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68화 (68/340)

제68화

연습실 가운데 뻗어 있는 금발1에게 다가간 백야. 그나마 이중에서는 BB9의 금일이 제일 나았다. 나름 임진각 동기이기도 하고 동갑에 여러모로 대화가 잘 통하기도 했으니까.

“물 마실래?”

“아, 땡큐.”

금일이 일어나서 물컵을 받아 들었다.

“넌 맨날 이런 데서 연습하냐? 근데 왜 춤이….”

“죽을래?”

발끈한 뚝딱이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농담, 농담.”

순하게 생겼는데 보기보다 성격이 있다며 금일이가 혀를 내둘렀다.

“잠은 좀 자냐?”

“몰라. 죽을 것 같아.”

요즘 워킹데드를 하도 연습했더니 꿈에서도 좀비가 나오곤 했다. 이는 데이즈 멤버들 모두가 겪고 있는 증상이었는데, 힘들고 대환이 불편한 것과 별개로 곡 작업은 꽤 재미있었다.

작곡 천재라는 말이 그냥 붙은 건 아닌지 대환은 20년도 더 된 노래를 요즘 스타일로 완벽하게 재해석해냈다. 가사도 지한의 랩 파트만 추가되었을 뿐, 원곡의 느낌은 그대로 살려 ID의 대표 프로듀서인 명 PD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에임 선배님들이랑 뭐 한다며.”

“어떻게 알았어?”

“소문 다 났는데.”

금일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도 스페셜 스테이지 할 거라고 기사 나갔더라.”

금일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해당 기사를 찾아 보여 주었다.

[겨울 요정들의 윈터 송 핫 루키 콜라보! 역대급 비주얼 무대 예고]

“……제목이 왜 이래?”

“왜? 난 마음에 드는데.”

백야가 못 볼 걸 봤다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때 누워 있는 백야와 금일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하랑이었다.

“다시 연습 시작할게요.”

첫 만남부터 주도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더니 어느새 하랑은 이 프로젝트팀의 암묵적인 리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백야는 타고나길 주목받는 걸 싫어하고, 물 흐르듯 살자는 주의라 하랑의 의도가 거슬리진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나서 주는 사람이 있는 게 편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만요. 팔 각도가 그게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지금 본인 때문에 몇 번이나 다시 하는지 몰라요?”

같은 동작을 금발즈가 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 꼭 백야가 틀렸을 때만 노래를 끊어 가며 망신을 줬기 때문이다.

데이즈 멤버들은 백야가 틀리더라도 괜찮다며 기운을 북돋아 주는 편이었는데 하랑은 정반대였다. 틈만 나면 백야의 기를 꺾어 놓으려 들었다.

아무래도 프로젝트 그룹이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배려라는 게 없었다. 다들 자기 분량 챙기기에만 욕심이 있어 보인달까.

물론 예상한 바지만 실제로 겪는 건 생각보다 더한 스트레스였다.

“에이~ 하랑이 형. 저희 안무에 너무 힘 안 주기로 했잖아요.”

그나마 금일이가 백야의 편을 두둔하며 나서 줬으나 하랑은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문제죠. 율동 수준의 안무도 소화 못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나 같으면 쪽팔릴 것 같은데.”

“…뭐라고요?”

개복치의 난 사건으로 멤버들은 잘 알고 있지만, 이 집 개복치는 가끔 욱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마지막 대사가 그의 급발진 스위치를 건드렸다.

“다음 연습이 마지막인데 아직도 동작을 헷갈리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분명 들으라고 한 게 틀림없는 신경질적인 혼잣말에 백야의 표정도 점점 썩어 들어갔다.

“말씀이 좀 지나치신 거 아니에요?”

애초에 안무에 힘을 빼고 노래에 비중을 더 두기로 한 무대였다. 그런데 파트 분배부터 시작해서 백야가 하는 모든 행동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넘어지는 건 하랑이었다.

방금 딴지를 걸고넘어진 동작도 사실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전생에 저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저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 탓에 만난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완곡을 한 건 손에 꼽을 정도.

“중간에 자꾸 끊어 대는 누구 때문에 진도 못 나가는 건 생각도 안 하나 보네.”

하랑과 백야 사이로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혀, 형들 왜 그러세요….”

금이와 금삼이 눈치를 보며 하랑을 말렸다. 백야도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금일에게 말했다.

“놔 봐.”

“…난 너 안 잡았는데 백야야.”

그저 옆에 서 있었을 뿐.

하랑을 붙잡은 금발즈와 다르게 금일의 손은 여유로웠다.

“아, 아무튼!”

목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지만, 다시 미간 사이에 힘을 준 백야가 자신은 할 말을 해야겠다고 선언했다.

“저 프로젝트 그룹이라고 대충하는 거 아니고요, 원래 동작 외우는 게 많이 느려요. 물론 자랑 아닌 거 아는데 저한테만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시니까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드네요.”

메인 래퍼인 지한 저리 가라 할 만큼의 빠른 속도와 완벽한 딕션이었다. 개복치의 의외의 모습에 금일은 속으로 박수를 쳤다.

“저희 어차피 이번만 잘 넘기면 다시는 무대 같이할 일 없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제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참으세요. 저도 참고 있으니까.”

누군 자기가 좋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줄 아냐며 백야가 작게 툴툴거렸다. 폭주하는 개복치 기관차에 할 말을 잃은 하랑은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로 백야를 노려볼 뿐이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이왕 분위기 개판 된 거 하실 말 있으면 하라며 도발까지 주저하지 않는 용맹 햄스터.

요즘 애들은 뭘 먹고 자랐는지 여기서도 백야가 제일 작았는데. 키도 조그마한 게 눈을 부릅뜨고 결투를 신청하고 있으니 금발즈도 어안이 벙벙했다.

“할 말 없어요? 그럼 다시 연습이나 하죠.”

백야는 본의 아니게 주도권을 빼앗아 와 버렸다. 아슬아슬하게 평화를 유지 중이던 분위기는 완전히 나락으로 가 버렸다.

메이킹 촬영이 없길 천만다행, 아니 차라리 카메라라도 있었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눈을 질끈 감은 금일이 제 미래를 예견했다. 아무래도 이 스페셜 무대는 망한 것 같다고.

* * *

D-DAY.

오늘은 방송 3사 중 먼저 시상식을 개최하는 S사의 가요대전이 있는 날이었다.

“으갹!”

아침부터 침대에서 떨어지는 끔찍한 일을 당한 백야. 자면서 알람 소리를 듣긴 했는데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상태창에 너무 놀라 버렸다.

“괜찮아?”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지한이 다가와 일으켜 주었다.

“아니 이게, 이게 무슨…!”

꽤 아픈지 백야는 찡그린 얼굴로 꼬리뼈를 문지르면서도 허공에 삿대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를 이상하게 바라본 지한이 혀를 쯧쯧 찼다.

“얼른 잠 깨라.”

밤사이 까치가 지어 놓은 집을 헝클인 지한이 유연을 깨우러 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수룩한 새벽. 백야가 눈을 비비며 한 번 더 눈앞의 퀘스트를 천천히 읽었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Q. 천재 아이돌(1) : 세 개 이상의 신인상 수상]

“미친…….”

천재 아이돌로 살아남는 게임에 뜬 천재 아이돌 퀘스트.

메인과 히든을 떠나 항상 장난스러웠던 퀘스트 명도, 실패 시 주어지는 페널티도 적혀 있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죽어?’

망겜의 메인 퀘스트가 처음 등장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인상 세 개 이상 수상이라니?’

양심 어디 갔냐 XX.

스페셜 무대를 진행하면서 성격이 많이 날카로워진 예민 햄스터. 바닥에 앉은 백야가 심각한 얼굴로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데이즈가 참석하기로 한 시상식이…….’

반쯤 감긴 눈의 햄스터가 돌연 이상 행동을 보였다. 다시 다가온 지한이 얼굴 앞으로 손을 휘저으며 백야의 행동을 방해했다.

“자?”

최근 들어 화가 많아졌는지 자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던데. 이것도 잠꼬대의 일종인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안 잔다.”

“근데 뭐 해.”

“생존 확률 계산 중.”

자는 거 맞네.

여기까지가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쟤 왜 저렇게 떨어?”

“몰라. 상태가 안 좋아.”

민성이 지한에게만 살며시 물었다. 아침부터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방문 너머까지 들려왔기 때문이다.

샵에 들려 방송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방송국에 도착한 후에도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는 백야에 민성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스페셜 무대 때문이지 뭐~ 우리는 신인이니까 떨리는 게 당연해!”

반면 율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백야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는 손목에 파란색 리본이 눈에 띄었다.

“우리 집 햄스터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표시해야지~”

평소라면 이를 드러내며 강하게 거부했을 백야가 웬일로 얌전했다. 율무가 백야의 목에 리본을 묶고 있는데도 개복치의 정신은 여전히 다른 데 팔려 있었다.

“무, 뭐야. 얘가 왜 이러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율무가 두려운 얼굴로 그에게서 후다닥 멀어졌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햄스터 지금 눈 뜨고 자는 거야. 얼굴이 바보 같잖아.”

유연과 청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다 들린다.”

백야가 목에 묶인 리본 끈을 더듬으며 경고했다.

그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일단은 다행이다’였다. S사의 가요대전은 방송 3사 중 유일하게 시상하지 않았다. ‘하나 되는 음악’이라는 주제 아래 청팀과 백팀으로 나누어 실시간 인기 투표만 진행될 예정이었다.

에임과 데이즈는 나란히 청팀에 배정됐는데. 멤버들이 몸에 하나씩 지닌 이 파란색 리본은 청팀 출연자라면 몸에 꼭 두르고 있어야 하는 물건이었다.

“율무차, 이상한 짓 좀 하지 마.”

백야가 엉성하게 묶이다 만 리본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느슨해지기보다 되레 목이 꽉 조여지는 느낌.

“켁. 뭐야, 왜 안 풀려?”

당황한 백야가 반대편 끈을 잡아당겼다. 그럴수록 개복치의 목은 점점 더 조여 왔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목을 부여잡는 백야에 청이 비명을 질렀다.

“Oh my god! 율무가 햄스터 Kill 했어!”

“아, 아니야! 난 그럴 의도는…!”

놀란 율무가 한달음에 달려와 자신이 묶은 리본을 살폈다.

“무, 뭐야? 너 무슨 짓 한 거야?”

“지금 누가 할 소릴!”

목이 답답한 백야가 목과 줄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빨개진 얼굴에 멤버들이 금세 백야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아악! 햄스터 죽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청이 호들갑 떨자 백야가 부정 탄다며 발끈했다.

“나와 봐.”

율무를 밀친 유연은 꼬인 줄을 더 꼬고 있었으며, 민성은 칼로 잘라 버리자며 메스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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