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파트를 소화할 때까지만 해도 단체 샷만 비추는 전광판 때문에 율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파트를 끝내고 옆으로 빠지는 순간 단독으로 들어오는 카메라.
그에 허탈한 미소를 지은 율무는 감히 명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 하루 종일 딱 붙을래
너는 날 가지고 놀아
Want me
You want me too
민성의 미색으로 이어지는 후렴. 대형의 끝에서 안무를 추던 민성이 앞줄로 이동하며 동선이 크게 변화했다.
앞뒤로 세 명씩 어긋나게 선 데이즈는 곡의 메인 안무인 ‘딱붙 춤’을 상큼하게 추고 있었는데. 민성이 움직일 때마다 옷에 달린 보석 견장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투명한 오색 빛은 민성의 얼굴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백야와 청의 주변까지 번졌다.
- 네가 없는 하루는 지루해
날 데려가 줘
Want me
You want me too
관객이 많아서 그런가, 백야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귀신처럼 카메라를 잘 찾아내는 걸 보면 백야는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틀림없었다.
마침 카메라의 원샷을 받으며 방긋 미소 짓는 아기 복숭아. 그러나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팬석을 비추는 카메라에 사방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아악! 미쳤나!”
뱁쌔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맹세컨대 작정하고 뱉은 건 아니었고 그냥 본능이었다.
다행히 카메라는 금방 정신을 차려 다시 무대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야는 이미 뒷줄로 빠져 버린 뒤. 뱁쌔는 나라 잃은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반면 제 옆의 나라는 축제 분위기. 화면 가득 지한의 원샷이 잡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한아악!”
측면으로 몸을 돌린 멤버들과 달리 홀로 정면을 보고 선 지한.
상체를 크게 사용하는 구성의 안무였지만, 랩 파트를 소화해야 하는 그는 비교적 간단한 동작으로 멤버들이 추고 있는 안무를 느낌만 내고 있었다.
- 내 귓가에 속삭여줘 그렇다면
Shine a light 내 세상은 빛이나
Like a star 내 우주는 물들어
너 하나만 바라보잖아
Just take my hand
내 손을 잡으라며 고개를 까딱이는 지한은 정말 대단했다.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했으니 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뱁쌔의 바로 옆에도 부상자가 하나 있었다.
“흐억!”
나라가 심장을 짚으며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여전히 전광판에 고정이었다. 미리 숙지해 온 응원법을 단 1초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뱁쌔 님 저 심장이 너무… 원미!”
목이 터지라 외치는 WANT ME. 마지막 곡은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뒤집어진 삼각형 대형으로 중심에 선 보컬 버뮤다 삼각지대.
- 나는 너를 지키는 기사
두려워 마 내 품에서 잠이 들어
단단하면서도 깨끗한 율무의 목소리 위로 더블링을 얹는 여린 음색의 민성.
마주 보며 화음을 쌓는 모습이 전광판 가득 잡히고, 곡의 흐름은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느린 템포의 빌드업이 끝나자 율무와 민성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트라이앵글의 꼭짓점. 두 사람에게 가려져 있던 백야가 나타나며 화제의 파트를 내질렀다.
거침없이 올라가는 고음.
방송으로 볼 때도 소름이 끼친다 생각했지만 현장에서 듣는 라이브는 차원이 달랐다.
- I wa-a-a-ant
성량이 마이크의 성능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거기다 분홍빛이 도는 손가락은 고음이 한 단씩 올라갈 때마다 함께 올라가는 중이었다.
“아악! XX 귀여워!”
가운데 선 백야를 둥글게 감싼 대형. 파트가 끝나자,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하는 멤버들 사이로 백야가 빠르게 섞여들었다.
그 뒤로도 유연과 청의 파트가 좀 더 이어졌고 대형은 조금씩 모양을 바꿔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무대. 양 끝에 서 있던 멤버들이 중앙으로 들어오며 완전히 섞이는 동선이었다.
이 부분은 백야가 실수를 자주 하는 구간이기도 했는데. 웬일로 박자를 놓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복숭아는 무사히 율무의 옆에 서 있었다.
- 눈을 감고 널 기다려
나의 하루는 널 그리며 끝이나
백야의 목소리를 끝으로 마지막 동작을 한 데이즈가 눈을 감으며 엔딩 포즈를 취했다.
* * *
[<한계와 도전(1)> 완료!]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4 스타 포인트]
▷ 현재 보유 스타 포인트 : 8
“뜹!”
눈을 뜨자 보이는 상태창에 백야가 입을 막으며 좋아했다. 마이크가 꺼져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좀 전의 이상한 감탄사가 그대로 나갈 뻔했다.
“뭐야. 왜 이래?”
백야의 어깨를 짚은 유연이 그를 이상하게 봤다. 다른 멤버들은 이미 무대를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도 얼른 가자.”
다음 팀을 위해 얼른 무대를 비켜 줘야 했다.
“응 가야지. 야, 그런데 나 오늘 실수 하나도 안 했어.”
“지금 그래서 신난 거야?”
“응! 너무 좋아.”
그게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백야는 최근 들어 실수가 잦은 거지 꾸준히 잘해 오고 있었다. 조금 뚝딱거리긴 하지만, 데뷔 초 멤버들이 돌아가며 실수를 할 때도 유일하게 지적당하지 않은 사람은 백야뿐이었으니까.
“그래. 도와준 보람이 있네.”
유연이 피식거리며 손바닥을 들었다. 그의 의도를 읽은 백야가 하이파이브를 하며 활짝 웃었다.
“응!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이번에는 꼭 성공할 테니까.”
“뭘?”
“그런 게 있어.”
무대를 내려온 두 사람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는 멤버들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율무가 백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아, 무겁다고.”
“그치만 편한걸~”
백야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비틀었으나 율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백야가 뚱한 표정으로 복도를 걷는데, 맞은편에서 시윤과 대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른 후배 그룹의 인사를 받던 그들은 이내 데이즈를 발견하곤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얘들아!”
시윤의 목소리에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데이즈. 멤버들이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갔다.
“아니, 그렇게 안 뛰어와도 되는데….”
시윤이 당황해하자 그와 함께 있던 에임의 막내, 대환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봤다.
“그럼 부르질 말았어야지.”
시윤을 타박하던 대환이 눈알을 굴리고 있는 후배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에임 대환이에요. 드디어 보네.”
민성이 대표로 그의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꾸벅였다.
“뵙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바짝 긴장해 있는 데이즈에 그가 제발 편하게 대해 달라며 신신당부했다.
“뭐 마실래요?”
음료수를 뽑으러 나왔는지 대환이 자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무대 봤어. 너무 잘하더라.”
시윤이 청의 어깨를 두드리며 데이즈를 이끌었다.
“그런데 남경이 형은? 지금 무대하고 내려오는 길 아니야?”
“네, 맞아요.”
왜 매니저도 없이 너희끼리 다니냐는 말에 민성이 안타까운 얼굴로 대답했다.
“배탈…….”
남경은 떡볶이의 심판을 받는 중이었다. 시윤은 괜히 물어봤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쪽이 백야 맞죠?”
“네? 네!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했는데.”
시윤과 멤버들이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백야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대환.
눈이 마주쳤는데 말을 걸지도, 피하지도 않는 그에 백야가 먼저 시선을 피하자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걸어오는 대환이었다.
“왜, 왜 그러시는….”
불안함을 감지한 개복치가 쪼그라드는데, 마침 대환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어디까지 올라가요?”
“뭐가… 말입니까?”
다짜고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냐니. 백야가 주위를 살폈다.
‘어디 올라갈 만한 데가….’
그러다 자판기 위로 신발 비슷한 게 올라가 있는 걸 발견했다. 먼지 쌓인 자판기 위를 조심스레 가리키는 개복치.
“아! 혹시 선배님 신발입니까?”
“너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멤버에게서 낯선 군대의 향기가 난다. 곁에 있던 지한이 의문을 표했으나 백야는 못 들은 척했다.
“그거 말고. 키 어디까지 올릴 수 있냐고요.”
“키, 키요?”
어려운 상대의 거듭된 질문에 머리가 새하얗게 질린 백야가 속으로 제 키를 반올림했다. 그런데 소수점이 하필이면 0.2라 반올림을 할 수가 없다.
“저… 반올림이 안 돼서 175cm가 끝인데요….”
그렇지만 저희 팀에는 율무라는 훌륭한 키다리가 있으니 저 친구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 같다며 백야가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그에 대환이 콧방귀를 꼈다. 누가 봐도 어이없어하는 얼굴이었다.
“웃기네.”
다소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발언에 개복치는 사색이 됐다. 혹시 제가 잘못 대답한 건가 싶어 손이 덜덜 떨리는데, 대환이 전보다 편해진 얼굴로 다시 질문했다.
“옥타브 어디까지 올릴 수 있어요? 아까 무대 보니까 하이 에프를 진성으로 뽑던데.”
“아…… 그 키요?”
혼자서도 작사 작곡을 한다고 알려진 대환은 유명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은 천재였다. 현재 에임을 대표하는 곡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한 곡이었으며, 작곡돌이라는 단어도 그가 시초였다.
“그 이상은 아직 올려 본 적 없는데요….”
“왜?”
“프로듀서님이 목 아끼라고….”
“하이 에프면 충분히 혹사시킨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대환이 대뜸 핸드폰을 내밀며 백야의 번호를 요구했다.
“번호 좀 줄래요?”
번호는 처음 따여 보는 백야가 어색하게 전화를 받아 들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번호를 꾹꾹 눌러 돌려준 개복치.
“그런데요, 선배님…. 제가 활동할 때는 핸드폰을 반납해서 답장을 바로 못 드릴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차단만 하지 말아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언급하는 대환에 백야가 절대 그럴 일 없다며 손사래 쳤다.
“왜, 왜. 뭔데?”
지한과 백야를 제외한 멤버들에게 음료수를 하나씩 쥐여 준 시윤이 다가왔다. 세 사람도 얼른 고르라며 재촉한 그는 대환의 핸드폰 화면을 보곤 작게 웃었다.
“그렇게 번호 알려 달라고 하더니 결국 얻어 냈네.”
“그러게 진작 알려 주면 좀 좋아?”
둘의 대화를 듣자 하니 대환이 시윤에게 백야의 번호를 알려 달라 몇 번 요구한 모양이었다.
“백야 너 이제 큰일 났다~ 얘가 너 엄청 귀찮게 할걸?”
백야가 어벙한 얼굴로 대환과 시윤을 번갈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