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식스에이엠 임진각 가네.”
명단에는 백야도 익히 아는 그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건 좋은데 작년보다 따뜻한 온도는 아쉬웠다.
‘역대급 한파가 불어서 서 있기만 해도 이가 딱딱 부딪혀야 하는데.’
속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너 또 이상한 생각 하지.”
그를 눈치챈 유연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속셈을 파악하려 들었다.
“아닌데?”
금일이면 몰라도 쟤는 하랑이 놈이랑 친하니까 말할 수 없었다.
하랑과 멤버들의 사이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백야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또?”
“당근, 아니 당연하지.”
최근 청의 어설픈 한국어가 입에 붙어 버린 백야는 말하면서도 놀랐는지 도리질을 쳤다.
쟤는 영어라도 잘하지. 한국어밖에 할 줄 모르는 백야는 방심하는 순간 0개 국어 확정이었다.
“청청을 조심, 아니! 자꾸 날 떠보려 하지 마!”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됐고! 나 연습해야 해. 청이랑 놀아.”
백야는 이어폰을 꽂고 안무 영상에 집중했다.
앞으로 남은 시상식은 세 개. 데이즈는 S사를 제외한 모든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는 쾌거를 이뤘다.
덕분에 백야의 퀘스트는 절반 넘게 달성한 상태였다.
‘이제 하나만 더 받으면 돼.’
이런 흐름이라면 M사에서도 데이즈가 무난히 신인상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퀘스트가 떴을 때보단 여유를 많이 되찾은 백야. 적어도 그에게서 초조해하는 기색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아주 그냥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햄스터 또 봐? 저거 랜덤 플레이 댄스 연습하는 게 틀림없다. 우리도 하자!”
유연이랑 놀라는 말에 관심을 보이던 청이 오히려 자극만 받아 갔다. 안무 영상에 집중한 막내즈를 민성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짜식들. 내일이면 한 살 더 먹는다고 기특해진 것 좀 봐.”
이게 바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인가.
망아지 같은 청도 얌전하게 만드는 천재 조련사에게 고급 초콜릿이 내밀어졌다.
“뭐야?”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회사로부터 백야를 살찌우라는 특명을 받은 리더가 야심차게 준비한 햄스터 전용 츄르!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포장지에 백야가 이어폰을 빼며 관심을 보였다.
“너 이거 못 먹어 봤지?”
봄 감자 찔러주는 점순이 재질의 민성이 말을 걸었다. 백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성이 너만 먹으라며 주머니에 초콜릿을 한 주먹 넣어주었다.
“근데 왜 나만 줘?”
“쉿!”
저 하이에나 같은 놈들한테 걸리면 골치 아파진다며 리더가 목소리를 낮췄다. 백야를 제외한 멤버들은 지금 엄격한 식단 관리 중이었다.
“너만 먹어. 너만. 알겠어?”
방금 준 거는 오늘 네가 먹어 치워야 하는 할당량이라며 민성이 거듭 반복했다.
그 사이 공연장에 도착한 데이즈. 대기실로 향하자 익숙한 얼굴이 멤버들을 반겼다.
“왔냐~”
율무가 소파에 기대듯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M사의 스페셜 무대 멤버인 그는 사전녹화를 위해 덕진과 먼저 공연장으로 출발했다.
“녹화는 잘했고?”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민성의 말에 율무가 허세를 부리며 답했다. 그러자 리더가 득달같이 달려가 허벅지를 찰싹 내려쳤다.
“아! 뭔데. 갑자기 왜 때려?”
“겸손, 겸손! 인간아 겸손!”
겨우 1년짜리가 방송국이 벌써 편해졌냐며 잔소리하자 율무가 몸을 바로 세우며 진지한 낯을 했다.
“방금 내가 그렇게 건방졌어?”
“조금?”
유연의 대답이 충격적인지 율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럴 수가….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중대장님?
백야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입만 열면 실망하던 그분과 율무가 겹쳐 보였다.
소름이 끼친 개복치가 몸을 떨자 옆에 있던 청이 코를 훌쩍거리며 물었다.
“Are you cold?”
어차피 차로 이동한다며 외투를 팽개치고 다니더니. 캘리포니아 보이는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의 추위를 무시하지 말라니까는….
“뭐라는 거야 이 외국인이.”
“Cold! 춥다!”
“너 춥다고?”
평소라면 이 정도의 대화는 무리 없이 가능했겠으나, 그의 코 맹맹한 소리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그러게, 옷을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지….”
안타까워하는 건지 한심해하는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의 개복치가 청을 바라봤다. 함께 있던 청은 대화가 통하지 않자 답답하다며 가슴을 쳐 댔다.
“됐다! 지금은 너랑 안 놀아.”
일시적 절교 선언을 한 청이 율무에게로 가려 했다. 그러자 백야가 청의 후드를 잡아당기며 서둘러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청에게 건넸다.
“이거라도 입어.”
“이걸 왜 날 주나?”
“춥다며, 입어.”
“내가 언제 추워? 그리고 이거 작아서 안 맞아.”
선의를 베풀었지만 팩트로 두드려 맞은 백야가 비척거리며 소파로 향했다. 지한의 옆자리에 꾸깃 구겨진 개복치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나 쟤랑 안 놀아.”
무슨 일인가 싶어 청을 보지만 그도 이유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청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국 제스처를 할 뿐이었다.
“애들아 옷 갈아입어. 얼른 입고 대기실도 한 바퀴 돌아야지.”
“네~”
잠시 후 남경이 스텝들과 함께 돌아왔다. 막간을 이용해 쉬는 시간을 가졌던 데이즈는 준비를 서둘렀다.
* * *
- 제발!! 남자 아이돌한테 멜빵 좀 입히지마! 귀여워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ㅠㅠㅠ
└ 분홍 머리 컨셉 소화력 미쳤쥬
└ 헤어밴드에 멜빵 조합 너무 천재적
- 카메라 워킹부터 유연이 어깨 미모 춤 시선 헤어밴드까지 미쳤음. 센터 장악력 무슨 일이야;;
- 내 작고 소듕한 인간 키링 (백야 사진.jpg)
- 다 좋은데 구멍이 하나 있네. 고양이 닮은애 뭐야;; 완전 황홀
“전 출연진 무대 위로 올라갈게요!”
새해를 몇 분 남기지 않은 시간.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스무 팀가량의 가수들이 스텝의 안내에 따라 무대 위로 올라갔다.
본무대는 물론 율무의 스페셜 스테이지까지 무사히 마친 데이즈는 들뜬 얼굴로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5!
이원 생중계로 진행되는 방송에 임진각에 나가 있는 MC와 가수들의 모습이 전광판 위로 보였다.
하랑을 발견한 백야가 흐린 눈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4!
“벌써 두 번째 새해 카운트다운인가? 10년 20년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민성이 멤버들을 챙기며 곁에 있던 지한과 청의 어깨 위로 팔을 둘렀다. 키가 큰 동생들의 어깨가 비스듬히 기울었으나 민성은 팔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3!
“당백이 진짜 으른 된 기념으로 형한테 술 배워야지~”
“뭐래. 나 술 안 마셔. 그리고 이상하게 좀 부르지 마. 개 이름 같다고 그거.”
“당도 백 프로! 줄여서 당백이.”
인생 1년 선배로서 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율무를 개복치가 철벽 방어하고 있었다.
“얘 알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유연이 확신에 찬 얼굴로 백야를 약 올렸다.
“아니거든? 나도 모르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너는 못 마시게 생겼어.”
관상은 사이언스라는 명언까지 인용하며 유연이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리고 해당 발언은 백야의 자존심을 단단히 건드렸다.
2!
“내가 너보다 셀걸?!”
“내기할래?”
“어! 해!”
사기꾼의 낚시에 걸려 버린 개복치가 승부욕으로 팔딱거렸다.
1!
“애들아, 데뷔 1주년 축하하고.”
민성이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올해도 잘 부탁한다! 우리 열심히 해보자!”
새해를 알리는 꽃가루 폭죽과 함께 민성의 목소리가 크게 퍼졌다. 요란한 분위기 때문에 금방 묻혀 버렸지만, 곁에 있던 멤버들에게만큼은 선명히 들렸다.
“나도 잘 부탁해.”
미소를 머금은 백야가 멤버들을 눈에 담았다.
“Happy new year!”
“청, 옆에 사람 있어.”
민성의 어깨를 흔들며 신남을 주체 못 하는 막내에 지한이 손을 뻗었다. 제법 반경이 큰 동작에 옆 사람에게 피해가 갈까 민성이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새해 복 많이 받자~”
“너도 많이 받아라.”
백야의 어깨에 팔을 걸친 율무가 덕담을 건넸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우리 데뷔 일 좀 멋진 거 같아.”
유연은 뿌듯한 얼굴로 떨어지는 꽃가루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어땠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굉장히 춥고, 하얗고, 손바닥이 아팠다 정도?
멤버 모두가 긴장해서 박수만 치다 내려갔던 것 같은데.
백야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동료와 인사를 나누는 가수들이 보였다.
‘그래도 한차례 고비를 넘겨서 그런가, 마음은 홀가분하네.’
사람의 여유는 돈에서 나온다 그랬던가. 백야의 여유는 퀘스트에서 나왔다.
[<천재 아이돌(1)> 완료!]
조금 전 신인상 수상과 함께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
전생이라고 해야 하나 동기화 전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백야가 알고 있기론 데이즈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제법 소문난 망돌이었던지라 신인상을 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많았다.
‘뭐 아는 게 있어야지.’
미래에서 왔지만 미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는 모든 순간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백도 또 멍때리네. 내려가자.”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유연이 백야의 등을 툭 건드렸다.
‘애초에 저런 얼굴로 망돌이 됐다는 것부터가 이해되진 않지만.’
노래가 구렸나? 아니면 컨셉?
여전히 알다가도 모를 아이돌의 세계였으나, 아직까지는 순조로운 것 같으니 백야는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시상식은 이제 소년천하와 에임의 무대, 그리고 대상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