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너 일부러 멕이는 거지.”
“나 아무거도 안 먹었어.”
알아들었지만 모르쇠로 일관한 청이 백야를 잡아끌었다. 활짝 열려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지 않던 세 사람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여기야 우리 방!”
“뭐라는 거야. 누구 마음대로 여기가 네 방이야.”
바닥에 깔린 네 장의 포스트잇. 그 위로 유연이 큼지막하게 숫자를 적으며 청을 타박했다.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어!”
“공평하게 해야지. 무조건 뽑기야. 그리고 백도는 너랑 같은 방 쓰기 싫다 그럴걸?”
이미 한 차례 거절을 당한 청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어떻게 알았느냐 물었다.
“뻔하지 뭐.”
독방을 놔두고 누가 두 명 방을 쓰고 싶겠냐는 뜻이었지만, 유연은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의 말을 오해한 청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율무에게 갔다.
“너 싫다는 말 아니야. 알지?”
“몰라. 상처.”
청이 상처받았다며 율무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백야는 그런 게 아니라며 해명을 해 보지만, 대답을 영어로 일관하는 바람에 초반의 몇 마디를 제외하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어설픈 한국어가 아니라 그런가. 갑자기 낮아진 톤과 180도 바뀐 분위기 때문에 백야는 조금 난감해졌다. 거기다 하필이면 청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오를 건 또 뭐란 말인가.
「나 미국에서 everyday 혼자였는데 한국 와서 좋아! 형이랑 율무랑 같은 방도 좋고 다 같이 사는 거도 좋아!」
“하……. 알겠어. 방 같이 쓰자. 나랑 같은 방 해.”
결국 마음 약한 개복치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율무의 등에 이마를 박은 채 슬픈 척 연기 하던 청은 같은 방을 쓰자는 백야의 말에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진짜?”
백야는 새끼 늑대의 연기에 당하고 말았다.
“그래, 진짜.”
그곳이 자신의 무덤인 줄도 모르고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햄스터 한 마리. 보다 못한 지한이 포스트잇을 챙기며 백야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안 돼. 무조건 뽑기로 정할 거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제일 크고 좋은 방에 숫자 1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1번이랑 2번 방은 제일 크니까 두 명씩 쓰고, 나머지 3번이랑 4번 방 걸리는 사람은 혼자 써.”
“역시 지한이~ 정리가 아주 깔끔하다.”
율무가 아직도 기대고 있는 청을 반동으로 튕겨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왁! 뒤에 나 있는데!”
“아이고. 아직도 거기 있었어?”
“너 일부러 그랬어!”
“눈치도 빠르네, 우리 청이는~”
율무가 청을 약 올리면서 히죽거렸다. 그러다 백야와 눈이 마주치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변했다.
“형은 당백이 네가 너무 걱정된달까…?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거 사 준다 그래도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알지?”
“뭐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나와.”
그러나 율무에게만은 단호한 백야가 그의 가슴을 툭 치며 먼저 방을 나섰다.
* * *
방을 나누는 방법은 간단했다.
“1이랑 2는 같은 번호를 뽑은 사람끼리 룸메이트가 되는 거야. 이해 못 한 사람.”
“없어요~”
지한의 주도 아래 진행되는 데이즈의 룸메이트 정하기. 율무가 열렬히 호응했다.
숫자가 적힌 종이를 꼬깃꼬깃하게 접어 냄비에 넣은 지한이 멤버들을 둘러봤다.
“누구부터 뽑을래?”
“저요!”
유연이 손을 번쩍 들었다.
먼저 뽑는 것에 찬성한 멤버들이 그의 행동을 주목했다. 지한이 뚜껑을 살짝 들추며 앞으로 내밀었다.
손만 넣어 냄비 안을 한 번 더 휘저은 유연은 하나를 꺼내 얼른 손안에 감췄다.
“어떻게 해? 있다가 같이 볼까, 아니면 지금 나만 확인해?”
이런 뽑기는 할 때마다 떨린다며 유연이 심호흡했다. 그때 백야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의견을 제시했다.
“뽑은 사람이 확인하고 방에 들어가 있는 건 어때?”
대신 비밀 유지를 위해 방에 들어갈 동안 저희는 눈을 감고 있자며 얼른 덧붙였다.
“좋아. 그렇게 하자.”
지한이 찬성하자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연이 구석진 곳으로 가 종이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독방이야?”
“비밀이야.”
민성이 유연을 떠보려 들었다. 그러나 두 볼에 보조개를 지은 그는 얼른 눈을 감으라 재촉할 뿐이었다.
유연은 발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니 노래를 틀겠다며 핸드폰을 남겨두고 떠났다. 숙소에 데이즈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한 사람씩 떠나고 어느덧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멤버. 지한이 백야의 앞으로 냄비를 내밀었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각각 하나씩 남아있는 포스트잇. 두 개 중 어느 걸 뽑을까 고민하던 백야가 지한을 쳐다봤다.
“너 먼저 할래? 나 못 뽑겠어.”
백야의 결정장애를 익히 아는 지한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망설임 없이 노란색을 뽑은 그가 종이를 확인하려 하자 백야가 얼른 뒤돌아 눈을 감았다.
“봤어?”
“응. 10초만 세고 너도 바로 확인해.”
지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야가 소리 내 1부터 10까지 초를 세었다.
“9, 10! 나 이제 확인한다!”
백야가 텅 빈 거실에서 외로이 소리쳤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남은 포스트잇을 집어 든 백야가 제발 3이나 4가 적혀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며 종이를 펼쳤다.
[1]
“에잇!”
그럼 그렇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은 백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번은 청이 찜해 놨다며 저를 끌고 들어간 그 방이었다. 뽑기 때문에라도 독방을 쓰고 싶었는데 역시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는구나.
개복치는 급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이젠 포기할 때도 됐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룸메이트는 조용한 멤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백야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고리에 손을 올리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 진짜야?!”
문이 열리기 무섭게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하이 텐션.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백야는 벌써부터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흐억! 잠까,”
순식간에 어깨를 잡힌 백야는 청의 손에 앞뒤로 흔들리며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중이었다.
“진짜 둘이 됐다고? 야, 청청. 애 죽겠다.”
유연이 청의 손아귀에서 무아지경으로 흔들리는 백야를 구해주었다.
막내즈의 목소리가 워낙 컸던 탓에 근처 방문도 하나둘씩 열리며 나머지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이 됐다고? 진짜로?”
4가 붙어 있는 방문을 열고 나온 율무가 신기한 듯 물었다.
2를 뽑은 멤버는 지한과 민성. 백야는 지한의 룸메이트를 확인하곤 차라리 제가 먼저 뽑을 걸, 하고 속으로 살짝 후회했다.
‘아니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청은 눈치가 없는 편이니까 오히려 율무나 유연과 한방이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만족스러운 룸메이트에 백야가 황급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잘 지내보자.”
“Yes! 나만 믿어!”
믿긴 뭘 믿어 이놈아.
백야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일단 그 텐션부터 좀 낮춰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옛날 옛적부터 동생 갖고 싶었, 헙!”
“그래, 동새… 뭐?”
청도 자신의 말실수를 눈치챘는지 뒤늦게 입을 막아 보지만 백야는 똑똑히 들었다. 눈을 부릅뜬 개복치는 제가 왜 동생이냐며 거세게 반박했다.
왜 다른 멤버들 다 놔두고 저한테만 룸메이트를 하자고 노래를 부르는지 미심쩍었는데. 새끼 늑대의 시커먼 속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너보다 어?! 밥을 어?! 아무튼 많이 먹었어!”
“내, 내가 더 많이 먹어!”
그러나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마이웨이는 가끔 지독하리만치 대화가 안 통하곤 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이야~ 당백이가 찐 막내 하기로 한 거야?”
“아니야!”
“좋아! 햄스터 내가 잘 키운다!”
그저 이 상황이 재밌는지 히죽거리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율무. 백야가 눈을 치켜뜨며 율무를 노려봤다.
“됐어! 키우긴 뭘 키워, 난 이런 취급 견딜 수 없어. 방 다시 뽑아!”
“No! 백야 양아치야?”
“양아, 양아치이? 너 이럴 때만 한국어 잘하더라?”
“Am I?”
찐 막내 방은 시작부터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 * *
남경과 덕진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두 사람은 마트를 털어오기라도 했는지 양손 가득 생활용품과 식자재를 들고 왔는데.
“이게 다 뭐예요?”
백야가 관심을 보이며 장바구니를 뒤적거렸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꺼내 가. 어차피 다 너희 거니까. 냉장고가 비어 있어서 오는 길에 이것저것 사 왔어.”
“잘 먹겠습니다.”
초코우유를 발견한 백야가 눈을 살짝 키우며 손을 뻗었다.
“네가 그거 집을 줄 알았다.”
남경이 피식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른 애들은?”
“민성이 형은 유연이랑 같이 도어락 비밀번호 바꾸고 있고, 율무랑 지한이는 소파에서 자요. 청이는 방 청소.”
“오~ 청이가 웬일이야?”
“제가 이겼거든요.”
한쪽 입꼬리만 올린 백야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겨?”
“그럴 일이 있어요.”
백야가 우유를 원샷했다. 그때 청이 더운 숨을 내쉬며 백야와 남경 앞으로 다가왔다.
“나 다 했어. 확인 요망.”
“벌써? 수고했어. 초코 한잔해.”
웬일로 고분고분한 청이 백야의 옆에 앉아 그가 건네주는 우유를 얌전히 받아 마셨다.
“애가 왜… 갑자기 기가 죽었지? 그리고 그런 고급 어휘는 어디서 배웠어?”
“모. 너튜브.”
삐딱한 말투의 청에 백야가 쓰읍, 숨을 마시며 주의를 줬다. 그러자 청이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린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남경은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청은 손에 쥔 우유갑을 물어뜯으며 몰래 곁눈질로 백야를 흘겨보고 있었다.
지금은 납작 엎드려있지만 저건 분명 복수를 계획하고 때를 노리는 자의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