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컴백 날짜가 8월로 확정됐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로 회의실에 와 보는 건 처음인 백야는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요즘 정신없죠?”
회의실 문이 열리며 기획팀 직원들이 들어왔다.
자연스레 회의실 상석으로 향하는 여성의 이름은 이마리. 엔터계 마이다스의 손으로, ID 소속 가수들의 앨범과 컨셉, 아트 디렉팅을 도맡아 하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대한민국 최정상 아이돌 AIM부터 국민 걸그룹 로즈데이의 앨범은 물론. 데뷔와 동시에 루키로 떠오른 데이즈의 컨셉과 세계관까지 모두 마리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고 보면 됐다.
“백야 씨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우리 볼 기회가 없었죠? 내가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썼네.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안녕하세요.”
백야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꾸벅였다. 인사가 조금 이상했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마리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함에 백야의 눈알이 도르르 굴러갔다.
‘숨 막혀…!’
데이즈에 뒤늦게 합류한 백야는 컨셉 회의가 처음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지 못하는 개복치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꼬물거렸다.
그를 보며 피식 웃은 마리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다른 멤버와 직원들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리고 잠시 후, 부하 직원의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회의가 시작됐다.
“데이즈의 다음 컴백은 미니앨범이 될 거예요. 얘기 들었죠?”
“네. 들었습니다.”
리더 민성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멤버들도 알다시피 이번 신인 그룹에 제일 공들인 부분이 바로 세계관이에요.”
‘세계관?’
당연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백야는 회의실 가운데 띄워진 화면을 바라봤다.
[DASE UNIVERSE]
“데뷔곡 ‘놀이’가 데이즈 세계관의 인트로라면, 이번 앨범부터는 제대로 떡밥을 던질 생각이에요.”
PPT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쉽게 말하면 마피아 게임.”
화면 속에는 트럼프 카드 이미지가 떠 있었다.
흔히 원 카드로도 알려진 이 카드는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 클로버와 같은 네 개의 문양과 잭(J), 퀸(Q), 킹(K)의 알파벳. 그리고 조커를 더해 총 54장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마리는 ‘놀이(No Games)’ 뮤직비디오를 통해 이미 멤버마다 하나씩의 역할을 부여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뮤직비디오에서 카드가 계속 나왔었어.’
그저 제목이 ‘놀이’라 카드 게임을 시킨 거라 생각했는데, ID는 다 계획이 있었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세계관을 컨셉에 맞는 장치를 사용해 앨범마다 녹여낼 거에요.”
조금씩 조금씩. 팬들이 데이즈의 세계관에 흥미를 느끼고 직접 추리하며 빠져들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세계관을 녹여낼 첫 번째 미니앨범의 컨셉은.
“바로 인형 놀이입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데뷔곡 ‘놀이’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넘어간 PPT 화면에는 각종 공주 인형들이 자료로 떠 있었다.
‘……응?’
표정 분석기를 돌리면 100% ‘아무 생각 없음’이라고 나올 얼굴.
백야뿐만 아니라 기획팀 직원들을 제외한 데이즈 모두가 그랬다.
“…Princess?”
청이 살짝 초점이 나간 눈으로 중얼거렸다.
“한 번쯤 봤을 거예요. 여자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인형인데, 이게 이번 데이즈의 컨셉이에요.”
마리만 떠들고 있었다.
직원들은 애초에 상사의 말을 끊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고, 데이즈 멤버들과 남경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적당한 문장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마리도 그를 모르지 않는지 얼른 부족한 설명을 보충했다.
“그렇다고 공주 옷을 입힐 건 아니니까 그렇게들 우울해할 필요 없어요.”
PPT는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이번 자료들은 전과 비슷하지만, 성별은 남자였다. 비율도 3등신에서 8등신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다행이었다.
“구체관절인형이라고 실제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긴 인형이 있어요.”
좀 전의 자료가 마음에 안 든다면 이번 거만 참고해도 좋다 하자, 멤버들의 얼굴 위로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녀는 이번 타이틀곡의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을 인형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똑같은 머리에 똑같은 옷을 입혀 알록달록한 상자 안에 넣어서 대중에게 선보일 생각이었는데. 물론 여기에는 멤버들에게 말하지 않고 숨겨 둔 수가 하나 더 있었다.
* * *
▷ 현재 보유 스타 포인트 : 4점
허공을 보며 뽑기를 고민하던 백야는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데뷔 활동도 이번 주로 끝이고, 당분간 데이즈는 리얼리티 촬영과 컴백 준비로 바쁠 예정이었다.
‘굳이 스킬업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컴백 준비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아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근데 왜 퀘스트가 안 뜨지?’
퀘스트 완료 후, 바로 뜨진 않더라도 하루를 넘긴 적은 없었는데. 어쩐지 데뷔 후부터 퀘스트가 점점 예상을 벗어나는 것들만 나오는 기분이었다.
한 손에 싸인 CD를 든 백야가 멍하니 복도를 걸었다.
[신인 개발팀]
멈춰 선 곳은 백야가 연습실 다음으로 가장 많이 와본 곳이었다. 노크한 백야는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계세요?”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사무실은 비어 있었다. 누구 없냐는 물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것만 얼른 두고 가자.’
문을 조금 더 연 백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그란 눈이 동만의 이름표를 찾았다.
[과장 김동만]
조금 안쪽에 있었지만 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였다. 재빠르게 발을 놀린 백야가 얼른 책상 위에 CD만 두고 나왔다.
사실 전부터 주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스케줄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갑자기 생각난 건, 조금 전 기획팀과의 컨셉 회의에서 들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동 과장이 혹시 데이즈 CD 남은 거 없냐고 물어보던데. 자기가 캐스팅 한 멤버가 있다더니 애착이 대단해.」
「저도 한번 찾아본다고 말씀은 드렸는데… 왠지 힘들 것 같아요. 사내에도 갖고 있는 사람 몇 없을걸요? 임진각 무대 이후로 워낙 난리여서.」
김동만. 백야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제 데뷔의 1등 공신.
동만은 남경과도 친한지, 종종 남경에게서 그의 근황을 듣곤 했는데.
‘내 안부를 그렇게나 물어보신다고…….’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스케줄은 힘들지 않은지 등. 조금 과한 것 같긴 하지만, 나름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백야였다. 백야는 은혜를 모르는 놈이 아니었다.
‘좋아하셔야 할 텐데.’
개발팀 문을 살포시 닫고 나온 백야가 얼른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갔다. 더 완벽한 데이즈를 위해 연습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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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E_Official]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드디어 저희의 ‘놀이(No Games)’ 데뷔 앨범 활동이 끝났습니다! 와아~! 그런데 너무너무 아쉬워요ㅠㅠ
그래도 저희 금방 돌아올 테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응원해주시는 팬 여러분 항상 고맙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데이즈 #DASE #놀이 (눈 밑으로 휴지 붙인 단체 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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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뷔곡이면 오래 준비했을 텐데 활동 한 달만 더 하자...
- 막방 안돼 난 못 보내ㅜㅜ
- 애들 휴지 붙인 거 누구 아이디어냐 개 귀엽네 진짜 (오열짤)
- 그래서 그 금방이 언젠데.. 알려주고 가!
- 데이즈 데뷔해줘서 고마워♡
오늘로써 한 달간의 데뷔 활동이 끝났다. 1위 발표까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메이크업은 지우지 말고 옷만 갈아입으라는 남경에 지한이 물었다.
“우리 남은 스케줄 있어?”
“스케줄까진 아니고 영상 좀 찍을 게 남아서.”
한쪽에서는 화장을 지우려는 청과 그를 말리는 스타일리스트가 보였다.
“야 야, 화장 지우면 안 돼!”
“왜? 싫어! 지워야지~”
“청개구리냐!”
남경이 청을 제지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살짝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분명 오늘 아침에 스케줄을 물어볼 때까지만 해도 음악방송밖에 없다고 했기 때문에.
“형, 뭐 들은 거 있어?”
지한이 민성을 바라봤다.
“글쎄.”
민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전달받은 게 없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청을 말리러 간 남경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마침 화장실을 다녀온 백야가 카메라 한 대와 함께 등장했다.
“저… 혹시 남경이 형, 저희 뭐 더 찍어요?”
“으, 어?”
당황한 남경이 말을 더듬자 카메라맨이 이때다 싶어 나섰다.
“그냥 데이즈 첫 앨범 활동 끝난 기념으로 회사 계정에 올릴 영상 촬영하는 거예요.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저는 금방 갈 거예요.”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 상황. 이후에는 지한과 민성도 별 의심 없이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오~ 메이크업 지우지 말라더니 이거 때문이구나?”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갔던 율무가 돌아왔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여유롭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우리 마지막 방송이라 짧게 찍으러 오셨대. 회사 계정에 올리실 건가 봐.”
“아하? 안녕하세요~”
율무가 백야의 손을 잡아 제 손처럼 카메라를 향해 흔들었다. 10cm는 더 차이 나는 키 때문에 백야가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자, 백야는 소름이 끼치는 듯 얼른 품에서 빠져나왔다.
“비켜. 나 옷 갈아입으러 갈 거야.”
백야가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자 눈을 게슴츠레 뜨는 율무. 음흉한 미소는 덤이었다.
저건 무슨 꿍꿍이가 있을 때만 나오는 얼굴인데.
“우, 왜… 왜.”
백야의 발이 주춤, 뒤로 물러나고. 율무가 또 율무를 했다.
“내가 입혀줄까?”
미친놈.
백야의 턱이 쩍하고 벌어졌다.
“미, 미친! 저리 가, 이 변태야!”
“아 왜에~ 내가 입혀줄게!”
도망가는 백야와 뒤를 쫓는 율무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 * *
“얘들아, 다 왔다. 들어가서 자.”
천천히 멈춰서는 흰색 카니발. 남경이 곤히 잠든 멤버들을 깨웠다.
‘왠지 푹 잔 것 같은데….’
백야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곯아떨어진 멤버들도 하나둘씩 눈을 떴다.
얼른 내리라는 남경의 재촉에 가장 마지막에 올라탄 백야가 차 문을 열었다.
“……?”
그런데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늘 보던 지하 주차장은 어디 가고 싸늘한 들판이 보였다.
“왜 그래?”
내리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백야에 유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는 백야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는데. 웬 다 쓰러져가는 폐가가 보였다.
“뭐야? 형. 여기가 어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유연도 급하게 남경을 찾지만, 운전석은 이미 비어 있었다.
‘튀었구나…!’
그 사이 민성은 내릴 준비를 마쳤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먼저 차에서 내렸는데. 순간 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어진 카메라 한 대.
“무, 무, 뭐예요?!”
민성이 놀란 토끼 눈을 뜨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