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 기내식 먹으려고 테이블 위에 만원 얹어놓고 기다리다가 승무원이 음식만 주고 돈은 안 가져가니까 다급하게 만 원짜리 내민 아이돌 = 데이즈 백야ㅋㅋㅋㅋ
누구야. 누가 우리 복숭아 놀렸어, 어?! 이래서 비행기는 처음 타는 티 내면 안된다구 애기야ㅠㅠ
└ 내릴 때 유연이 모자를 왜 얘가 쓰고 있나 의아했는데 울 복숭아 부끄러워서 그런 거였어 (오열)
글을 읽는 순간에도 해당 짹은 빠르게 공유되고 있었다. 댓글은 모자를 쓴 유연과 백야의 사진으로 도배되기 직전이었는데.
- 제품명 알아냄! N사 바이올렛 볼 캡 35,000원 구매 완료 (카드 긁는 짤)
똑같은 모자를 구매했다는 인증 글도 제법 보였다.
그리고 여기, 같은 모자를 사고 싶어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또 다른 한 사람.
“이, 이건 사야 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홍콩의 뒷골목에서 갑자기 인터넷 쇼핑을 하는 한국인. 빠르게 판매 사이트에 접속했으나 바이올렛 색상은 품절 상태였다.
“아악!”
돌연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는 친구에 시윤뷘이 놀라 물었다.
“왜? 뭔데.”
“품저얼…….”
“…모자? 이거 개 흔한 거잖아. 왜, 네 최애가 쓰기라도 했음?”
뒤늦게 SNS에 접속한 시윤뷘이 실트에 올라와 있는 ‘백야 모자’를 보곤 작게 감탄했다.
“오. 얘 화력 장난 아니네.”
* * *
체크인을 마친 데이즈는 룸메이트와 함께 방으로 올라왔다.
“그럼 좀 쉬고 있어. 일찍 오니까 이런 건 좋네.”
남경과 덕진을 포함해 두 명씩 방을 쓰게 된 데이즈는 공평하게 사다리 타기로 룸메이트를 정했다.
‘하필이면 걸려도 쟤랑 같은 방이 라니.’
그러나 룸메이트가 불만스러운 백야는 도끼눈으로 옆을 흘겨보고 있었다.
“에이, 미안해~ 백도 삐졌어?”
유연이 백야의 팔을 건드리며 필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개복치에겐 통하지 않는 스킬이었다.
“누구세요?”
“그쪽 친구요.”
“저는 사기꾼 친구로 둔 적 없는데요.”
“내가 너 모자도 빌려줬는데? 저기요, 여기 돈…!”
“야!”
기내에서 있었던 일을 흉내 내는 유연에 백야가 발끈했다. 그러다 얼른 이성을 되찾곤 등을 돌려 버렸다.
“아 몰라. 나 친구 없어. 아무튼 없어.”
유연은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죄질이 더욱 나빴다.
한편 마음이 단단히 상한 것 같은 백야에 내심 미안해진 유연은 말이 없어졌다. 꾹 다문 입매가 그의 난감한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백도.”
“…….”
불러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백야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방법뿐인가.
“형?”
“…뭐야, 갑자기.”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던 개복치가 움찔거렸다.
19년 모범생 인생….
얌전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한 친구라고는 유경과 재현이 전부인 백야는 남자 무리에 껴 본 적도, 결코 대장이 되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백야는 소위 말하는 형님 대접에 약했는데.
“제가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다른 애들한테도 주의 시키겠습니다.”
“…됐거든?”
“에이~ 왜 그러실까. 나 맨날 팀장님한테 잔소리 듣잖아. 우리 어른스러운 백도 반만 닮아보라고.”
유연의 세 치 혀에 개복치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다시는 그런 거로 안 속일게. 이번에는 나도 좀 심하긴 했어, 인정.”
“…너 때문에 내가 비행기에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알지 알지.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유연은 백야가 반응을 보이는 이때 완전히 풀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홍콩에 있는 동안 내가 형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을게.”
“…무조건?”
“어. 형이 물 떠오라면 떠오고 시키는 거 다 할게. 어때, 콜?”
본인이 노예를 자처하겠다는데 백야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거래였다.
“형은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유연에 백야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래?”
“그럼!”
“좋아. 나 에그타르트.”
“…어? 뭔 타르트?”
유연은 백야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저나 지한이 음모를 꾸밀 때나 지을 법한 비열한 미소에 사슴은 적잖이 당황했다.
“응. 나 홍콩 간다고 하니까 누나가 여기 오면 그건 꼭 먹어봐야 한다더라. 우리 에그타르트 먹자 유연아.”
이래서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그는 깨달았다. 조용한 또라이, 사기꾼과 한방을 쓰고 있는 백야의 숙소 환경은 굉장히 안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에그타르트가… 룸서비스에 있던가?”
식은땀을 훔치며 테이블에 놓인 안내 책자를 뒤적이는 유연.
“내가 봤는데 거기 없어.”
“아까 내 말 다 씹고 보던 게 이거, 아니야. 그럼 음… 내가 그걸 어디서 구하지?”
“몰라?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나는 말만 하라며. 리허설 가기 전까지 부탁해.”
유연은 악마를 보았다.
* * *
장소가 한국에서 홍콩으로 바뀌었을 뿐, 데이즈의 일과는 달라진 게 없었다. 새벽에 일어난 멤버들은 호텔 룸에서 준비를 마치고 공연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시상식은 7시부터 시작이었지만 레드 카펫은 5시부터. 데이즈는 신인이라 초반 입장이었으므로 같은 소속사 선배인 에임보다 더 일찍 서둘러야 했다.
“너 어제 에그타르트는 뭐야?”
공연장으로 향하는 차 안. 단정한 수트에 머리를 포마드로 넘긴 민성이 물었다. 유연은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다며 미소 지었다.
“그거? 그런 게 있어.”
어젯밤 리허설을 가기 전에도 다녀온 후에도. 룸 벽면에 달린 전신 거울 앞에서 온종일 안무 연습만 하던 백야는, 이동 중인 지금도 영상으로 안무를 숙지하고 있었다.
“형님께서 걱정이 많으셔.”
“형? 나?”
민성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아해했으나 유연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있어. 복치 형님.”
“나 뭐.”
영상을 보던 백야가 옆을 돌아봤다. 자기 이야기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했다.
“아니, 형 열심히 한다고.”
유연의 영업용 미소에 개복치는 순순히 물러났다. 민성이 혹시 너희 싸웠냐며 눈을 부릅떴으나 유연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어제 비행기 사건으로 심기가 불편하시다길래 사죄의 의미로 홍콩에 있는 동안만 형님 대접을 해 드리기로 했어. 그러니까 형도 그런 줄 알아.”
“귀엽게들 논다.”
민성이 더 듣지 않아도 알 만하다며 피식 웃었다.
그사이 도착한 공연장. 나름 서둘렀는데도 먼저 주차된 차들이 제법 보였다.
“우리도 서두르자. 백야 핸드폰 그만 보고.”
“네에.”
백야가 뻐근한 눈 위로 손을 올렸다 뒤늦게 메이크업한 걸 깨달았다.
‘헉.’
눈화장이 번졌나 싶어 얼른 뒤돌아 창문에 얼굴을 비춰 보는데, 다행히 번지진 않은 것 같았다.
‘혼날 뻔했다.’
백야는 뒤돌기 무섭게 반대편 차에서 내리는 메이크업 실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제 발 저린 개복치가 어색하게 웃었다.
“백야 왜?”
“그, 그냥 반가워서요.”
말끝을 흐린 백야가 슬그머니 율무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개복치의 훌륭한 가림막이었다.
그러나 매의 눈으로 번진 아이라인 끝을 발견한 실장님. 백야는 금방 끌려 나와야만 했다.
“너 눈 비볐지.”
“어떻게 아셨, 헉.”
“못 살아 내가.”
JAMA는 개인 대기실을 따로 주지 않았다. 때문에 출연자들은 예외 없이 풀 세팅을 하고 공연장으로 모여야만 했는데. 메이크업을 해 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을 비벼 버린 개복치에 데이즈는 도착했음에도 주차장 한편에 서 있어야 했다.
“들어가서도 절대 비비지 마. 알겠어?”
“네, 죄송해요….”
공연장 안으로는 가수와 매니저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레드 카펫 순서 전까진 대강당 같은 홀에 모여 있다가, 입장 후에는 무대 한쪽에 마련된 가수석에서 시상식을 관람했다.
남경은 팬들과 같은 공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거라 표정 관리나 행동거지를 똑바로 해야 한다며 이동하는 내내 신신당부했다.
“데이즈는 아홉 번째 입장이래요.”
알고 보니 중국어 능력자였던 덕진 덕에 남경도 이곳에서만큼은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아이돌 그룹은 총 열 팀 정도. 개중엔 당연히 하랑의 그룹도 있었다.
“쟤네도 왔네.”
하랑을 발견한 남경이 작게 혼잣말했다. 백야가 홀의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덕에 하랑은 데이즈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너희 괜찮지?”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의미로 나뉘겠지만, 남경이 묻고자 하는 바를 눈치챈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괜찮을 건 또 뭐래~”
율무가 어깨를 으쓱이며 남경의 등 너머를 슬쩍 보았다.
“올 줄 알았잖아. 그리고 유연이랑 있을 때 이미 한번 마주쳤어.”
율무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만 빼고.
“너어는 진짜….”
이 와중에도 백야는 핸드폰으로 안무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율무가 개복치의 목에 헤드락을 걸며 시청을 방해했다.
“복치야~ 그만 보고 놀자~”
“누가 개복치야!”
시상식에서 랜덤 플레이 댄스라도 나오는 거냐며 핸드폰을 뺏어 가자 백야가 심통 난 얼굴을 했다.
“불안하단 말이야….”
초조해하는 백야에 분위기는 덩달아 무거워졌다.
“나 때문에 우리 상 못 받으면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