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아무래도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 게 조건이었던 모양이다.
‘입 안이 쓰다.’
벌써부터 씰룩거리는 율무의 입꼬리를 보라. 아무래도 한동안 심하게 놀림당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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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려고 만든 포토 카드 정리본
(데이즈 포카 모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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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데이즈의 포토 카드 정보를 모은 뱁쌔.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다소 흐린 화질을 선명하게 보정하고, 인형 상자 디자인을 그대로 따와 일러스트로 배경 작업까지 한 그녀는, 그 위로 열두 장의 포토 카드를 올려놓으니 더 영롱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만들고 나니 혼자 보긴 아까운 마음에 슬쩍 SNS에 올려 봤는데, 반응도 꽤 좋았다.
- 혹시 직접 만드신 건가요?
- 대박! 뱁쌔 님 완전 금손!
엄청난 재능 낭비였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금손 님.
뿌듯한 뱁쌔가 자신의 작업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음. 훌륭해.”
[브이 민성 / 토끼 민성]
[후드 지한 / 팝콘 지한]
[샤워 가운 율무 / 윙크 율무]
[스티커 백야 / 군밤 백야]
[베레모 유연 / 패딩 유연]
[선글라스 청 / 젤리 청]
열두 장의 포토 카드에는 나름의 명칭이 존재했다. 이 중 뱁쌔가 가지고 있는 건 <후드 지한>과 <젤리 청>.
멤버별로 포토 카드가 두 개씩이라는 말에 앨범을 두 장이나 구매했는데 최애는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앨범을 더 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뱁쌔는 자신의 타임라인에 뜬 포카 교환 글을 발견하게 된다.
[원미 포카 교환 구해요~]
결국 나중에 가면 드래곤볼을 하게 된다지만 라이트 팬에게는 아직 와 닿지 않는 이야기.
참고로 드래곤볼이란, 최애 상관없이 멤버들의 모든 포카를 모으는 행위였다.
“백야만 있으면 되는데….”
그런데 누가 뭐랑 교환을 원하는지, 제가 어떤 포카를 들고 있는지 알아야 글을 올려보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인생 첫 덕질이라 그런가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데이즈 포토 카드 정리본을 만들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
그렇다면 이젠 파악도 됐겠다. 글을 올려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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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즈 WANT ME 포카 교환 구해요♡
나 : 후드 지한, 젤리 청
님 : 모든 백야
서울 직거래 가능. 디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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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글을 올린 그녀는 잠시 미뤄 뒀던 타임라인을 살펴보러 갔다. 대부분이 어제 있었던 라이브 방송을 앓는 글이었다.
- 우리 애 과몰입 아니고 진짜 인.형.이.라.고.요.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년. 우리 모두 김여주 되는 한백야 사진 타래 (백야.jpg)
- 데이즈 WANT ME 초동 3일 차 ▷33,8xx ▶현재 누적 151,4xx
- 청이 스티커 백야 골랐구나?
└ 스티커 백야 못 가지면 죽음뿐
└ 군밤도 못 잃어ㅠㅠ
마지막 짹까지 모두 살펴본 뱁쌔가 편지 모양의 탭을 눌러 새로고침해 보았다.
텅 빈 쪽지함.
“…내가 글을 잘못 올렸나?”
제법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연락이 하나도 오질 않았다. 결국 직접 서치하기로 마음먹은 뱁쌔는 검색 탭으로 이동했다.
뭐라고 검색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실시간 트렌드 상위권에 데이즈의 이름이 보였다.
그것도 무려 3위.
[데이즈 드디어]
‘드디어?’
갸웃거린 뱁쌔가 해당 트렌드를 눌렀다.
- 드디어!!! 데이즈 드디어 팬싸 공지 떴어요ㅠㅠ 애들 인생 첫 팬싸 무조건 간다
- 데이즈 드디어 팬싸 한다! 앨범 지르러 간다!
- 탐라에 포카 올라오는 거 보고 진짜 부러웠다고ㅜㅜ 나도 드디어 포카 만져 볼 수 있다!! 존버 성공
- 앨범 사러 가야징~
- 아 데이즈 드디어ㅠ 초동기간에 팬싸 공지 때리는 ID 최고
“팬 사인회를 한다고?!”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던 뱁쌔가 벌떡 일어났다.
“응모는 어떻게 하는 건데?!”
다들 팬싸를 기뻐하기만 할 뿐. 아무도 응모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타임라인을 마구 내려보기 시작한 뱁쌔.
얼마나 내렸을까. 그녀는 팬싸를 울부짖는 수많은 텍스트 사이로, 팬 사인회 공지를 긁어다 올린 유연 팬의 짹을 발견하게 된다.
- 드디어 떴다... 실물 유연 영접일 (데이즈 팬 사인회 안내.jpg)
친절하게 링크까지 달아놨다.
저 같은 덕질 초심자들을 위해 리짹을 누른 뱁쌔는 상세 페이지로 달려갔다.
일시는 다음 주 토요일 7시.
추첨 인원 100명.
응모 방법은 앨범 구매.
온라인 구매 60명과 오프라인 구매 40명으로 나눠진 걸 보아하니 고도의 심리전이 예상됐다.
“아니 근데. 나는 이미 앨범을 두 장이나 샀는데?”
젠장. 앨범을 또 사게 생겼다.
“아니야.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그래.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고민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책상 위에 고이 놓인 두 장의 포토 카드.
그를 가만히 보던 뱁쌔가 올려놨던 교환 글을 빠르게 내렸다. 사실 백야 포카가 없어서 그렇지 제가 뽑은 두 장의 카드도 심각하게 예뻤다.
“이번에야말로 백야를!”
게다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마구 샘솟고 있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고민하던 뱁쌔는 얼른 카드지갑을 챙겨 광화문으로 향했다. 판매처가 지정되어 있었던 탓이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늦은 걸까. 줄이 제법 길었다.
‘앨범이 없어서 못 사는 건 아니겠지…?’
데이즈의 화력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몰랐다.
덕질 데이터가 전혀 없는 뱁쌔는 객관적인 판단을 전혀 내리질 못하는 상태.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그녀는 어느새 앞에 한 명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원활한 앨범 구매를 위해 이어폰을 뺀 뱁쌔.
‘한 장만 사고 한 장은 교환으로 구할까? 아니야, 그냥 두 장?’
몇 장을 응모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이상한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여섯 개 주세요. 택배 되죠?”
‘아니, 여섯 장 사면서 무슨 택배씩이나?’
그럴 거면 그냥 온라인으로 구매하시지. 뱁쌔가 제 앞의 손님을 힐끔댔다.
심지어 그녀는 중간 사이즈의 캐리어와 대형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다.
저기에 넣어 가면 될 것 같은데.
그때였다.
“여섯 박스하면 총 120장이시고요. 다 택배로 보내 드려요?”
“한 박스는 가져갈게요.”
“주소 적어주세요.”
경고! 지진 발생!
뱁쌔의 눈에 강도 10의 지진이 일었다.
‘여, 여, 여섯 장이 아니라 여섯 상자요?!’
뱁쌔는 엄청난 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음 손님을 부르는 점원2의 말을 듣지 못하고 서 있자, 뒷사람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요.”
“즈, 저요?”
앳돼 보이는 얼굴의 소녀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비었어요.”
“앗.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인 뱁쌔가 후다닥 점원의 앞으로 달려갔다.
“몇 장 드릴까요?”
“저, 저는…!”
* * *
오랜만에 음악방송 대기실을 찾은 데이즈. 새벽이라 몇 팀 없었지만 파티션으로 구분해 놓은 간이 대기실은 여전했다.
“와~ 오랜만이다.”
율무가 파티션을 쓰다듬으며 이 감촉이 그리웠다 했다.
“회사에 건의해서 숙소에 하나 놔 드릴까요?”
“정말요?!”
눈을 빛내며 격한 반응을 보이는 율무. 그의 손에 어깨를 붙들린 남자는 데이즈의 새로운 로드 매니저 덕진이었다.
입사 한 달 차인 덕진은 앞으로 남경과 함께 데이즈를 전속으로 서포트하게 됐다.
“팀장님께서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라고 하셨거든요. 잠시만요, 제가 메모를….”
그가 수첩을 꺼내 파티션을 적으려던 참이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얘 말은 잊어주세요.”
다가온 백야가 율무의 옆구리를 약하게 꼬집었다.
“아야야.”
이어지는 조용한 경고.
“순진한 분 놀리지 말고 이리 와서 몸이나 풀어.”
율무가 저보다 한참 작은 백야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과연 숨은 실세…!”
실무에 투입되기 전, 남경에게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신입 매니저 덕진은 그때 필기해 둔 멤버들의 인적 사항을 다시 정독하기 위해 수첩의 제일 앞 장을 펼쳤다.
[민성 : 리더. 팀 내 연장자. 유하지만 강단 있는 성격.]
[지한 : 과묵한 편. 호불호가 정확함. ※견과류 알레르기 주의.]
[율무 : 팀 내 분위기 메이커. 예능 멤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 이력 있음. ※율무차 좋아함.]
[백야 : 팀에 제일 늦게 합류. 가끔 급발진. 체력 약한 편이니 컨디션 조절 필요. 숨은 실세. ID 대표 조카라는 소문이 있음.]
[유연 : 허리 안 좋음 (※활동기라도 주에 한 번은 꼭 병원 데려갈 것). 눈물 많은 편.]
[청 : 재미교포. 어디로 튈지 모르니 항시 주의 요망. 저세상 텐션. ※오이 못 먹음.]
‘음음. 그래도 당장 주의할 거는 지한 씨 견과류 알레르기랑 청 씨 오이 정도인가.’
업무 전 숙지 사항을 다시금 되새기던 신입 매니저. 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남경.
“네, 형!”
[어, 덕진아. 나 이제 넘어갈 건데 나온 김에 애들 아침이나 사 갈까 하고. 뭐 먹을지 물어보고 알려 줄래? 네 거랑 스텝들 거도.]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매니저 임무였다. 금방 회신 드리겠다며 전화를 끊은 덕진이 멤버들에게로 달려갔다.
데이즈는 새벽 사전 녹화를 앞두고 의상을 갈아입는 중이었는데. 비슷해 보이지만 멤버들마다 의상 포인트가 조금씩 달랐다.
개중 제일 먼저 갈아입은 백야가 덕진에게 다가왔다.
“저희 이제 내려가요?”
“네? 아니요!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남경 선배님께서 아침 식사를 사 오신다고 하셔서요.”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느냐 공손히 물어보는 덕진.
“형은 뭐 드시고 싶은데요? 저희는 아무거나 다 잘 먹어요.”
“그래도 드시고 싶으신 게….”
“에이, 형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우리.”
오늘은 덕진의 첫 출근이나 다름없는 날. 스케줄 때문에 파티는 못 해 드려도 분위기 정도는 비슷하게 내 볼 수 있지 않겠냐며 백야가 웃었다.
순간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하얀 빛.
“아앗! 후광이…!”
눈을 감은 덕진이 손을 들어 시야를 가렸다. 순간 바닥으로 떨어진 그의 수첩.
두 번째 장이 펼쳐지며 가까운 관계자에게 들은 백야의 또 다른 인적 사항이 드러났다.
[백야 : ※천사일지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