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인천 시민인 나라와 달리 뱁쌔의 거주지는 서울. 주말임에도 지옥철을 경험한 그녀는 아직 콘서트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개찰구를 계단에서부터 줄 서서 찍어 보기는 또 처음이네.’
출근길도 이렇게 빡세진 않은데….
뱁쌔는 데이즈를 좋아하게 된 뒤로 연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맞춰 선 모습이라니.
‘이게 바로 어메이징 케이팝 팬 문화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애티튜드!’
몰래 감탄하던 뱁쌔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출구를 나오자마자 곧장 3번 게이트를 향해 달리는 그녀.
“헉. 허억.”
아슬아슬하게 약속 시간에 맞춘 뱁쌔는 나라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야흐로 트렌치의 계절 가을. 나만 없는 게 분명한 긴 수건. 문학경기장에 모인 모두가 트렌치코트에 스포츠 타월을 들고 있었다.
‘혹시 드레스 코드라도 있는 건가…?’
뱁쌔가 당황해하고 있는데 나라가 그녀를 먼저 발견했다.
“뱁쌔 님!”
데이즈가 두 번째 덕질이라던 그녀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뱁쌔를 금방 찾아냈다.
사실 뱁쌔는 나라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변명 같겠지만 팬 사인회 이후로 만난 적 없었으니까…. 거기다 저와는 다르게 나라는 메신저 프로필까지 지한의 사진이었다.
“뛰어오셨어요? 천천히 오셔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기다리시게 할 순 없죠. 그런데 그 수건은 뭐예요?”
뱁쌔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수건? 아~ 이거요?”
나라는 제 손에 들린 좁고 기다란 물건을 자랑스레 펼쳐 보였다.
“짠! 예쁘죠!”
[지한아 사랑해]
일명 사랑해건.
당연히 수건은 아니었고 팬들 사이에서 슬로건이라 불리는 물건으로, 한 면 가득 지한을 향한 고백이 적혀있었다.
“뱁쌔 님은 뭐 들고 오신 거 없어요?”
“네? 아, 저는….”
뱁쌔가 빈손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하나 들어야 하나…?’
잠깐 고민하는 사이 바로 옆에서 설렘 가득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악! 너무 예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옆으로 향한 두 사람. 마침 옆에 있던 분들도 데이즈의 팬인 모양인지 낯익은 이름의 슬로건을 들고 있었는데. 분홍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폰트가 눈에 띄었다.
[피치 백야]
순간 동공이 확장되는 뱁쌔. 피치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뒷면으로 뒤집자 등장하는 백야의 얼굴. 머리에 나뭇잎 핀을 꽂은 복숭아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수줍음 가득한 모습으로 볼 콕을 하고 있는 사진은 그 어떤 홈에서도 본 적 없던 것이었다.
거기다 주위로 둥둥 떠 있는 작은 복숭아들이라니. 실로 엄청난 물건이 아닌가!
“저, 저기요.”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 버린 본체가 그들을 붙잡았다.
“그거 어디서 살 수 있어요?”
살짝 맛이 가 보이는 눈에 경계하던 팬1과 2. 그러나 나라의 손에 들린 사랑해건을 발견하곤 경계를 조금 낮추었다.
“혹시 데이즈 팬이세요?”
“네! 저 백야 좋아해요!”
그러니 부디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 출처를 알려 달라며 뱁쌔가 감정에 호소했다.
너무나도 간절해 보이는 그녀에 팬1은 흔쾌히 구매처를 공유해 주었다.
“이거 백상 님 피치 슬로건이에요. 그런데….”
“…그런데?”
꼭 저런 게 붙으면 뒤에는 불길한 말도 함께 나오곤 했다.
“예약 끝나서 지금은 구하시기 힘들 거예요.”
털썩. 뱁쌔는 또 한 번 무릎을 꿇었다.
하루도 남아날 일 없는 그녀의 연골. 깜짝 놀란 나라가 뱁쌔를 부축했다.
“배, 뱁쌔 님 괜찮으세요?”
“피치거헌…….”
저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나름 프로 덕질러로 거듭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잠시 후 안정을 취하고 경기장 안으로 입장한 뱁쌔와 나라.
“저도 피치건 양도 같이 찾아봐 드릴게요.”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라가 뱁쌔의 등을 토닥이며 초콜릿을 건넸다.
“감사해요, 나라 님….”
그래도 전보다는 기운을 되찾은 것 같은 뱁쌔에 나라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짐이 왜 그렇게 많아요?”
콘서트 끝나고 어디 여행이라도 가시는 거냐며 뱁쌔가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젓는 나라 님.
“제가 원래 보부상 스타일이라.”
보부상도 저것보단 덜 가지고 다닐 것 같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도라X몽도 아니고 그녀의 에코백 안에는 없는 게 없었는데. 물, 초콜릿, 보조배터리는 기본이었고 특히 지금 꺼내든 저 커다란 검정색 파우치의 정체가 압권이었다.
“그건 또 뭐예요?”
“아, 이거요? 망원경이요.”
“…망원경이 왜 거기서 나와요?”
벙찐 뱁쌔가 나라와 망원경을 번갈아 봤다.
“사실 이런 콘서트는 얼굴 보러 오는 거 아니고 응원할 생각으로 와야 하는데 그래도 욕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 역시 금시초문이었다.
열심히 응원해서 애들 기 살려 주자는 글을 보기는 했지만….
‘저는 얼굴 보러 왔는데요.’
비록 3층이었으나 전광판이 꽤 커서 만족스러워하던 참이었다.
“…혹시 전문가용?”
“네. 전문가용.”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본격적으로 생긴 물건에 뱁쌔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전광판도 큰데 그거로 보면 어지럽지 않을까요?”
그에 망원경에 셀카봉을 연결하던 나라가 동작을 멈추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이거로 전광판 볼 건 아니라서. 그리고 뱁쌔 님, 저는 카메라를 믿지 않아요.”
음악방송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발 카메라가 어디 한두 번이냐며 질색하는 나라 님. 물론 뱁쌔도 공감하는 바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엔딩 무대 끝나면 전 출연진이 나와서 한 바퀴 돌거든요? 그때 아주 요긴해요.”
“와 그렇구나……. 그런데 셀카봉은 왜 끼우시는 거예요?”
“아, 이게 다 좋은데 좀 무거워요.”
그런데 이렇게 연결해 두면 셀카봉이 지지대 역할을 해 줘서 팔이 아프지 않다는 나라.
‘지한이 나라다 도대체 당신은….’
뱁쌔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웠다.
나라는 그녀에게 웬만하면 하나 장만해 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조언했다.
‘해외 직구로 사면 조금 싸다나.’
그렇게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콘서트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때. 관중석을 밝히던 불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무대 위로 오늘의 진행을 맡은 MC가 올라오고 있는 게 전광판으로 보였다. 예능돌로 한참 이름을 날리던 2세대 아이돌. 제대 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영삼이 오늘의 진행을 맡았다.
“케이팝 아이돌 총출동! 한국 관광 공사와 인천시가 함께하는 케이 콘서트,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4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함성과 함께 경기장이 암전됐다.
* * *
- 에임 케이콘 큐시트! 플루톤이랑 블랙 사인, 작은 우주 (큐시트 사진.jpg)
└ 데이즈는 없나요?
└ 저도 주운 거라ㅎ 후배분들은 놀이랑 WANT ME 한다고 본 것 같아요~
데이즈의 순서는 아홉 번째. 신인치고 꽤 뒷 순서였다. 데이즈와 함께 데뷔한 BB9나 블라썸만 해도 네다섯 번째 순서였기 때문에.
“얘들아, 올라가기 전에 동선 한 번만 더 확인하자.”
리더가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데이즈의 무대까지 남은 팀은 두 팀. 지금 올라간 팀이 마지막 곡을 하고 있었으니, 한 팀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본 무대에서 ‘놀이’하고 멘트 하면서 돌출 무대로 이동. 돌출 무대에서 ‘WANT ME’야.”
그리 어려운 동선은 아니었다. 돌출 무대로 이어지는 길이 좌우로 하나씩 있으니 멤버끼리 상의해서 세 명씩 나눠 달라는 요청이 전부였다.
“막내들이 오른쪽 우리가 왼쪽.”
“Got it~”
청이 백야의 세일러 카라를 펄럭이며 대답했다.
“매찌리 이제 괜찮아?”
“…….”
그건 또 뭐냐.
백야가 뚱한 표정으로 청을 올려다봤다.
“매찌리 아니고 맵찔이. 근데 나 맵찔이 아니라고.”
“Really? 근데 그거 백야 빼고 다 잘 먹었어. 그러니까 매찌리야.”
청이 얄밉게 웃으며 백야를 약 올렸다. 둘의 대화가 재밌는지 유연은 배를 잡고 우는 중.
“애 그만 놀려. 무대 올라가야지.”
몰래 웃던 지한이 본인은 안 그런 척 청을 말렸다.
“넌 내려오면 두고 보자.”
이를 악문 햄스터가 늑대에게 복수를 예고했다. 그러는 사이 데이즈의 차례가 임박해졌음을 알리는 공연 관계자.
“데이즈 준비할게요.”
멤버들이 남경과 스텝을 따라 무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앞 팀의 무대가 끝나면 MC의 짧은 소개 멘트와 함께 곧바로 ‘놀이’ 무대가 시작된다.
“자! 이번 순서는요, 아~ 이분이 계시네요. 데뷔와 동시에 연예계에 각종 이슈로 화제가 되고 있는 그룹입니다.”
얼마 전 인형으로 돌아와 팬들의 마음은 물론 제 마음까지 훔쳐 달아난 그룹이라는 영삼.
“데이즈! 지금 바로 만나 볼게요.”
소개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무대 중앙으로 달려 나가는 멤버들. 불이 꺼진 무대 위에서 관중석에 모인 각종 팬 라이트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와, 예쁘다….’
대형을 갖춘 백야가 반짝이는 응원봉을 홀린 듯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봤던 한 아이돌 멤버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콘서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느껴지는 공허함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무대에 서는 게 너무 무서웠다.]
[저 불빛이 언젠가는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무대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무대 공포증을 꽤 오랫동안 앓았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인기 많은 성공한 아이돌의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막상 한데 모여 있는 응원봉을 보니, 그 사람이 말했던 공허함이라는 게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빨간색은 에임, 파란색은 소년천하인가.’
태극기처럼 3층을 반씩 나누어 차지한 붉은 물결과 파란 물결이 압도적이었다.
‘우리 팬분들도 저 어딘가에 계시려나.’
데이즈는 아직 정식 팬클럽도 응원봉도 없어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지금 들리는 함성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주먹을 움켜쥔 백야가 굳게 다짐했다.
‘오늘은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지.’
[엄청난 의지!]
[새로운 퀘스트(이벤트)가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