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다행히 파트를 무사히 넘긴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청이 앞으로 나오며 잔망을 부렸다. WANT ME의 1절과 후렴이 끝나자 새로운 사운드가 추가되며 곡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
‘놀이’의 오케스트레이션이 흘러나오며 다시금 백야의 바이브레이션이 들렸다. 대기하고 있던 댄서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순간 가려진 데이즈.
잠시 후 그들이 몸을 낮추자 망토를 벗어 던진 데이즈가 재등장했다. 하늘거리는 시폰 소재의 셔츠와 보석 브로치. 좀 전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Shuffle mix 카드를 섞어
우리의 놀이는 시작됐어
동화 같던 마법의 성은 밤하늘 아래 붉은 장미 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편곡으로 더욱 풍성해진 반주.
가운데 모인 데이즈와 그를 중심으로 본무대의 사이드를 메운 스무 명의 댄서들까지. 엄청난 인원이 선보이는 군무는 시상식의 시작을 알리는 무대답게 규모가 남달랐다.
민성의 도입 파트 이후 후렴으로 이어진 편곡. 지한의 2절 랩 파트까지 온전히 보여 줬던 ‘WANT ME’와는 다르게 ‘놀이’는 후렴만 짧게 한 뒤 곧바로 댄스 브레이크로 연결됐다.
시작부터 불꽃을 터뜨리는 무대 효과에 백야가 움찔거리는 게 화면에 잡혔다.
- Now or Never
마지막 소절까지 무사히 마친 데이즈가 엔딩 동작을 취하자 댄서들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가쁜 숨을 참으며 무대 위에 홀로 서 있는 데이즈. 쏟아지는 함성과 반짝이는 팬 라이트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 JBC ASIA MUSIC AWARDS. 다음 시상을 이어 갑니다.
무대가 끝남과 동시에 마법의 성은 사라졌다. 잠깐 어두워졌던 스크린 위로 다시 시상식 로고가 뜨며 아역 배우 출신의 여배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아시아 최고의 음악 시상식. JAMA에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소개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하던 그녀는 오늘 제가 맡은 역할은 ‘올해의 신인상 발표’라며 빨간 카드를 들어 보였다.
“네, 일생에 딱 한 번만 받을 수 있다는 신인상. 후보를 화면으로 만나 보시죠.”
* * *
무대를 내려온 데이즈는 땀을 닦으며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긴장된다더니 잘만 하던데?”
지한이 백야에게 휴지를 건넸다. 말없이 받아 든 백야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하나 더 남았잖아. 안심하기는 일러.”
어느 날부터 실수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구는 백야에 지한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부담감 때문에 그런가 싶어 조용히 내버려 뒀는데 상태가 점점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너한테 뭐라 했어?”
“…어?”
“너 원래 춤 틀리든 말든 신경 안 썼잖아. 아,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라며 지한이 휴지를 몇 장 더 건넸다.
“이마에.”
땀이 덜 닦였다며 얼굴을 가리키는 손에 백야가 반으로 접은 휴지를 이마 위로 가져다 댔다.
‘그야 춤 못 춰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말할 수 없었으므로 백야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에 긍정으로 해석한 지한은 작게 한숨을 쉬며 위로하듯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누가 뭐라 그랬는진 몰라도 신경 쓰지 마. 한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까.”
“알아. 신경 안 써.”
여전히 자신 없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이 이상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부적합했다.
데이즈가 아직 서 있는 곳은 백스테이지. 가수석으로 돌아가려면 본무대를 지나쳐 가야 하는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이어진 시상에 무대 아래에서 발목이 묶인 탓이었다.
“신인상 발표한다는데?”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현장 소리를 귀담아듣던 유연이 멤버들을 불렀다.
“후보 소개한대.”
수상에 관해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남경과 덕진도 귀를 기울였다. 무대 뒤편에는 스텝들이 현장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작은 스크린을 설치해 두었다.
화면에는 올해 데뷔한 다섯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짧게 편집돼 나오고 있었는데, 당연히 데이즈와 식스에이엠도 포함이었다.
“Nonono. 나 떨려서 못 봐.”
청이 뒤돌며 눈을 감았다.
후보자 소개 영상이 끝나자 다시 여배우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아니야. 꿈이랑 달라.’
고개를 돌리자 멀리 떨어진 가수석에 앉아 있는 하랑이 보였다. 잘게 떨리는 손끝에 백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만큼 센 악력이었다.
“JAMA 올해의 신인상 남자 부문.”
시상자가 그룹을 호명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이명에 백야가 눈을 감았다.
삐이이-.
“축하합니다.”
함성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멍하니 서 있는 멤버들이 보였다. 백야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야. 그래도 아직 시상식은 더 남았으니까….’
그런데 거기서도 못 받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우울한 생각에 백야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그때 청이 백야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와악! 왁!”
남의 귀에다 대고 괴성을 지르는 청에 백야는 순간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데이즈 올라갈게요!”
마찬가지로 근처에 있던 스텝이 데이즈를 향해 재촉하듯 소리쳤다.
“가자 백야!”
“우, 왜? 우리 왜 올라가는데?”
아직 어리둥절한 백야가 저를 이끄는 팔을 반대로 잡아당기며 자리에서 버텼다.
“왜가 왜야? 못 들었어? 당연히 상 받으러 가야지!”
“…상? 무슨 상?”
“신인상! 햄스터 꿈꿔?”
꾸물거리는 백야에 청이 팔을 잡아 끌었다. 남경도 축하한다며 뒤에서 등을 떠밀었다.
무대를 내려간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올라온 백야는 여전히 얼빠진 모습이었다. 가수석에서 박수를 치고 있던 연하가 스크린에 잡힌 백야의 얼굴을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쟤 이마에 뭐야?”
격한 오프닝 무대에 신인상까지. 2연타를 맞고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원래 맹한 건지. 이마에 휴지를 붙이고 나타난 후배 덕에 공연장의 함성이 더 커졌다.
“축하드립니다.”
트로피를 건네며 백야를 힐끔대는 시상자에 민성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따라갔다.
그린 라이트 절대 안 돼!
그러나 그린 라이트는 개뿔. 이마에 휴지를 붙이고 올라온 멤버에 리더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야, 너…!”
눈을 휘둥그레 뜬 그가 상을 받고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멤버를 잡아다 이마에 휴지를 떼 준 일이었다. 아방한 얼굴로 이마를 문질러 본 백야도 눈을 키우며 당황해했다.
‘아악! 이게 뭐야!’
손등에 묻어난 휴지 때를 본 개복치는 얼른 뒷자리로 빠졌다. 앞발로 이마를 털어 내는 모습이 멤버들 사이로 보였다.
분명 무대에 올라오기 전 남경도, 덕진도, 청도 제 얼굴을 봤던 것 같은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다니!
백야가 배신감에 부들거렸다. 그사이 마이크 앞에 선 민성은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술을 뗐다.
“어…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우선 정말 감사합니다.”
꿈에서 수상 소감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이 현실인 듯 그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아! 저희 다 같이 인사를 못 드렸는데 지금이라도.”
멤버들에게 빠르게 눈짓한 그가 선창하자 데이즈가 따라서 팀 구호를 외쳤다.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엉망진창인 소감에 관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님들 그리고 동료 가수분들과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의미 있는 상까지 받게 돼서 너무 기쁩니다.”
그 뒤로도 차례대로 돌아가며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하는 데이즈가 되겠다. 뒤에서 저희를 위해 고생해주시는 스텝과 회사 분들께 감사한다는 소감을 이어 나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멤버는 백야. 민성이 뒤에 숨어 있던 백야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당혹으로 물든 눈이 민성과 마주쳤다.
‘나는 안 해도 되는데…!’
개복치의 속셈을 모를 리 없는 민성이 마이크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그냥 나이트 여러분 감사하다고 한마디만 해.”
그 말에 우물쭈물하던 백야가 앞을 힐끔거리며 겨우 말을 뱉어냈다.
“나, 나잉이 여러분 감사합니다.”
백야가 급하게 고개를 꾸벅이자 잔잔하게 깔리던 배경음악이 커지며 다음 시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곧장 가수석으로 돌아왔다.
함께 후보에 올랐던 신인 가수들과 BB9, 그리고 에임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축하해 주었다. 특히 구양은 백야를 가리키며 웃음을 참지 못했는데.
“휴지! 아주 인상적이었어!”
“제발 모른 척 해 주세요….”
식스에이엠은 무대를 준비하러 갔는지 자리가 비어있었다.
“어디 가? 그냥 여기 앉아.”
연하가 백야의 팔을 잡아 세웠다. 사실 가수석은 딱히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연차가 낮은 후배들이 눈치껏 뒷자리에 앉았을 뿐, 비어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는 좀….’
처음 생긴 남자 후배라 그런가 에임은 데이즈를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구석으로 가려는 멤버들을 붙잡아 바로 뒷줄 빈자리에 앉혔으니 말이다.
‘부담스럽다.’
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대포존에 고개 숙인 백야가 입술을 못살게 굴었다.
* * *
- 오늘 자 유연 시상식 미모. 웬 빨간 망토가 서 있길래 난 걸그룹인 줄
- 데이즈 신인상 축하해♡
- 상 받으러 이마에 휴지 붙이고 올라온 신인ㅋㅋㅋㅋ (이마에 휴지 붙은 백야 사진.jpg)
└ 쟤 얘 아님?ㅋㅋㅋㅋㅋ (가수석에서 몰래 볼 꼬집고 있는 백야현상 프리뷰.jpg)
└ 아 미친 XX 귀엽네
└ 상 받을 줄 몰랐나 봐ㅋㅋㅋ
- 고양이 결계에 갇힌 먹이 참새 (좌 지한 우 연하 사이에 앉아있는 백야 사진.jpg)
- 신인상 남자 수상 소감 귀엽더라 신인 티 팍팍 남ㅋㅋㅋ 근데 팬클럽 이름이 나잉이야?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