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나가도 돼? 요?”
“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나는 청이 인형!”
청이 활짝 웃으며 상자 안에서 걸어 나왔다. 카메라를 향해 여유롭게 지어 보이는 미소.
데이즈는 오늘 하루 인형 컨셉에 충실할 예정인 듯했다.
- 인형이 상자를 찢고 나왔다!
- 순간 종이 인형이라는 줄ㅋㅋㅋ
- 그럼 애들 지금 저 안에서 자기 차례 기다리고 있는 거? 귀여워ㅠ
채팅창이 무섭게 올라갔다.
그사이 두 번째 인형의 등장. 고개를 내민 백야가 카메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뺨을 가리며 걸어 나왔다.
“나, 나는 백야 인형…….”
“얼굴 가리지 마!”
청이 백야의 손을 끌어 내리자 수줍게 물든 두 볼이 드러난다.
- 복숭아가 왜 걸어 다녀..?
- 개 귀엽네 진짜ㅠㅠㅠ
- 아 미친 설마 얼굴에 저거 볼 터치 한 거?? 볼이 완전 핑크 핑큰데?
등장 순서는 나이로 정했는지, 그 뒤로 유연과 율무, 지한, 민성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한 명씩 상자에서 걸어 나올 때마다 박수로 맞이해주는 멤버들. 어느새 데이즈는 연하의 옆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데이즈 여러분.”
연하가 한 번 더 인사했다.
데이즈 인형의 집에 자신을 초대해줘서 너무 고맙다며, 그가 준비해 온 케이크 상자를 건넸다. 뮤직비디오에서 청이 먹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일단, 자리에 앉기 전에 단체 인사 한번 드릴까요?”
“네! 하나 둘 셋.”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늘 그렇듯 민성의 선창으로 시작되는 데이즈의 팀 구호. 다들 이런 본격적인 생방송은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한 분씩 돌아가면서 간단히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처럼 오늘 데이즈의 집에 처음 놀러 오신 분들도 계실 테니까.”
누구부터 하겠냐는 질문에 서로를 쳐다보던 가장자리 멤버들. 청과 율무가 눈빛을 몇 번 주고받더니 율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율무를 시작으로 간단한 소개 인사가 한 바퀴 돌고, 순서는 다시 연하에게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앉아 볼까요?”
집은 데이즈의 집이지만 주인은 연하인 듯한 상황.
- 뭐가 조금... 이상한데?ㅋㅋㅋ
- 데이즈 인형의 집이 아니라 연하 집에 데이즈가 놀러 간 건가요?
- 애들 긴장한 거 너무 귀엽다
- 근데 애들 옷이.. 굉장히 편해 보이네ㅎㅎ 특히 백야
상황은 대충 이랬다.
자기 주인을 따라 친구네 집에 함께 놀러 오게 된 연하. 인형 놀이를 하던 두 꼬마 아가씨가 저녁을 먹으러 잠깐 방을 비운 사이, 연하와 데이즈가 움직이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집이 정말 깨끗하네요.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집이라 그런가요?”
연하가 연출된 장소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바로 곁에 있던 율무가 능숙하게 멘트를 받았다.
“오늘 친구가 놀러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가 아침부터 열심히 청소했거든요.”
손등으로 땀을 훔치는 척 이마를 닦던 율무.
“휴우~”
그가 힘든 척 숨을 내쉬더니 멤버들을 돌아봤다.
“음… 그래서 저희가 미처 옷을 갈아입지 못했어요.”
백야가 자신의 옷을 한 번, 율무를 한 번 번갈아 봤다.
‘쟤한테만 대본을 따로 줬나?’
입만 열면 멘트가 청산유수처럼 쏟아졌다. 율무가 괜히 예능 담당 멤버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백야. 그런 그에게 율무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그렇죠, 백야 인형?”
“네?”
백야의 눈이 커졌다.
‘다짜고짜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야…!’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율무가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저희 얼른 옷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주인님이라니!
나한테 왜 그러냐는 원망 어린 눈이 율무를 향했다.
생방송 직전, 전달받은 거라고는 오늘의 방송이 인형의 집 컨셉이라던 말이 전부.
연하가 잘 이끌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백야는 정말 태평히 앉아만 있었다. 백야는 그저 퀘스트를 성공할 건지 실패할 건지를 두고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그때 백야의 머릿속에서 현 상황과 퀘스트,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졌다.
‘방송 컨셉이 인형. 퀘스트 실패 시 페널티가 컨셉 소화력 100%. 이 두 개를 더하면…….’
퀘스트 실패 시 인형이 된다?
진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 돼!”
개복치 특성으로 죽는 거로도 모자라 이제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빼앗으려 들다니!
악랄한 시스템 창에 백야가 사색이 돼 소리쳤다.
‘퀘, 퀘스트가 뭐였지?! 과몰입? 컨셉 장인?’
오늘 하루,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빠르게 재탐색 중인 개복치 내비게이션.
삐빅.
경로 재탐색을 완료하였습니다.
빠르게 노선을 변경한 백야가 조금 전 급발진을 황급히 수습하기에 나섰다.
“주, 주인님이 돌아오시기 전에 얼른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백야가 자신의 티셔츠 밑자락을 잡고 펄럭이며 말했다.
“이거! 이거 빨리 갈아입어야 하는데…!”
청소 때문에 몰래 갈아입은 옷이라 주인님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는 백야. 그는 앉은 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 과몰입 대박ㅋㅋㅋㅋㅋㅋ
- 주주주인님이라니?! 미친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 백야 부끄러워할 줄 알았는데 제일 몰입했는데 지금?ㅋㅋㅋ
- 연하랑 율무 인형 빼고 지금 다 당황했다고요ㅋㅋㅋㅋ
- 아악!!!! 너무 귀여워!!!
“그럼 저는 잠깐 집 구경을 하고 있을 테니 얼른 갈아입고 오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백야가 율무를 돌아봤다. 어서 진행하지 않고 뭐 하냐는 눈빛이 그를 마구 찔렀다.
‘…쟤 갑자기 왜 저래?’
드물게 당황한 율무가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준비된 상자로 손을 뻗었다.
“혹시 몰라서 제가 아침에 여러분들 사진을 찍어 뒀거든요.”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멤버들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있었다. 실제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사진 속 멤버들은 3등신이라는 점?
공홈에서 서비스 중인 <데이즈의 의상실>에서 만나볼 수 있는 멤버들의 3D 캐릭터였다.
연하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토끼 귀 머리띠를 한 민성의 캐릭터 사진이었다.
“사진이랑 실물이 정말 똑같네요. 그럼 도와드릴 겸 제가 한 분씩 나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씩 손에 든 폴라로이드. 사진을 확인한 몇몇 멤버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팬들은 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눈치 빠른 몇몇은 연하가 나눠 준 폴라로이드가 그냥 사진이 아닐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 저거 우리가 짹에 올린 의상실 사진인 거 아니야?
사진을 확인한 백야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이게… 다 뭐야?’
그래도 방송 중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싫은 기색을 비치진 않았다. 그저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내뱉는 목소리.
“저기……. 저는 이런 옷을 입은 기억이 없는데요?”
옆에 있던 유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요.”
그러나 연하는 완강했다.
“그럼 얼른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연하가 뒤편의 드레스 룸을 가리켰다.
“사진 속 의상을 찾아서 갈아입고 이곳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탈의실은 반대편이라며 친절한 웃음으로 알려주기까지 한다.
- 저기 데이즈 집 아니냐고ㅋㅋㅋ
- 연하가 집주인이고 데이즈가 전세 들어온 거라는 게 학계 정설
당황스러운 데이즈와는 다르게 채팅창은 화기애애했다.
‘이러려고 옷 갈아입을 필요 없다고 한 거구나.’
백야가 심각한 얼굴로 손에 든 폴라로이드를 내려다봤다.
[코디 명 : 복숭아 / 스타일리스트 : 복쑹]
초록색 베레모에 분홍색 트러커 재킷, 분홍색 팬츠. 목에는 진주와 체인이 얽힌 화려한 목걸이.
팬이 복숭아를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자세히 보니 3D 백야는 상아색 보석 귀걸이도 하고 있었다. 리얼 백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이 엄청난 코디를 과연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자칫하면 흑역사로 평생 인터넷에 떠돌아다닐지 몰랐다.
심란해진 백야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옆을 돌아봤다. 저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얼굴로 폴라로이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연이 있었다.
“…너는 어때?”
유연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글쎄. 볼래?”
백야의 앞으로 사진 한 장이 쓱 내밀어졌다.
[코디 명 : 반만 남긴다 / 스타일리스트 : 타노쓰]
타노쓰면 핑거스냅 한 번에 세계 인구 절반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최강 빌런 아니던가.
세계관 최고 악당의 작품답게 3D 유연의 옷은 천이 많이 모자라 보였다. 복부가 추워 보인다.
아무래도 빌런이 손가락을 튕기고 만 모양. 아무도 막지 못했나 보다.
“……크롭티?”
티셔츠 몸통 부분의 길이가 상당히 짧았다. 캐릭터상으로도 살색 배가 바지 위로 한 뼘은 보이는 중.
백야는 생각했다.
‘난 참 행복한 놈이구나.’
아무리 분홍색이 부담스러워도 난 온전한 옷이니까, 파이팅!
유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백야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뭐 하다 이제 와?”
이미 옷을 다 찾았는지, 팔에 옷을 걸친 민성이 백야의 손목을 슬쩍 잡아당겼다. 다른 멤버의 의상이 궁금한 듯했다.
“어? 나 이거 아까 저기서 봤는데. 바로 보이더라.”
민성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백야가 입술을 꾹 말아 물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응. 고마워.”
“잘 어울리겠네.”
민성이 백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나쳤다.
이어서 입장한 유연. 민성은 그의 사진도 슬쩍 확인했다. 짧은 감탄사를 뱉더니 이내 그에게도 옷의 위치를 알려주며 탈의실로 떠났다.
- 민성이 의상실 NPC야? 만나는 애들마다 다 알려줘ㅋㅋㅋㅋ
- 지한이! 지한이 방금 초커 골라 갔다고! 애들 진짜 의상실 코디 그대로 입고 나오는 거 맞나봐ㅜㅜ
- 애들 옷 너무 궁금하다ㅠㅠ
- 연하야 사랑해♡
데이즈가 팬들이 코디한 의상실 옷을 입으러 갔다는 말이 SNS로 퍼지며 라이브 시청자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텅 빈 여섯 개의 의자 옆으로 홀로 앉아 있는 연하가 채팅창을 보며 팬들의 질문에 대신 답을 해주고 있었다.
“데이즈 어디 갔냐고요? 잠깐 옷 갈아입으러 갔어요.”
슬슬 나올 때가 됐다며 탈의실 쪽을 슬쩍 돌아보던 연하. 마침 문이 열리며 청이 와다다 뛰어나왔다.
“내가 1등이야!”
요란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청이 연하의 앞으로 달려가 폴라로이드를 척 내밀었다.
“나 완전 똑같죠!”
사진과 청을 번갈아 보던 연하가 작게 감탄했다.
“오. 사진에서 튀어나온 줄 알겠어요.”
[코디 명 : 세계 서열 1위 / 스타일리스트 : 사학루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