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기다렸다는 듯 끈적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미 타 방송에서 댄스로 신고식을 치른 유연이 제일 먼저 몸을 움직였다.
하체에서부터 올라오는 느린 웨이브. 그저 골반을 돌리는 기본적인 동작이었음에도 살짝 기울인 고개와 눈빛 때문에 야하게 느껴졌다.
“훠우! 역시 메인 댄서!”
율무가 손을 모아 외쳤다. 함께 있던 연하도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후배의 끼 부림에 즐거워했다.
- 저 미친 fox 오늘 또 사고 치네
- 믿고 보는 유연 섹시 댄스
- 스타트를 네가 하면 지한이랑 백야는 어떡하라고ㅋㅋㅋㅋ
- 연하 무슨 손주 재롱잔치 보듯 구경하고 있는데요ㅋㅋㅋㅋ
- 저번에 선배 그룹 보라에서 췄던 섹시 댄스 19세 판정받고 삭제됐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건 지한과 백야뿐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이런 걸 제일 못하는 두 사람이 걸렸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손짓으로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 다음! 지한이~”
적당한 선에서 끊은 유연이 뒤로 한 걸음 빠지자, 율무가 다음 타자의 이름을 외쳤다.
‘나율무 나이스!’
백야가 속으로 환호했다. 반면 지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중앙으로 걸어 나간 그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웨이브라도 해야 하나….
당황한 지한이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으며 고민하는데.
“역시.”
“So Sexy~”
민성과 청의 감탄이 이어지고,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 그냥 입술만 씹었는데 K.O.
- 압도적 섹시
- 와 개도랏다 미쳤네 한지한;;
- 나른+예민+섹시=지한
“이야~ 존재 자체가 섹시!”
지한을 향해 박수를 보낸 율무가 이어서 백야의 이름을 외쳤다.
“다음은 백야~”
“……나?”
동병상련을 느끼며 지한의 춤을 기다리고 있던 백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데? 한지한 뭐 했는데?’
방황하던 눈이 지한을 향했다.
뭐야?
몰라.
이젠 눈빛만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지에 다른 두 사람.
떠밀리듯 스테이지에 입장한 백야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냥 댄스도 미칠 노릇인데 섹시 댄스라니. 아무나 좀 도와줘…!’
백야가 내적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나타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자동 모드로 전환됩니다.]
[<춤신춤왕(C)> 스킬 발동!]
상태 창이 나타나며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이 망겜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숨겨 둔 수가 더 있었다니. 끔찍했다.
‘아니야. 해제. 안 해! 안 한다고!’
백야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었다.
[스킬 발동 중에는 모드를 해제할 수 없습니다.]
[남은 시간 00:01:42]
‘이런 망할!’
춤신. 그분이 백야의 몸에 들어오셨다.
맨정신인 상태로 시스템에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백야. 사람을 홀리는 마성의 춤사위가 시작됐다.
비장하게 뒤돌아선 개복치. 그가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리더니 손을 엉덩이 위로 착! 올리며 웨이브와 함께 쓸어 올렸다.
“푸흡.”
연하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왼팔로 허리를 짚더니 상체를 반쯤 비틀며 오른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는 춤신춤왕. 작정하고 끼를 부리고 있었지만 햄스터는 섹시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파핰!”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 버린 민성. 그가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허. 거기 경고예요.”
율무가 민성을 향해 노란색 큐카드를 들어 올렸다. 옐로우 카드를 받은 민성이 고개를 꾸벅이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반면, 소리를 들었음에도 춤에 흔들림이 없는 백야. 유연은 어쩐지 백야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저거 진짜 한백야 맞아?’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냥 댄스도 버거워할 놈이 섹시 댄스를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추고 있다는 게 말이 되질 않았다.
‘아. 그냥 정신을 놓은 건가?’
백야를 유심히 관찰하던 유연이 이쯤에서 적당히 끊어 줘야겠다 생각하며 무대에 끼어들려는 순간.
“훠우! 고 백야! 고 백야!”
청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갑자기 바닥 위로 드러누운 백야의 돌발행동 때문이었다.
옆으로 뒤돌아 누운 그는 한쪽 다리를 쭈욱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시선은 어깨 너머 정면을 향해 고정. 눈빛이 단단했다.
어느 카메라에 불이 들어와도 단번에 찾아내고 마는 저 집요한 눈은 그의 아이돌다운 면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미친.”
경악한 유연이 절로 벌어지는 입을 막았다.
마치 못 볼 걸 본 모습.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화려하게 장식한 피날레에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카메라 한 방에 찾아내는 거 봐
- 미친ㅋㅋㅋㅋ 백야 미쳤냐고ㅋㅋㅋㅋ 섹시 큐티 끝판왕
- 졸라 귀여워!! 하씨 잇몸 마른다
- 귀여운데 너무 열심히 해서 내가 다 안쓰러워 흑흑ㅠㅠ 그치만 너무 좋다
- 들고 튀고 싶다 증말루
[남은 시간 00:00:00]
[자동 모드가 해제됩니다.]
털썩.
춤 신에게서 몸을 되찾은 백야의 다리가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철퍼덕.
몸을 뒤집어 엎드린 개복치가 팔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망했어…….’
이걸 어떻게 수습해? 난 못 해.
백야는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데이즈에서 최고 섹시한 멤버는 아무래도 이분 같죠?”
음악이 끝나자 백야의 옆으로 다가간 연하가 몸을 굽히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일어나세요. 섹시킹.”
조금 전까지 무대를 장악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 바닥에는 축 늘어진 햄스터 한 마리만 남아있었다.
“이게 바로 제가 백야를 지목한 이유였습니다~”
율무가 손뼉을 치며 뿌듯해했다.
“일어나,”
“형, 감기 걸려!”
다가온 지한과 청이 백야의 팔을 한쪽씩 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제발 날 내버려 둬…….”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백야가 손바닥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Hey! 잘해놓고 왜 그래?”
청이 백야의 손을 끌어내리자, 그를 피해 율무의 뒤로 가 숨어버리는 햄스터. 그의 커다란 체격 덕분에 백야가 단숨에 가려졌다.
“하지 마. 제발…….”
율무의 등에 이마를 쿵 박아 버리는 백야. 방심하며 서 있다 크게 휘청인 율무가 살짝 뒤돌아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유 깜짝이야. 순간 황소가 들이받는 줄 알았지 뭐예요~”
율무는 아무래도 백야가 많이 부끄러운가 보다며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다른 얘기하고 있으면 알아서 나올 거예요. 저희 애가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걱정이라며 고개를 젓는 율무. 장난스럽지만 깔끔한 정리에 채팅창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섹시킹 왕관 수여식은 잠시 후 진행하기로 하고요.”
슬며시 미소 지은 연하가 그의 멘트를 받아 다음 질문을 읽었다.
“계속해서 저는 뱁쌔 님께서 올려주신 질문을 여쭤볼게요.”
뮤직비디오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Want Me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화제가 됐습니다. 사실 남자 아이돌 그룹에서 인형 컨셉은 데이즈가 처음이거든요.”
연하가 청에게 질문했다.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이 인형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장면은 CG인가요?”
청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No. 우리가 진짜 들어갔어요!”
청이 양팔을 벌려 커다란 원을 그렸다.
“우리 이만큼 큰 상자에 한 명씩 들어가서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었는데?”
“요.”
“…요!”
유연이 청의 팔을 툭 건드리며 존댓말을 지적했다. 그래도 방송이라고 냉큼 유연의 충고를 받아들인 청은 배시시 웃으며 연하와 카메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인형의 집도 실제 크기로 제작된 건가요?”
연하가 질문하자 민성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궁금하신가요?”
“네. 너무 궁금하네요.”
이미 목격담으로 알려진 적 있는 데이즈의 뮤직비디오 촬영장 비하인드가 공개될 순서였다.
“그래서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데해데에서만 볼 수 있는 Want Me 메이킹 영상!”
비장한 얼굴의 민성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함께 보시죠.”
화면이 전환되며 안무를 추고 있는 데이즈의 모습이 보였다.
[WANT ME M/V 촬영 현장]
크게 울려 퍼지는 곡은 2절 브릿지. 유연의 파트였다.
동작을 멈춘 멤버들 사이에서 홀로 안무를 소화하며 카메라 앞으로 걸어 나오는 메인 댄서. 후렴으로 이어지기 직전, 장면이 바뀌며 세트장 구석에 모여있는 멤버들이 나타났다.
각자 손에 들고 있는 아기자기한 스티커들. 카메라를 발견한 율무가 백야에게 물었다.
[율무 : 지금 저희 뭐 하고 있는 거죠?]
[백야 : 스티커 붙이기요!]
스티커를 하나 떼어 낸 백야가 율무의 뺨 위로 붙이며 대답했다.
꾸욱.
살짝 감정이 실린 듯한 손길.
스티커를 핑계로 친구의 얼굴을 힘껏 누르자 율무가 몸부림쳤다.
[율무 : 으윽. 백야, 그만. 그…!]
[백야 : 안 돼. 떨어진단 말이야.]
휘어진 눈가가 한눈에 봐도 즐기는 모습이었다.
햄스터에게 붙잡힌 대형견이 절절매는 순간, 다른 멤버들도 서로의 얼굴에 스티커 붙이기가 한창이었는데.
[청 : 이리 와! 내가 붙여 줄게.]
[유연 : ……넌 너무 많이 붙인 거 아니야?]
청을 발견한 유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양 뺨으로도 모자라 코와 이마까지 붙어있는 스티커. 보나 마나 자기가 직접 붙였을 게 뻔했다.
[유연 : 인간적으로 이마에 붙인 거는 좀 떼자.]
그래도 명색이 뮤직비디오인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찍을 수는 없지 않은가.
유연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재빠르게 얼굴 위로 팔을 크로스하며 거부하는 청.
[청 : No! 지한이 해 준 거야!]
누가 뭘 해 줘?
유연의 고개가 옆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