, 민성이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백야를 봤다.
‘하……. 대가리 아프다.’
소파에 앉아있던 지한은 그런 다섯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귀엽게들 논다.
참고로 오늘 음악방송을 하러 온 이곳은 넉넉한 대기실 사정으로 신인도 방을 배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송국이었다.
잠깐 스태프를 만나고 온 남경이 슬슬 무대를 준비하러 갈 시간이라며 멤버들을 모았다.
그를 따라 도착한 세트장 뒤편. 데이즈가 움직이는 사이 비올렛과 나이스의 무대는 끝나고, 남은 보이그룹의 무대가 한창인 상태였다.
- 사랑하는 만큼 눌러줘
Beep Beep Beep Beep
BB9.
데뷔 시기는 저희보다 몇 달 앞섰지만, 크게 차이 나지 않아 최근 들어 라이벌로 엮이는 그룹이었다.
오늘 데이즈는 방송국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순서가 밀렸다. 때문에 그들보다 늦게 데뷔했음에도 뒤 순서에 무대를 하게 됐다.
“저 팀 안무 멋지던데.”
바로 옆에서 그들의 무대를 지켜보던 데이즈. 특히 유연의 눈이 반짝였다. ‘군무돌’이라는 소개가 무색하지 않게 퍼포먼스가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그들의 무대를 지켜보길 잠시. 노래가 끝나자 엔딩 포즈를 취한 BB9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대 전체를 잡던 카메라는 금세 화면이 전환되며 한 멤버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는데. 해당 멤버도 그를 눈치챘는지, 처음에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 곧바로 웃어 보였다.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였다.
“오~ 엔딩 요정~”
그를 본 율무가 마치 제 일인 양 기뻐했다. 그러더니 우리도 엔딩 요정으로 뽑히면 무언가를 하자며 멤버들에게 제안해 왔는데.
“마지막에 화면에 잡히는 사람이 뭐라도 하기. 어때?”
“콜! 나 완전 자신 있어.”
청이 좋다며 가장 먼저 동의했다.
엔딩 요정이란, 음악방송 무대 중 제일 마지막에 잡히는 가수를 일컫는 말로, 요즘 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되고 있는 퍼포먼스 중 하나였다.
연차가 쌓인 선배 가수들의 경우, 무대에서 도망을 간다던가 혹은 생각지도 못한 포즈로 팬들의 환호를 샀다.
다른 멤버들도 율무의 의견이 나쁘지 않은 눈치였다.
“과하지 않은 선에서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해.”
끝내 떨어지는 리더의 허락에 유연이 냉큼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윙크할까? 어때.”
지켜보던 남경도 그 정도는 다른 팀들도 하니까 괜찮은 것 같다며 찬성했다. 백야도 설마 제가 걸리겠어? 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 태어나서 제일 잘한 짓 = 돌잡이 때 복숭아 잡은 거 (백야 윙크.gif)
- 복숭안데 끼를 좀 잘 부리는 편 (백야 깨물하트.gif)
- 탐라 돌다가 주웠는데 다들 복숭아라고만 해서.. 이 복숭아 어디건가요?ㅠㅠ (백야 윙크.gif)
└ 데이즈 백야용♡ 맛 좋으니까 한번 잡솨보세유
- 겨울인데 탐라에 복숭아 찾는 사람이 많이 보이네^^ 그럼 나도 하나 툭.. (백야.jpg)
- 요즘 복숭아 당도 최고 브랜드 #데몬트 (데이즈.jpg)
* * *
ID에서 8년 만에 선보인 신인 그룹 데이즈의 선방. 그 때문에 사내 분위기는 잔뜩 들떠있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대중의 반응에 데이즈의 컴백 일정이 앞당겨진 건 당연한 순서. 기획팀은 또다시 바빠졌다.
“너희 조만간 컴백 준비 들어간다더라.”
기획실에 다녀온 남경이 소식을 전했다.
A&R팀의 선곡은 대충 끝난 상태며, 컨셉이 확정되는 대로 차기 곡 녹음에 들어간다는 말에 데이즈는 놀라워했다.
“벌써?”
지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희 이제 막 음악방송 돌기 시작했는데요?”
백야 또한 얼떨떨한 얼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태연했다.
“너희가 신인이라 더 빨리 작업에 들어가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팀들도 이렇게 해.”
컴백 주에 음악방송을 한 바퀴 돌고 난 뒤, 곧바로 다음 앨범 준비를 시작하는 가수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디지털 싱글이 아닌 이상 제일 작은 앨범은 미니앨범으로 최소 다섯 곡 이상. 특히 정규앨범일 경우 녹음해야 할 곡이 그보다 훨씬 많으니 그만큼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탓이었다.
“아마 미니앨범일 것 같던데. 지금부터 시작해도 아마 활동 끝나고 몇 달은 붕 뜰걸?”
이렇게 준비해도 활동 공백기가 생긴다는 이야기였다. 남경의 대답에 멤버들이 멍한 얼굴로 신기해했다.
거기다 자체 콘텐츠를 기획해달라는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회사에서 내린 중대 사항도 있었으니.
“그리고 너희 리얼리티 결정됐다더라. 축하해.”
남경이 활짝 웃으며 빅 뉴스를 터뜨렸다.
데이즈의 첫 단독 프로그램. 비록 너튜브 공식 계정에만 올라가겠지만, 여섯 명을 주인공으로 한 데이즈만의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 컴백 준비에 리얼리티까지 찍으려면 많이 바빠질 거야. 그래도 할 수 있지?”
“당근하지!”
신이 난 청이 남경에게 달려들었다. 끌어안긴 남경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다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부끄러운지, 사내놈이 이러니까 징그럽다며 괜히 툴툴댔다.
“아, 그리고 너희 여권 미리미리 만들어 놔야 하는데.”
만 18세 미만은 법정대리인의 동의서가 필요할 것 같다던 그는, 서류를 미리 준비했으면 한다고 했는데. 말을 전하면서도 제가 아직 생년월일을 다 못 외웠다며 남경이 눈을 피했다.
순간 율무의 얼굴 위로 장난기가 어렸다.
“뭐야~ 우리 생일을 모른단 말이야? 나는 형 생일 아는데.”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한 남경이 버벅거렸다. 그런데 여기 남경만큼이나 당황한 사람이 있었으니.
‘큰일 났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 전에 수습할 수 있으면 해 볼 작정이었는데. 아무래도 하늘은 백야의 편이 아닌 듯했다.
“일단 민성이랑 청이는 여권 있다 그랬지?”
남경이 급하게 화제를 돌리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2학년인 유연은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관계로 서류가 필요했고, 지한도 순순히 대답하며 협조했다.
“나도 아직 생일 안 지나서 써야 할 것 같은데.”
“야, 그걸 그렇게 쉽게 알려 주면 어떡해?”
잠시 율무의 타박이 들려오긴 했으나 그는 지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얘도 나랑 며칠 차이 안 나.”
이로써 율무까지 확정이었다. 이제 남은 건 백야뿐이었는데.
“백야는 생일이 빨랐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게 고3 이긴 한데요….”
그런데 대답하는 모습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남경이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요. 그게 아니라…….”
말하면서도 자꾸 유연과 청이 있는 쪽을 힐끔대는 백야였다.
“나?”
갸우뚱거리는 고개. 유연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를 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백야가 얼른 남경의 팔을 잡아당겼다. 남경의 허리가 백야의 키에 맞춰 숙어졌다.
잠시 귓속말을 나누던 두 사람. 이내 남경이 몸을 바로 세우고.
“빠른 이었어?”
그런데 그걸 왜 이렇게 말하냐는 얼굴. 남경이 초조해하는 백야와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들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이내 사정을 눈치챘다.
“아~ 애들이 널 형이라고 부르지? 그러고 보니 조금 애매하긴 하다.”
남경도 곤란한지 이마를 긁적였다. 처음 소개할 때 고3이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첫 만남에 가정사 때문에 학교를 조금 일찍 들어가게 됐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백야도 미처 거기까진 생각 못 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민성이 가장 연장자임에는 변함없다. 그다음 해에 태어난 지한과 율무가 나란히 11월생으로 동갑. 그다음이 백야와 유연, 청. 이 순서였는데.
“어쨌든 고3이고 막내들 중에 생일이 제일 빠른 건 맞잖아. 그냥 이대로 지내면 좀 그런가?”
남경이 교통정리에 나섰다.
‘그, 그런가…?’
개복치는 양심이 없는 편이었다.
“어때? 이런 건 말 나왔을 때 짚고 넘어가는 게 좋으니까.”
망설이는 백야 대신 남경이 유연과 청에게 물었다. 우려하던 것과 달리 유연도 별로 상관없어 하는 눈치였다.
“난 상관없어. 뭘 그런 거 가지고. 근데 몇 월인데?”
유연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그러나 지켜보는 제삼자의 입장에서만 느껴지는 묘한 공기. 유연을 제외한 이들은 그의 심기가 살짝 불편해진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3월.”
물어보는데 차마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던 백야. 백야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21일.”
그 순간 멤버들의 머리 위로 뜨는 물음표 하나.
3월도 빠른으로 치던가?
그런데 뒤늦게 붙는 한마디가 더 있었으니.
“…음력으로.”
그것도 무려 음력이라신다.
“……야, 요즘 다 양력 생일 챙기지 않나? 거기다 음력이면 훨씬 늦잖아. 저 정도면 그냥 조기 입하, 윽.”
율무에게 악의는 없었다.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눈치가 없을 뿐.
친구의 옆구리를 힘껏 찌른 지한이 이를 악문 채 경고했다.
“눈치 챙겨라.”
욕은 하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빛이 살벌했다.
같은 연생. 알고 보니 음력 생일.
한국인은 모두 알아들었다. 그러나 이 자리엔 미국인도 있었으니….
“빠른?”
유일한 외국인은 ‘빠른’이라는 단어부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음력이 뭐야?”
청의 해맑은 질문에 민성의 차분한 설명이 이어지고. 한쪽에서는 백야의 생일을 두드려보기 바쁜데.
[음력 3월 21일 > 양력 5월 3일]
응?
무려 유연의 생일보다 한 달이나 더 늦은 날짜가 나왔다.
“잠깐만.”
유연이 손을 들었다.
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