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 사랑도 꿈도 멈춰 버린 세계
싸늘한 시선 나를 할퀴어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이어지는 유연의 파트. 유연을 에워싼 멤버들이 팔과 다리를 잡아 그의 몸을 감쌌다.
가장자리에 있던 백야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손을 잡아당기자 멤버들이 힘없이 흩어졌다.
- 따스한 온기가 되어준
유일한 구원자
너는 나의 savior
백야의 음색 뒤로 겹겹이 쌓인 다섯 명의 아카펠라. 잔잔하게 깔리던 반주가 뮤트되며 오직 여섯 명의 하모니로만 전개되는 후렴구가 이어졌다.
이처럼 대환의 파격적인 곡 해석은 대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 탁한 공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나는 차갑게 식어 버린 cadaver
내게 숨을 불어 넣어 savior
후렴 파트가 끝나자 2절로 넘어가며 지한이 센터로 나왔다. 짙은 눈화장과 콧잔등의 선명한 상처, 헝클어진 머리.
모두 흰색 렌즈를 낀 반면 그의 한쪽 눈은 유일한 붉은색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좀비화되지 않은 인간의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로, 그는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는 원곡에 없던 랩 파트를 추가하며 대환이 특별히 요청한 사항이었다.
좀비화가 진행된 쪽의 눈을 가린 지한이 비틀거리며 무대의 끝으로 향했다.
-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어
깊숙이 버려진 내 존재
지한의 랩을 받아 청이 앞으로 치고 나왔다. 센터에 선 그를 중심으로 좌우로 퍼진 멤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대형을 바꿨다.
- 따스한 온기가 되어준
유일한 구원자
너는 나의 savior
2절의 후렴.
이번에는 민성의 보컬을 메인으로 아카펠라가 깔렸다. 상당히 높은 음이었음에도 민성은 파트를 곧잘 소화해냈다. 사실 백야의 성량이 압도적이라 가려졌던 것뿐이지 민성의 보컬도 못지않게 훌륭했다.
후렴이 끝남과 동시에 유연과 율무의 파트가 이어졌다.
- 내 마음의 ca ca ca cave
벗어나고 싶어
- 답답한 ca ca ca cage
도망치고 싶어
격한 안무에 더 헝클어진 차림의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선 채 안무를 이어 갔다. 갑자기 클로즈업 되는 상반신에 관객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들렸다.
- Ma heart
이제는 데이즈의 무대에서 나오지 않으면 섭섭한 백야의 고음 구간. 빠르게 움직이는 멤버들 옆으로 홀로 멈춰선 백야가 애드리브를 내질렀다. 콧잔등을 찡그린 얼굴이 화면에 잡히자 대환이 흡족해했다.
컨셉이 컨셉인 만큼, 오늘은 힘든 척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백야는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구겨진 얼굴과 달리 목에 핏대 하나 서지 않는 건 좀 이상해 보였지만, 소리가 그냥 나온다는데 어쩌겠나.
- 휘몰아치는 폭풍의 언덕
너머의 Utopia
처음과 같은 대형으로 돌아온 청이 다시 센터에 서 있었다. 곡의 마지막 소절을 부르며 처연하게 고개 숙이자 멤버들이 그의 주변을 둥글게 감쌌다.
반주가 완전히 멎을 때쯤 데이즈가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에임과 데이즈의 콜라보 무대는 대성공이었다.
* * *
‘해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백야가 바닥을 짚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지막에 너무 세게 앉아서 무릎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백야는 이대로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일어나. 내려가자.”
민성이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막내들을 챙겼다. 이제는 진짜 좀비가 되어 버린 햄스터가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으어어… 죽을 거 같아….”
“응. 안 죽어.”
민성은 가끔 이상한 데서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그때 눈앞에 상태창 나타났다.
[<연예인의 연예인(5)> 완료!]
최근 들어 자주 뜨는 퀘스트 알림이었는데 덕분에 모이는 스타 포인트가 은근히 쏠쏠했다.
무대도 다 끝났고 뜻밖의 포인트도 얻었다.
기분이 좋아진 백야가 실실거리자 민성이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이미 뜬 상태창 위로 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이벤트 : 계단 주의]
“엥?”
처음 보는 유형의 알림에 백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벤트? 갑자기 웬 친절.’
레어랍시고 개복치 같은 거 줄 때는 언제고 오지랖이 아주 태평양 같았다. 무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어둡긴 하지만 처음 밟아 보는 것도 아니라 새삼스럽기까지 했다.
‘뭐 어쩌라고.’
콧방귀를 낀 개복치가 대수롭지 않아 하며 걸음을 내딛는데, 순간 수십 개의 반투명한 창이 시야를 뒤덮었다.
[Error : 이벤트]
눈 깜빡할 사이 앞을 가려 버린 상태창에 백야가 발을 헛디디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갹!”
“Oh my god! 햄스터!”
마지막 한 칸을 남겨 두고 어이없게 넘어진 멤버에 다들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괘, 괜찮아.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래.”
여전히 시야를 가린 창에 백야가 눈을 비볐다. 찔끔 고인 눈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운다고?”
“안 울거든!”
당황스러워하는 민성의 목소리에 백야가 발끈했다. 꼬리뼈가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쪽팔려서 티 내지도 못했다. 그저 고통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 망할 시스템!’
갑자기 앞을 가려 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멤버들만큼이나 놀란 백야가 분함에 씩씩거렸다.
“일어나.”
유연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닿자 상태창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시야를 되찾은 백야가 멤버들의 얼굴을 바로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큰일 날 뻔했다. 그치.”
“웃음이 나오냐? 너 다리에 힘 풀렸지. 엄청 긴장한 것 같더라니.”
이때다 싶어 핀잔을 주는 유연에 백야가 시큰둥한 얼굴로 손을 잡았다. 그런데 힘을 주며 일어서려던 순간 통증이 느껴졌다.
“아.”
백야는 반사적으로 손을 놓아 버렸다. 일어나다 말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백야에 지켜보던 멤버들의 표정도 순식간에 굳었다.
“…에이, 설마~”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에 율무가 애써 미소 지었다. 그사이 자기 힘으로 일어난 백야는 굳은 얼굴로 통증을 느낀 쪽의 손목을 살며시 돌려보는데.
“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이, 이게 왜 아프지…?”
부상자가 건강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이상한 상황.
“햄스터! 너 죽을 뻔했어!”
청이 걱정하는 얼굴로 다그쳤다.
“…죽어?”
저번부터 자꾸 불길한 소리를 해대는 청에 이번에도 발끈하려던 백야가 주춤했다.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콘서트장에서 사고로 사망, 교통사고로 사망, 뭐 이런 리뷰를 본 기억이 났다.
‘혹시 이거… 시스템의 암살 시도였나.’
뒤늦은 깨달음에 개복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계단을 돌아보자 높이가 꽤 됐다. 상태창이 조금만 빨리 떴더라면 이마 정도는 가볍게 깨졌을 높이.
초심자의 행운으로 이 정도에서 그친 걸지도 모르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이벤트라며!’
이벤트라 함은 대개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나?
이런 이벤트는 전혀 달갑지 않다며 기분 나빠하는데, 마침 보상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벤트 완료!]
[이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0 스타 포인트]
‘그래도 포인트는 주는… 응?’
0 스타 포인트?
백야는 제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눈을 끔뻑이다 가늘게 떴다.
[0 스타 포인트]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이게 병 주고 병 주나 지금!’
암살 시도를 이벤트로 위장한 것도 모자라 포인트로 저를 농락하기까지 하다니!
죽이려는 시스템과 살려고 발버둥 치는 개복치의 싸움이 시작됐다.
“하! 어이없어.”
“아야.”
“뭘 잘했다고 구시렁거려. 이리 내. 부러진 거 아니야?”
다가온 민성이 백야의 이마 위로 딱밤을 튕겼다. 팔을 잡아든 그는 백야의 손목을 조심스레 돌리며 상태를 살폈다.
“안 아파?”
“괜찮아. 안 부러졌으면 됐지 뭐.”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 욱신거리던 통증도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분노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랐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0포인트? 내가 너 가만 안 둬.’
* * *
- 연말 데이즈는 무대를 찢어... (워킹데드 무대 엔딩 사진.jpg)
- 데이즈 신인 딱지 뗐으니까 내년부터 대상 쓸어 담을 듯. 올해 대상 에임 > 내년 데이즈. ID 세대교체 성공적ㅋㅋㅋ
└ 한 줌 팬덤 뇌절 작작 좀
- 워킹데드 활동 안 한다고? 진짜 음원 안 내준다고? 그럴 거면 무대를 그렇게 고퀄로 뽑지나 말던가 망할 놈들아ㅠㅠㅠ
- 이거는 말도 안 됨. 이게 동일 인물일 수가 있나? (워킹데드 백야/ 연습실 백야.jpg)
└ 좀비 백야랑 아가 복숭
- 워킹데드 지금 너튜브 인기 동영상 1위. 얘네가 4세대 남돌 탑 먹을 듯
└ JAMA 나오고 반응 개 좋아
└ 음원 떡상 중! 작년에 발매한 데뷔곡 진짜 좀비 돼서 지금 차트인 함
- ID 뭐해? 물 들어올 때 빨리 노 젓자. 애들 컴백 시켜
- 애들 한국 왔다!!!
나갈 때만큼이나 난리 통 속에서 귀국한 데이즈.
원래라면 곧장 회사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멤버 하나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데이즈는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이게 됐다.
“…죄송해요.”
“됐어, 이미 다친 걸 어쩌겠냐. 다음부터는 조심해. 그만하길 다행이지.”
남경의 눈이 깁스를 한 백야의 손가락을 향했다.
눈치를 보느라 숙어진 고개. 꼼지락거리는 손. 그러나 오른손의 가운뎃손가락만큼은 꼿꼿했다.
“하필 다쳐도…. 진짜 유연이랑 치고받은 거 아니지?”
“아니에요. 그리고 싸웠으면 한유연 지금 멀쩡히 못 걸어 다니죠.”
“퍽이나 그랬겠다.”
백야가 등 뒤로 손을 숨기며 너스레를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