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영상이나 사진으로 접하던 차가운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 팬들이 그를 병아리라 부르는 게 완벽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근데 성이 뱁이에요? 나 처음 봤어요!”
청이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이 사람… 혹시 내 이름이 진짜 뱁쌔인 줄 아는 건가.’
팬 사인회 시작 전. 진행 요원은 포스트잇을 나눠 주며 사인받을 이름을 적어 앨범의 앞면에 붙여 달라 요청했다.
본명을 적을까 SNS 닉네임을 적을까 고민하던 뱁쌔는 고민 끝에 닉네임을 적기로 했다.
그런데 악필이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눈앞의 멤버가 외국인이라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것뿐인가.
“뱁MH 님!”
엥?
뱁쌔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저… MH가 아니고 쌔인데요. 뱁쌔.”
뱁쌔가 조심스레 정정을 시도하지만, 청은 귀가 다소 어두운 편이었다.
“뱁씨? 뱁 맞아요?”
포스트잇과 그녀를 신기한 얼굴로 번갈아 보는 청. 그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띠에 달린 노란 병아리 머리와 늑대 귀가 팔랑거렸다.
‘어쩐지 포스트잇을 한참 쳐다보더라니.’
그냥 문자로 봐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건가, 이거.
착잡한 마음에 입술을 말아 문 뱁쌔. 빠르게 포기한 그녀가 약간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냥 잠깐만 뱁씨가 되기로 했다.
‘아빠 미안.’
그 뒤로 이어진 가벼운 근황 토크. 그녀는 청이 어제저녁으로 소시지 야채 볶음을 먹었다는 TMI까지 듣고 나서야 다음 순서로 넘어갈 수 있었다.
다음은 바로 백야. 대망의 첫 최애 영접이었다.
“안녕하세요~”
“백야다! 움직이는 백야!”
‘아, 안녕하세요.’
따옴표가 바뀌었다.
그러나 이성이 마비된 뱁쌔는 이를 알아차릴 경황이 없었다.
“아… 네! 저 움직여요!”
백야가 양팔을 접었다 펼치길 반복하며 제자리에서 파닥거렸다.
“꺄아아악!”
대기석에서 비명과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몸을 움직이자 그 반동으로 머리에 꽂아둔 새싹 핀이 앙증맞게 흔들린다.
“머, 머리에 그 엄청난 거는…!”
“아, 이거요?”
앞의 팬이 주고 간 일명 복숭아 이파리. 분홍색 머리 위에 안착한 아동용 핀이 한 몸처럼 잘 어울렸다.
“선물 받았어요.”
백야가 수줍게 웃었다.
그에 원래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뱁쌔가 크게 휘청였다.
“어어…! 괜찮으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주려 했으나 가까이 있던 경호원의 조치가 더 빨랐다.
“말로만 듣던 살인 미소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까부터 자꾸 뱉어지는 말과 속마음이 바뀌고 있었지만 뱁쌔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부끄러운 백야가 빨개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앨범을 뒤적였다.
“사인 어디다 해 드릴까요?”
“노란색 포스트잇 붙여놨어요.”
민성과 지한을 지나 드디어 자신의 사진을 찾은 백야. 양말을 한쪽만 신은 채 계단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는 사진이었다.
“어? 이 사진 고르셨구나. 저도 이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얼굴을 피해 목 아래쪽에 사인을 시작하는 백야. 매직을 쥔 손이 섬섬옥수가 따로 없었다.
‘어쩜 손까지…!’
뱁쌔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1분 1초가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혹시 더 해 드릴 거 있을까요?”
원래도 백야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였지만, 습관인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인 그는 고개를 조금 더 위로 치켜들며 뱁쌔와 눈을 마주쳤다.
“허억!”
어레스트! 어레스트!
뱁쌔의 심장박동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하트? 복숭아?”
앞의 팬들에게서 하트나 복숭아를 그려 달라는 요청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상대는 좀 전의 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새 한 마리.
뱁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며 서 있자, 그녀의 눈치를 보던 백야가 앨범 위로 무언가를 몰래 끄적였다.
“지금 말고 있다가 내려가서 봐 주세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백야가 앨범을 건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 뱁쌔가 청심환의 힘을 빌려 겨우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려던 순간.
“이동하실게요.”
경호원에 의해 차단당했다.
‘안돼! 백야한테 아직 한마디도 못 했는데에…!’
뱁쌔는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주접을 떨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원망 어린 눈으로 경호원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힝입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뱁쌔가 떠밀리듯 자리를 이동했다. 미련 가득한 얼굴로 최애의 옆태를 힐끔거리던 그녀.
“백야 팬이신가 봐요~”
그러나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백도 귀엽죠.”
보조개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유연이었다.
“네! 너무 귀엽! 아니, 이게 아니라… 유연 님도 정말 귀여우신,”
“괜찮아요. 저는 귀여운 거보단 섹시한 쪽이라. 근데 마음만 먹으면 큐티도 가능은 해요.”
민망할 수도 있는 대사를 능글맞게 잘도 해 대는 그에 뱁쌔가 감탄했다.
‘뭐지. 이 플러팅하는 남자주인공 같은 대사는.’
상상했던 이미지와 완벽히 일치하는 눈앞의 이 남자. 그가 앙증맞은 자세로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주세요~”
그래도 민망은 한지 왼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 보조개가 한쪽만 패였다.
“무, 뭐를 드리면 되나요…?”
눈부신 용안에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 그녀.
‘아직 월급일 전이라 돈이 얼마 없긴 한데 이거라도 줘야 하나.’
홀린 듯 지갑을 꺼낸 그녀가 유연의 손바닥 위로 물건을 올리자 그가 갸우뚱거렸다.
“음… 이건 선물인가요? 용돈?”
유연의 말에 그제야 제가 뭘 건넸는지 깨달은 뱁쌔.
“아악! 내 지갑!”
마성의 매력에 당한 그녀가 다시금 회수하려 들자, 자칭 섹시남이 냉큼 손을 뒤로 뺐다.
흔들리는 뱁쌔의 눈빛.
웃음을 참은 유연이 개구지게 웃으며 딜을 걸어왔다.
“우리 이렇게 해요. 이 카드 지갑이랑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거랑 바꿔요.”
품에 소중히 안고 있는 백야의 사인이 그려진 앨범.
“안 그러면 이걸로 백야랑 과자 사 먹어야지~”
앨범을 내밀려던 뱁쌔의 손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지갑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지실래요?”
“……죄송해요. 사인만 하고 두 개 다 돌려드릴게요.”
말로 유연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었는데 그 어려운 걸 그녀가 해냈다.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백도 과자 사 먹일 테니까 제발 가져가 주세요…….”
“진짜 가지셔도 되는데.”
인제야 긴장이 풀린 뱁쌔가 애원하는 유연을 놀리며 앨범과 지갑을 받아 들었다.
이동하라는 경호원의 목소리와 함께 어느새 마지막 멤버와 조우한 그녀.
“안녕하세요.”
팬들만큼이나 긴장한 지한이 눈웃음을 지으며 앨범을 받아 들었다.
“새 좋아하시나 봐요.”
정말 일차원적인 질문이었다.
이걸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망설이던 뱁쌔가 무심코 고개를 드는데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뿌듯해하며 답을 기대하는 얼굴이 저를 보고 있었다.
청 다음으로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인 그는, 팬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인 만큼 말도 먼저 걸고 최대한 웃었으면 좋겠다는 회사의 조언을 적극 수용 중인 참이었다.
“어… 예. 좋아합니다.”
“너무 귀엽네요. 뱁새가 걔 맞죠? 하얗고 동그란 애.”
“맞아요!”
TV에서 본 적 있다며 지한이 손 모양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이후로도 쭉 이어진 애니멀 토크.
몰랐는데, 알고 보니 지한의 애청 프로그램이 동물 다큐멘터리라고 하더라.
“자기 전에 거의 매일 봐요.”
그야 스케줄 끝나고 숙소 돌아가면 나오는 게 애국가랑 동물 다큐가 전부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뱁쌔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였다면 닥치라고 입술을 문대 버렸을 텐데, 얼굴의 힘인가.
아니면 보이스 매직?
데이즈의 유일한 래퍼인 지한.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정확한 딕션과 감미로움으로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럼 저희 다음에 또 봐요.”
지한의 손 인사를 마지막으로 단상에서 완전히 내려온 그녀.
맙소사.
뱁쌔는 ID의 엄청난 기획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알찬 15분이었다.’
소중한 앨범과 백야에게 줄 선물을 끌어안은 뱁쌔가 행복을 만끽했다. 아드레날린 과다를 느끼며 돌아가던 그녀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응? 선물?
최애의 실물 영접과 동시에 얼어버려 가장 중요한 걸 잊고 말았다.
“아악! 선물!”
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내려와 버린 노란 종이 가방이 아직 그녀에게 있었다.
털썩.
바닥에 무너지듯 앉은 그녀가 울상을 지었다. 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거 꼭 주고 싶었는데…….’
마침 시간이 떠 앞이 비어있던 백야가 그녀를 제일 먼저 발견했다.
“어?!”
복숭아가 놀란 눈을 뜨며 경호원의 팔을 잡았다.
“저기, 저분 쓰러지셨어요!”
백야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사인을 받다 휘청이던 팬분.
그 말에 멤버들의 시선도 단상 아래를 향하고, 대기 중이던 팬들도 뱁쌔를 주목했다.
“괜찮으세요?”
다가간 경호원과 관계자가 그녀를 부축하려 들자 뱁쌔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꽤 길게 주고받던 세 사람.
떨떠름한 표정의 경호원이 도움 대신 캐릭터가 그려진 종이 가방을 받아 들고 복귀했다.
“저분은 괜찮으신 거예요?”
백야와 멤버들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이것 때문에 그랬답니다.”
백야에게 건네지는 노란 물체.
“…인형?”
피X츄였다.
얘한테 백만 볼트라도 쏘인 걸까. 왜 이것 때문에 쓰러졌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개복치가 잠깐 팬 석과 인형을 번갈아 봤다.
그사이 자리로 돌아온 뱁쌔.
감격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한 번 더 입을 틀어막았다.
학교 앞 분식집에서 피X츄를 잡아먹다 캐스팅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귀여워서 한동안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는데….
‘저 투 샷을 생눈으로 볼 줄이야.’
뱁쌔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시각 단상 위. 인형을 꺼낸 백야가 노란 친구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쥐과 계열. 동족의 목에 매인 빨간색 리본 위로 알파벳이 적혀있었다.
[PIKA]
“…피카?”
인형, 고개 각도, 그리고 백야. 완벽한 삼위일체에 또 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침 청과의 대화를 마치고 넘어온 타노쓰가 돌연 심장 통증을 호소했다.
“여기 나인 원 원…!”
119를 부르짖는 악당.
라이브 방송에서 유연의 옷을 절반이나 날려 버린 최고 빌런을 햄스터가 단 두 음절로 함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