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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72화 (72/340)

제72화

“내가 찍은 사진이 이렇게 유명해지다니. 좀 뿌듯한걸?”

“어디? 나도 봐, 나도!”

흥미로운 엽사의 등장에 청과 유연도 관심을 보였다.

“지워라. 나율무.”

정수기 앞에서 물을 마시던 백야는 달려갈 기운도 없는지 힘없이 소파 쪽으로 걸어가 누웠다.

“방금 백도 걷는 거 좀 비슷하지 않았어?”

“이 사람이랑 똑같아!”

이젠 대꾸할 힘도 없어진 백야가 허공에 손을 대충 휘저었다.

“마음대로들 해라.”

이마 위로 팔을 올려 눈을 감은 백야는 금방 선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익숙한 목소리가 제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백야야.”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에 처음은 못 들은 척했으나 한 번 더 저를 흔드는 손길.

“한백야.”

“으응….”

백야는 억지로 눈을 떴다. 정말 겨우 뜬 눈이라 정신이 또렷하지도 않았다. 그저 뿌옇고 무거운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 강했다.

“정신 차리고 준비해야지.”

“…무슨 준비?”

그때 옆에서 민성과 남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감 미리 준비해 둬.”

“에이. 우리가 못 받을 수도 있잖아. 괜히 김칫국 마시는 것 같아서 좀 그래.”

멍한 백야가 뒤를 돌아보자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대기실? 분명 연습실이었던 것 같은데.’

닫혀 있는 문 위로 JAMA 로고와 데이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내가 언제 시상식에 왔더라.’

비행기를 탄 기억도 없는데 눈을 뜨니 홍콩이라니. 이상하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넋을 놓고 서 있는데 뒤에서 누가 말을 걸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자 그곳엔 하랑이 서 있었다.

‘얘가 왜 여기에 있어?’

또 무슨 시비를 걸러 왔나 싶으면서도 그의 용건이 궁금했던 백야는 무시하지 않고 반응했다.

“어쩐 일이세요?”

“그건 내가 해야 할 소리 아닌가.”

못 본 사이 싸가지가 더 없어졌다.

“아, 예. 그런데 대기실 잘못 찾아오셨어요.”

“그러니까.”

남의 대기실이라는데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백야가 눈살을 찌푸리자 하랑이 문을 가리키며 정색했다.

“남의 대기실에서 뭐 하냐고.”

“나 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콧방귀를 낀 백야가 하랑이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여기 저희 대기실 맞, …어?”

얼굴을 찌푸리던 백야가 돌연 당황한 모습으로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기가 왜…?”

문 위로 데이즈가 아닌 식스에이엠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멤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가.”

하랑의 축객령에 백야는 허겁지겁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외국인과 팬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혼란스러운 상황에 백야가 뒷걸음질 치며 멤버들을 찾았다. 그때 군중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를 잡아당겼다.

“여기서 뭐 해? 다음 무대 우리 차례야.”

갑자기 나타난 지한이 백야를 이끌었다. 엄청난 인파를 헤치며 백스테이지로 향하던 두 사람. 그런데 불쑥 나타난 이름 모를 스텝이 지한과 잡은 손을 풀어 버렸다.

“누, 누구세요?”

“이쪽이 더 빨라요!”

“네? 아니, 저, 지한이…!”

뒤를 돌아봤지만 지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별다른 저항도 못 해 보고 스텝에게 끌려간 백야는 복도를 돌고 돌아 멤버들과 합류했다. 그리곤 곧장 무대 위로 올려졌다.

괴물 신인이라는 거창한 소개와 함께 조명이 켜진 무대. 전주에 맞춰 멤버들이 안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백야 혼자 멀뚱히 서 있었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나름 열심히 연습했는데 막상 무대 위로 올라가니 안무가 하나도 떠오르질 않았다. 안무를 모르니 자신의 파트에서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한 박자 늦게 안무를 시늉이나 내는 게 전부였다.

‘망했다.’

자기가 무대를 망쳤다는 사실이 정신을 지배했다.

눈을 깜빡이자 어느새 끝난 무대. 아래로 내려온 멤버들은 수고했다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지만, 백야는 무리에서 떨어져 있었다. 제가 없음에도 멤버들은 저를 찾지 않았고, 결국 백야만 남겨 두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가 무대를 망쳐서 그런가….’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며 암흑이 몸을 덮쳤다. 텅 빈 공간에 홀로 남은 백야. 그때 멀리서 신인상 후보를 발표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즈와 식스에이엠 등 올해 데뷔한 남자 아이돌 그룹 다섯 팀의 이름이 불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토기가 치밀어 올라 헛구역질을 하는데도 어쩐지 개운치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수상자를 발표하겠다는 호명과 함께 불리는 이름은….

“축하드립니다! 식스에이엠!”

그 순간 사방에서 낯선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 한백야 춤 연습 좀 해라

- 나 같으면 쪽팔릴 것 같은데

- 쟤 안무 또 틀렸네

- 아직도 동작을 헷갈리면 어떻게 하자는 건지

저를 할퀴는 목소리들에 백야는 귀를 틀어막았다. 주저앉아 몸을 웅크린 채 바닥만 보고 있는데 순간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트로피를 쥔 하랑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마워. 네 덕분이야.”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백야는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안무를 틀려서 데이즈가 신인상을 못 받았구나.’

[<천재 아이돌(1)> 실패!]

그때 나타난 상태창 너머로 유연의 모습이 보였다. 백야를 발견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일어나지? 말로 할 때 일어나는 게 좋을 텐데.”

“……?”

백야의 눈이 한 번 더 뜨였다.

멍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정신이 좀 드냐? 호랭이 형이 오늘은 연습 그만하고 들어가서 쉬래. 내일 비행기 타려면 체력도 좀 있어야 한다고.”

“…비행기? 여기 홍콩이잖아. 근데… 상 발표했는데 나는 죽었어.”

멍한 백야가 풀린 눈으로 유연과 율무를 올려다봤다.

“맛이 갔네, 갔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몰라. 들까?”

“형은 힘이 남아돌아?”

“얘는 작잖아.”

율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 유연이 둘을 번갈아 봤다.

“기다려 봐. 야, 백도.”

“아……. 죽었는데 또 개복치야. 여긴 바다야…?”

“정신을 못 차리네. 누가 얘한테 마취총 쐈어?”

어떻게 해서든 제 발로 걸어가게 하려고 유연이 백야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나 잠에 완전히 취해 버린 개복치는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물속인데도 숨이 쉬어진다느니, 복도에 사람이 많아서 숨어야 된다느니 등의 헛소리를.

“안 되겠다. 형, 들자.”

“헛차.”

포장 이사라도 하듯 담요로 백야를 둘둘 감싼 율무가 그를 어깨 위로 짊어졌다.

“가볍네.”

율무는 연습생 시절 정신 못 차리는 친구들을 이런 식으로 집까지 몇 번 데려다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 납치로 오해받아 경찰서도 한번 가 봤다며 웃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유연이 율무의 등을 제법 세게 때렸다.

“좀! 계단 똑바로 보고 걸어. 얘 떨어뜨려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지면 우리 다 같이 망하는 거야.”

하루 남기고 여섯 명 동선을 다섯 명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면 쓸데없는 추억 회상은 집어치우라며 살벌하게 경고했다.

“와… 나 소름 끼쳤어.”

“그러니까 계단 잘 보라고.”

“알겠어.”

* * *

“…나 언제 한국 왔지?”

숙소 침대에서 눈을 뜬 백야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묘하게 머리로 피가 쏠린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개복치 씨, 바다는 잘 헤엄치셨나 모르겠네.”

“…어?”

백야의 동공이 요동쳤다.

“너 어제 우리 몰래 수면제라도 먹었냐? 뺨 때려도 안 일어나길래 율무 형이 공주님 안기로 데려옴.”

“……뻥치지 마.”

“글쎄. 그게 과연 거짓말일까?”

바닥에 앉아 캐리어를 잠그던 지한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율무가 들고 온 게 아니면 네가 어떻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겠냐는 지한. 그의 진지한 얼굴에 백야는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긋 뭘닝~ 빵 먹을 사람?”

때마침 율무가 나타났다. 한 손에 식빵 봉지를 든 그가 방문을 열며 아침 인사를 하는데 방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음?”

저를 경계하는 듯한 백야. 유연과 지한의 살짝 올라간 입매.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율무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

데이즈는 단체로 백야 놀리기에 진심인 편이었다.

“햄 공주 일어났네?”

움 뫄.

입술을 한껏 내민 율무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냈다.

“사랑의 뽀뽀로 깨워야 하는 줄 알고 양치하고 왔는데.”

하루살이가 아침부터 저질스러운 농담으로 햄스터의 화를 돋웠다. 참고로 하루살이는 민성이 지어 준 별명으로, 가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도가 지나친 장난으로 상대의 화를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침부터 신경을 살살 긁는 율무에 백야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의 안면을 노리고 던져진 베개는 덤이다.

“꺼져, 이 변태야!”

데이즈의 숙소는 오늘도 평화로웠다.

“넌 잡히면 가만 안 둬!”

“야, 야! 잠깐만. 내가 어제 너 들고 왔는데 이러기 있어?”

“차라리 연습실에 버려!”

쫓는 개복치와 도망치는 하루살이의 추격전. 두 사람은 아침부터 집 안을 개판으로 만들어 놨다며 민성에게 한차례 꾸지람을 들었다.

“제발. 제발 좀 사이좋게 지내라. 내 유일한 부탁이야. 어?”

“우리 사이좋은데? 그치~”

“노력해 볼게.”

리더의 권한으로 조수석과 차의 제일 뒷자리에 떨어져 앉은 율무와 백야. 덕분에 백야의 옆자리는 덕진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입술은 왜 그러신 거예요…?”

덕진이 백야를 보며 자신의 입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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