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55화 (55/340)

제55화

* * *

“백야 똑바로 안 할래?!”

벌써 같은 구간에서 실수만 다섯 번째였다. 오랜만에 ‘놀이(No Games)’를 추려니 새삼 데뷔곡 안무가 얼마나 난이도 높았는지 실감이 났다.

인천시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하는 ‘K-Concert’. 일명 케이콘에 출연하게 된 데이즈. WANT ME 활동 중에 백야가 놀이 안무로 왕창 깨지고 있는 이유였다.

처음에는 웃어넘기던 안무가도 슬슬 화가 나는지 언성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여기엔 백야의 새로운 스킬인 <혼수상태(D)>의 공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답도 없는 스킬이 안무가를 기절 직전까지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이놈의 스킬은 쿨타임도 없이 24시간 발동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백야가 더운 숨을 뱉으며 허리 숙였다.

‘힘들어서 토 나올 것 같다.’

제가 스킬 C랑 D등급이 별 차이 없다 그랬던가. 정정하겠다. 두 등급 사이에는 천지가 개벽할 만큼의 차이가 존재했다.

본인은 속으로 이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는 사이, 지켜보던 이들의 감상은 조금 달랐다.

누가 봐도 창백한 얼굴. 저러다 애 하나 잡겠다 싶어 보다 못한 남경이 나섰다.

“저, 안무가님. 백야가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나 남자는 단호했다. 평소의 그는 데이즈와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내다가도 일만 시작하면 호랑이 선생님으로 돌변하곤 했는데.

“형, 저 괜찮아요. 애들아 미안.”

백야가 거듭 사과하며 이번에는 꼭 해내겠다 약속했다. 창백하게 질린 개복치를 빤히 쳐다보던 안무가가 짧게 한숨 쉬었다.

“됐다, 10분만 쉬자.”

그 나름의 배려였다.

어느덧 10월. 데이즈의 WANT ME 활동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백야야 조금만 더 힘내자.”

음악 방송도 이번 주가 마지막이니 이것만 끝내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여유 있어질 거라는 남경의 말에 백야가 힘없이 미소 지었다.

“네. 그런데 저 진짜 괜찮아요.”

그러나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뽑기 망한 날부터였던가. 멤버들과 남경, 덕진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백야는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겠지, 라며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연습 안 끝나서 어떡해, 미안.”

개복치가 미안해하자 민성이 괜찮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는 훌륭한 리더였다.

“됐어, 연습 많이 하면 좋지. 그리고 컨디션 별로인 건 사실이잖아.”

‘컨디션이라….’

차라리 몸이 좀 피곤한 거면 다행이지. 백야는 제 댄스 스킬을 언제 되찾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으, 응. 그렇지….”

“너 이렇게 실수 많이 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니까 옛날 생각나고 좋은데, 왜.”

옛날이라 해 봤자 데뷔한 지 1년도 안 됐지 않나 우리…?

유연이 백야의 머리를 헝클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아, 하지 마.”

백야가 찡그리며 팔을 떼어내자 지켜보던 율무가 한마디 거들었다.

“오~ 햄스터 성질 나오는 거 보니까 슬슬 기운 돌아오나 본데?”

“내가 언제 성질을 부렸다고!”

“봐봐, 지금도, 으악!”

백야가 율무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웃고 떠드는 사이 금방 지나가 버린 10분.

‘이게 뭐야.’

한순간도 백야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멤버들에 그는 단 1분도 쉬지 못한 채 다시 안무 연습을 시작해야만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돌아온 압구정 호랭이. 데이즈를 보는 그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너희 뜨고 싶다며. 그럼 반응 올 때 더 열심히 해야지!”

10분 전보다 더 화가 나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백야는 이번에도 실수하면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겠구나 직감했다.

‘내 <춤신춤왕(C)> 돌려줘요….’

* * *

“수고했다. 오늘은 푹 쉬고.”

모처럼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지만, 데이즈는 평소와 비슷하게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이 영광은 백야에게.

“으어어.”

웬 좀비 하나가 차에서 비틀거리며 내렸다.

“백야 똑바로 걷고.”

“느에에….”

내리자마자 차에 몸을 기대고 선 백야에 먼저 내렸던 청이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으옼!”

“Hey! 차 더러워.”

얼마나 힘껏 잡았는지 잠깐 사이 쭈글쭈글해진 앞섶.

이젠 하다 하다 동생한테 멱살까지 잡히고…. 백야가 침울한 표정으로 청을 바라봤다.

“뭘 봐?”

“아니, 그냥…….”

본전도 못 건진 개복치는 빠르게 쭈그러들었다.

왜 보냐는 뜻이었겠지만 청도 피곤한지 표정이 굳어있었다. 막내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건 저 때문이기도 했으니 양심에 찔려서 그만….

절대 겁먹은 거 아니다.

“올라가자.”

남경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 내린 민성이 동생들을 챙겼다.

숙소로 올라간 데이즈는 가위바위보로 씻는 순서를 정했는데, 과연 망겜의 플레이어답게 백야는 이런 것까지 망하고 난리였다.

‘뽑기도 모자라 가위바위보도 꼴찌라니.’

소파에 찌그러진 개복치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다가온 기척 하나가 옆자리에 앉는 게 느껴졌다.

“백야야.”

“아, 형.”

“잠깐 바람 좀 쐴까?”

눈짓으로 발코니를 가리키는 민성. 그에 백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지?”

“나만 피곤한가 뭐…. 나 때문에 멤버들만 고생했지.”

백야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마. 애들도 다 이해할 테니까.”

자신은 같은 안무를 1년 동안 연습했지만 너는 그 절반도 못 채우지 않았냐며, 오히려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에인젤…?’

천사야 뭐야. 백야가 그를 힐끔댔다.

“놀이 안무가 많이 힘들긴 해.”

민성은 처음엔 자기도 못 따라가서 엄청나게 혼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 자책할 필요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전혀 없어. 알지?”

백야가 민성을 빤히 바라봤다. 머리 위로 물음표 하나가 떠 있는 것 같은 망충한 표정.

“내가 그래 보여?”

역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던지 민성이 살짝 당황하는 게 보였다.

“네가 요즘 기운이 좀 없긴 했잖아. 그날 일도 있고….”

민성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날?”

백야가 갸우뚱거렸다.

“너 혼자 보컬 트레이닝 받고 온 날. 율무한테 안겨서 울었,”

“내가 언제!”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친 백야가 펄쩍 뛰었다. 갓 건져 올린 생선 같았다 방금.

“안 안겼어!”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성난 말티즈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래, 취소! 취소. 됐지?”

“…응.”

아무튼 그날 너 좀 이상했다며 민성은 혹시 힘든 일이 있느냐 물었다.

‘힘든 일? 많지.’

제가 개복치인 거도 힘들고, 춤 연습도 힘들고, 퀘스트도 힘들고, 뽑기도 힘들고 다 힘들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춤 연습이 고작이었다.

“그냥… 내가 쓰레기 같아서….”

정확히는 내 몸이. 주어가 축약됐다.

세상 다 산 영감님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 백야.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이 아련했다.

참고로 데이즈의 숙소는 15층. 놀란 민성이 눈을 크게 뜨며 백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니야, 백야야!”

네가 왜 쓰레기냐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는 민성. 리더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쓰레기가 아니라 내 몸이 쓰레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몸이 개복치고 개복치는 곧 저였으니 제가 쓰레기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거다.

“그러네…? 나 쓰레기였네.”

마침 발코니의 구석. 난간대 봉이 두 개 정도 빠져 임시방편으로 가려놓은 빈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안 되겠다. 휴지통에 들어가자.’

지친 심신과 수면 부족, 스트레스의 콜라보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하고 만 백야가 민성의 팔을 떨쳐 내고 난간대 앞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을 잡아당기자 저 하나쯤은 통과할 수 있을 만한 구멍이 드러났다.

물론 백야는 지금 처음 봤다.

“엥? 여기 사람 하나는 그냥 뛰어내릴 수 있겠는데?”

그때였다.

발코니 문이 거칠게 열리며 청이 백야를 잡아당겼다. 아까 주차장에 이은 두 번째 뒷덜미였다.

“흐엌!”

“You Crazy?!”

이번엔 욕까지.

‘크레이지라니.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백야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유리창 앞으로 주르륵 서 있는 멤버들이 보였는데, 얼굴들이 하나같이 심각해 보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혹시 다 씻었니…?”

잘못한 건 없지만, 본능적으로 몸을 사려야 한다는 생각에 개복치가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굳어있던 율무가 창백한 얼굴로 백야의 손목을 낚아챘다.

“너 나와.”

개복치는 그가 당기는 대로 힘없이 딸려 갔다.

한편 율무가 이렇게 표정을 굳힌 건 처음 보는 백야. 화 안 내던 사람이 한 번 화내면 엄청 무섭다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야아… 나율무 너 왜 그래?”

그를 따라 옆방에 들어오게 된 백야. 방 구조는 같았지만,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너 방금 뭐 하려고 했냐.”

“……나?”

율무의 침대에 던져지듯 앉은 백야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나 그냥 형이랑 얘기….”

“무슨 얘기.”

“힘든 거 없냐 그래서 없다고….”

그런데 말하다 보니 열 받는 거다. 얘는 뭔데 아까부터 나를 혼내듯 추궁하는 거지?

“근데 내가 뭐 잘못했어?”

백야가 물었다.

“확실해? 아무 짓도 안 하려던 거 확실하냐고.”

율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고, 방 밖에 모인 멤버들은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이마를 짚은 민성이 둘을 말리기 위해 끼어들려던 참이었다.

“혹시 너 내가 오늘 안무 계속 틀린 거 때문에 화나서 그래? 그거 때문이라면 내가 미안해.”

춤이라고는 태어나서 지금 춰 본 게 전부라는 백야. 그런데 말하다 보니 서러워서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그래도 너희한테 최대한 피해 안 가게 하려고 나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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