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69화 (69/340)

제69화

생산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이는 지한이 유일했다.

그는 스타일리스트의 파우치를 뒤적이며 날카로운 물건을 찾고 있었는데. 가위를 찾고 싶었으나 커터 칼밖에 발견하지 못한 그는 칼의 슬라이드 부분을 밀며 백야와 멤버들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처키, 처키다!”

청은 홀로 공포 영화를 관람 중이었다.

“뭐야, 쟨 또 뭔데…!”

칼을 들고 서서히 다가오는 지한에 놀란 백야가 멤버들을 밀치고 소파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리 와, 한백야.”

“시, 싫어! 너 같으면 가겠냐?!”

“빨리 와.”

호러가 따로 없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떨어진 것도 불길한데 오늘은 그 망할 놈이랑 하는 스페셜 스테이지가 있는 날이었다. 거기다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메인 퀘스트까지.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 모든 걸 한 방에 날려 주는 멤버들은 여러 의미로 대단한 존재였다.

“다, 다가오지 마!”

지한과 대치 상태를 벌이며 슬금슬금 대기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는 백야.

“그 문 나가면 더 곤란해져.”

좋은 말로 할 때 오라는 지한. 원체 표정도 없는 애가 칼을 들고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사이코패스 악당 같아 보였다.

손을 내밀며 회유하는 지한에 백야가 도리질을 쳤다.

한 걸음 더 물러선 순간, 대기실 문이 열리며 커피를 사러 갔던 덕진과 남경이 등장했다.

“으악! 와, 쏟을 뻔했어요.”

“왜 또. 뭔데, 무슨 일인데.”

한눈에 봐도 난장판인 대기실에 남경이 뒷목부터 잡고 봤다.

“형! 쟤 잡아!”

“…에잇!”

율무가 백야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입술을 질끈 문 백야가 대기실을 탈출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햄스터 탈출했다!”

청의 외침과 동시에 율무와 유연이 남경의 앞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방금 지나간 거 뭐냐?”

“율무 님이랑 유연 님이요.”

“떼잉. 개판이 따로 없네.”

얼이 빠진 남경의 물음에 덕진이 친절하게 일러 주는 와중, 민성은 자신은 동조하지 않은 척 슬그머니 발을 뺐다.

그 시각 복도를 달리는 햄스터와 그를 잡으려 혈안이 된 두 사람은.

“아악! 오지 말라고!”

“백도, 왜 도망가는데!”

“내가 책임질게!”

데이즈가 올 때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복도는 어느새 스텝과 가수들로 북적였다.

이 인파를 헤치고 뛰어다니는 것만 해도 이미 엄청난 민폐. 데이즈의 평판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먼저 걸음을 멈춰 세운 건 햄스터였다.

“갈게! 간다고! 가는데 내가 알아서 풀어.”

다시금 복도에서 이어지는 대치 상황. 백야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오케이. 일단… 일단 가자.”

“와… 왜 이렇게 빨라?”

유연과 율무가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짚었다.

“어? 율무야, 유연아.”

그때 뒤에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랑이 형?”

“…형?”

하랑은 백야를 본체만체하며 곧장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율무와 유연을 끌어안기까지 하며 세상 반가운 척을 해대는데, 사람이 미워서 그런가 솔직히 꼴 보기 싫었다.

“아… 형 데뷔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축하드려요.”

“고맙다. 같이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치.”

뻘쭘하게 소외된 백야만 하랑의 팀원들과 어색한 눈인사를 나눴다.

‘유치하다, 유치해.’

한쪽 입꼬리를 삐죽인 백야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오! 이건 또 왜 이렇게 꽉 매어 놨어.”

목줄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긴 그가 제법 큰 소리로 툴툴거렸다. 율무와 유연이 백야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하랑이 다시 두 사람의 주의를 앗아 갔다.

‘하!’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 이거지.

배알이 뒤틀린 백야가 입술을 비죽이며 뒤를 돌았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제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몇 걸음 내딛지 못해 아는 얼굴을 또 마주쳤다.

“후배님 어디 가?”

대환이었다.

“아, 저, 그게….”

백야가 저도 모르게 뒤를 힐끔댔다. 대환도 함께 뒤를 살폈다.

“율무랑 유연이도 있었네?”

두 사람을 발견한 대환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목에 그건 또 뭐고.”

“이건 쟤네가 장난치다가 꼬여서…….”

어색한 선배 앞에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개복치가 쭈글거렸다.

“어? 쟤 우리 회사 애 아닌가.”

“백야네? 백야 안녕~”

에임은 사전 녹화가 이제 끝났는지 한두 명씩 대환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윤이 백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예쁘게 세팅이 되어 있는 걸 보고 닿기 직전에 손을 멈췄다.

“와……. 나 방금 아슬아슬했다.”

머리 대신 어깨를 토닥인 시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신인이라 그런가 위치 선정이 패기 있네. 풀리지 말라고 일부러 세게 묶은 거지?”

“그게 아니라 그냥 잘못 묶은 건데요. 이게 잘 안 풀려서….”

쩔쩔매는 회사 막내가 귀여운지 시윤이 즐거운 듯 웃었다. 그때 에임의 앞으로 다가온 하랑의 팀과 율무, 유연.

“Now Six AM! 안녕하세요. 식스에이엠입니다!”

하랑이 팀 구호를 선창하자 그의 그룹 멤버들이 에임에게 인사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하랑이 시윤을 보며 재차 인사했다.

“네. 반가워요~”

시윤이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능숙한 그와 달리 에임 멤버들은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본인들도 데뷔한 지 이제 9년인데 이런 대선배 취급을 받으려니 어색한 모양이다.

한편 하랑은 에임 쪽을 보며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어?”

기대에 부응하듯 연하가 손가락을 들며 앞을 가리켰다. 하랑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대사.

“너희는 손목에 매 놓고 왜 얘는 목에 이렇게 해 놨어?”

연하가 유연과 율무의 손목에 매여 있는 리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자 하랑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어허. 백야 가만히 있어.”

“선배님, 저 목이 더 조이는 거 같은데…….”

“쓰읍.”

“…넵.”

구양과 대환에게 목을 내어 준 백야. 그런 뒷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미안한 얼굴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게 제가 장난치다가 실수로 엉켰어요.”

“저는 도와주려 했어요.”

졸지에 힘없는 멤버를 괴롭힌 게 되어 버린 두 사람이 멋쩍어했다.

그때 뒤에서 백야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선배님 완전 최고예요!”

한껏 거만한 자세로 허공에 파란 리본을 휙 날려 보이는 구양과 박수를 치는 백야가 보였다.

“대환아 봤냐? 백야는 더 기뻐하도록.”

“넵!”

드디어 풀린 리본에 율무도 눈을 크게 뜨며 기뻐했다.

“와~ 역시 선배님! 대단하십니다.”

쌍 엄지를 치켜들며 진심으로 감탄하는 율무에 구양의 어깨는 하늘로 치솟았다.

“난 너 얼굴 터지는 줄.”

“네가 더 꼬아 놔서 그렇잖아. 망할 유연.”

“어쭈. 살아났네?”

율무와 유연이 자연스레 백야의 옆으로 다가서자 하랑의 눈이 두 사람을 쫓았다.

“식스에이엠이라고 했죠?”

마침 옆에서 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랑이 시선을 돌려 시윤을 바라봤다.

“네, 맞습니다. 회사에서 몇 번 뵌 적 있었는데.”

“그래요?”

시윤의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사람도 많고 복도라 그런가 어수선하네요. 다음번에 더 길게 이야기 나눠요. 반가웠어요.”

그는 데뷔를 축하한다며 앞으로도 응원하겠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며 데이즈를 챙겨 떠났다. 하랑이 에임 멤버들 사이에 둘러싸인 백야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 * *

본인도 모르는 사이 하랑의 약을 잔뜩 올려놓은 개복치. 스페셜 스테이지를 앞두고 의상을 갈아입은 백야가 털북숭이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혹시 컨셉이 눈사람?”

지한의 입가가 씰룩이는 게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읏즈므르….”

곧 하랑이 놈 얼굴을 또 봐야 된다 생각하니 이가 절로 악물렸다.

“우와~ 그대로 사냥 나가면 되겠다. 엽총은 안 들어?”

백야는 하얀색 털 모자에 털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촉감이 좋은 듯 율무가 손으로 연신 등을 쓰다듬었다.

“아니다. 사냥당하는 쪽인가?”

하얀 게 북극곰이 따로 없다며 율무가 쉬지 않고 입을 털었다.

하. 짧게 한숨 쉰 개복치가 고개 돌려 율무를 바라봤다.

“왜?”

“왤까?”

짧게 반문한 백야가 율무의 팔을 낚아채 그대로 물어 버렸다.

“아악! 아파, 아파!”

“햄스터 좀비 된 거 틀림없다.”

소파 끝 쪽에 앉아 있던 청이 가장자리에 몸을 더 붙여 앉으며 백야를 경계했다.

“아까 그 소란을 피워 놓고 어떻게 지치지도 않냐….”

너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린다며 녹차를 홀짝이던 남경이 스타일리스트를 불렀다.

“그런데 진짜 백야 옷이 너무 과하지 않아요?”

“그런가…? 그치만 귀여운 걸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진 그녀. 실장은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냐며 오히려 자문을 구해 왔다.

“사실 저것도 많이 뺀 거거든요.”

“…저게 뺀 거라고요?”

지금도 상당히 투 머치로 보이는데 다 하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옷이나 모자 둘 중에 하나는 좀 정상적인, 아니 단정한 거로….”

애 얼굴이 너무 묻히지 않냐며 남경이 애써 돌려 말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요. 어… 물론 어련히 알아서 잘하셨겠지만 다른 그룹이랑도 다 맞추신 거죠?”

“그럼요. 다른 팀도 비슷해요.”

“역시.”

남경은 확신했다. 컨셉이 눈사람인 게 틀림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