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홍콩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직장인 나대리. 퇴근한 뱁쌔는 케이블 채널의 시상식 생중계를 보며 맥주를 깠다.
“저게 다 홍콩 사람은 아닐 텐데.”
화면에 잡히는 팬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했다. 에임이나 소년천하, 로즈데이가 한 번씩 잡힐 때마다 함성이 엄청난 걸 보면 필시 한국인이 반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왜 홍콩에서 하고 난리냐고.”
안 그래도 예쁘지 않은 날이 없는 최애는 오늘따라 눈물 나게 예뻐서 유달리 배가 아팠다.
“나잉이라니… 나잉이….”
알딸딸한 상태로 핸드폰 속 백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뱁쌔.
긴장한 나머지 팬클럽 명인 나이트를 나잉이라 말하고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던데. 백야의 말실수는 현재 나이트들 사이에서 화제였다.
- 나잉이라니 미친 나 대가리 깬다 백야야
- 옆집 맠둥이 같은 뭐 그런 건가
- 나 김나잉! 다른 팬클럽에서 스카우트가 와도 절대 거들떠보지 않겠습니다! (선서 짤.jpg)
뱁쌔의 타임라인이 온갖 선서 짤로 난무했다. 그녀도 얼른 사진 한 장을 구해 와 글을 작성했다.
- 나나잉.. 백생백사 (선서 짤.jpg)
대충 백야에 살고 백야에 죽겠다는 엄청난 포부였다.
그사이 체감 1시간짜리 광고가 끝나고 화면은 다시 현장을 비췄다. 뱁쌔의 작은 복숭아는 여전히 지한과 연하 사이에 앉아 있었다.
“하……. 귀여운 놈.”
비틀거리며 티비 앞으로 다가간 뱁쌔가 화면 속 백야를 확대해 찍었다. 그러자 옆에서 한심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쇼를 해라.”
“아 뭐. 그러는 엄마도 임영운인가 트로트 좋아하잖아. 저번에 티비 앞에서 사진 찍는 거 봤음.”
이럴 시간에 밖에 나가서 남자 친구나 만들어 오라는 잔소리를 시전하려던 뱁쌔맘. 이게 다 엄마를 보고 배운 거라는 말에 그녀의 어멈은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거실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된 뱁쌔는 소파에 누워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미리 입수한 큐시트에 따르면 데이즈는 1부 오프닝 이후 쭉 가수석에 있다가, 2부 두 번째 순서에 한 번 더 등장할 예정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1부 무대를 세어보던 뱁쌔. 팬석을 비추는 카메라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이즈가 작게 잡혔다.
“어? 뭐야, 내 새끼 어디가?”
무대 아래로 사라진 데이즈에 뱁쌔가 SNS를 얼른 새로 고쳤다.
- 애들 무대준비 하러 가나 보다!
- 선배 그룹은 가수석에 있는데? 데이즈 끼워팔기라며ㅋㅋㅋㅋ 우리 애들 욕 왜 먹음? 개 어이없네
소문만 무성하던 에임과 데이즈의 콜라보 무대가 드디어 공개를 앞두고 있었다.
* * *
걸크러쉬 파워를 보여 주며 2부 무대를 힘차게 시작한 글래시. 무대는 끝났지만 곧장 시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조명은 더 어두워졌고 이내 스크린 가득 한 영상이 재생됐다.
[A.I.M. X DASE]
[Remastering Project]
헤드셋을 낀 청이 녹음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악보대 위에 놓인 가사지 위로 연필을 끄적이는 막내.
정면 카메라로 바뀌며 익숙한 반주가 흘러나오자 그가 나레이션을 시작했다.
- Ice in my veins
Like walking dead
I am the monster
컷이 바뀌며 대환이 등장했다. 처음 공개되는 대환의 작업실에 에임 팬들의 함성이 크게 울렸다.
“마지막 부분 호흡이 조금 빠르다. 그 부분만 신경 써서 다시 해볼래?”
“Okay.”
- Ice in my veins
“더블링 갈게요.”
같은 반주가 재생되며 청이 앞서 했던 부분을 여러 번 반복 녹음했다. 컷이 전환되자 이번에는 율무가 녹음실 안에 서 있었다.
- 아무도 나를 쳐다볼 수 없어
총명을 잃은 내 눈동,
“저 가사 틀렸어요.”
카메라 너머에 있을 대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해당 파트를 소화한 율무가 녹음실을 나왔다.
“아- 아-.”
목을 풀며 들어오는 분홍 머리. 헤드셋을 낀 백야가 멀뚱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환의 사인을 기다리는 중인 것 같았다.
다른 멤버들보다 조금 더 많은 녹음을 따야 하는 메인보컬.
하고 싶은 파트가 있으면 먼저 해도 된다는 말에 백야는 1절 후렴부터 가겠다 대답했다.
“좋은데 끝이 살짝 밀린 것 같아.”
“넵. 다시 해볼게요.”
- 따스한 온기가 되어준
유일한 구원자
너는 나의 savior
“좋아. 다음 거.”
“넵.”
이어지는 코러스 녹음.
- Ma Heart
WANT ME의 4단 고음 중에서 3.5단 정도에 해당하는 높은음이었지만, 반주가 재생되자 평온한 얼굴로 고음을 쭉 뽑아내는 백야였다.
“후배님.”
“넵. 어… 다시 할까요?”
“아니, 너무 좋다고. 이거 그대로 쓰면 될 것 같아. 나와도 돼.”
칭찬은 개복치도 춤추게 했다. 수줍게 볼을 붉힌 백야가 통통거리며 녹음실을 나왔다.
같은 시각, 유연은 부스 밖에서 가사지를 보며 자신의 파트를 조용히 연습하고 있었는데.
“들어가자.”
“넹.”
악보대에 가사지를 올린 그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보조개를 짓고 있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얼굴이었다.
“노래가 너무 높아요.”
하지만 반주가 나오자 곧잘 소화해내는 유연이었다.
이어서 등장한 멤버는 민성.
“바로 갈게.”
“넵.”
백야와 같은 후렴을 맡은 그도 힘들이지 않고 녹음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멤버는 지한.
- 탁한 공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정확한 발음으로 귀에 꽂히는 낮은 목소리. 특정 부분의 가사를 조금만 더 씹듯이 불러볼 수 있냐는 디렉팅에 지한의 녹음 장면이 몇 차례 반복됐다.
“수고했어.”
데이즈의 녹음이 모두 끝나고 홀로 남겨진 대환. 곡 작업에 집중하던 그는 갈증을 느끼고 물을 집었지만 빈 통이었다.
“언제 다 마셨지.”
핸드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작업실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덜커덕덜커덕-.
바깥에서 문고리를 강제로 돌리려는 소리가 들렸다. 도어락이 없었다면 이미 열렸을지도 모르는 문. 유리 위로 붙은 불투명한 시트지 너머로 대여섯 명의 인영이 느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에 대환이 문에서 멀어졌다.
띠링.
마침 그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도망가세요]
민성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쿵!
소리에 놀란 대환이 고개를 들자 유리문 위로 피 묻은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뒷걸음질 치던 대환이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아.”
가까스로 장비 위를 짚으며 균형을 잡은 대환. 손바닥에 눌린 기계 장치가 천천히 클로즈업됐다.
지직거리는 스피커 소리. 이내 스튜디오 안으로 비바의 ‘Walking Dead’가 흘러나오며 영상은 끝났다.
[Festival of the Dead]
죽은 자들의 축제.
시상식 2부의 두 번째 공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 * *
- 엥? 이거 완전 옛날 노래잖아ㅋㅋㅋ 나 초딩 때 나온 거 같은데
- 갑자기 좀비요?
- 누가 대환이한테 연기 시켰냐ㅋㅋㅋㅋ 형들한테 놀림 받을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다
- 미친 이 노래 추억이네...
- 그냥 레코딩 비하인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VCR이었다고 한다
- 우리 애 연기 8년 만에 보는 거라 눈물ㅠㅠㅠ
- 가사 완전 옛날 감성ㅋㅋㅋ
- 이거 데이즈 신곡이에요?!
“와아악! 백야야! 데이즈!”
아직 공식 응원봉이 없는 관계로 복쑹은 슬로건을 열심히 흔들었고, 대환의 참여로 시윤뷘도 무대에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ID 팬덤 대통합의 현장.
VCR만으로 달아오른 분위기는 데이즈가 무대 위로 등장하자 더욱 뜨거워졌다.
핏자국이 낭자한 헝클어진 셔츠. 군데군데 찢어져 성치 않은 의상이었으나 그중 율무와 유연의 의상은 유독 뜯긴 정도가 심했다.
얼굴과 목, 드러난 팔뚝 위로 좀비를 연상시키는 상처 분장이 현실감 있었다.
“흐어엉. 안 돼, 애들 너무 아파 보이잖아.”
칼에 베인 듯 눈 아래부터 뺨까지 길게 그어진 선명한 빨간 줄. 조각 같은 청의 얼굴에 난 상처에 복쑹의 억장이 무너졌다.
“컨셉 미쳤네.”
기껏해야 에임의 커버 댄스나 출 줄 알았는데 예상을 벗어난 스케일에 시윤뷘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셔츠의 아랫부분이 거의 난도질 당해 크롭티나 다름없는 유연의 의상이 시선을 강탈해갔는데.
“쟤 진짜 배 뚫린 거 아니야…?”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영혼을 갈아 넣은 가짜 상처는 이렇듯 수많은 과몰입러를 양산하고 있었다.
- Ice in my veins
Like walking dead
I am the monster
센터에 우뚝 서 있는 청과, 그의 감미로운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데이즈의 ‘Walking Dead’. 요즘 트렌드와는 맞지 않는 도입부였지만, 대환은 원곡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 했다.
가창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청은 충분히 훌륭한 보컬이었고, 무엇보다 그의 유창한 발음과 음색이라면 반주를 다 빼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고 소위 말하는 옛날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다.
- 아무도 나를 쳐다볼 수 없어
총명을 잃은 내 눈동자
차갑게 식은 heart
반주가 나오자 데이즈는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였다. 나레이션을 한 청이 쓰러지듯 뒤로 넘어가자, 율무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인트로를 불렀다.
리마스터링 프로젝트의 퍼포먼스 담당은 압구정 호랭이. 기존 안무를 그대로 쓸 줄 알았는데 그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유연은 두 사람의 아래에서 등을 받치고 있었는데, 율무의 동작에 맞춰 청의 등을 밀어 올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
심장을 꿰뚫린 듯 청의 가슴이 뒤로 젖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