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콘서트처럼 대충 시간 맞춰서 여유롭게 입장한 다음, 편하게 연예인 구경이나 하다 나오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총대는 뭐고, 도착하자마자 손목에 적어 주는 번호는 무엇이며, 2시간마다 하는 출석 체크는 또 뭐죠.
앞 번호를 받아야 앞줄에 앉을 수 있다는 나라의 성화에 전날 막차에 올라탄 뱁쌔는 긴 새벽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다.
연차가 오래된 가수의 팬클럽부터 입장하는 바람에 뱁쌔와 나라는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뱁쌔 님 화장 안 하세요?”
“제가 아무것도 안 가져와서….”
옆자리에서 아이라인을 그리던 나라가 자신의 파우치를 내밀었다.
“제 거 쓰세요!”
“그럼 저 기름종이 한 장만….”
막차를 타고 만나자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연예인들은 스케줄을 맞추기가 힘드니까 새벽에 녹화하는 줄로만 알았다. 최애를 볼 생각에 꽃단장을 하고 나왔지만, 그녀의 화장은 기름에 먹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의 화장품을 빌려 쓰는 건 내키지 않던 뱁쌔는 기름종이로 밤샘의 고단함만 대충 닦아냈다.
‘한 장은 무리였나….’
이마만 닦았을 뿐인데 반투명해진 종이를 얼른 구겨 버린 뱁쌔가 모르는 척 한 장만 더 빌려주십사 손을 내밀었다. 그때 스텝으로 보이는 몇 명이 데이즈의 이름이 적힌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마음껏 쓰라며 기름종이를 통으로 건네주는 나라 님. 뱁쌔가 받아들며 앞을 가리켰다.
“나라 님 저게 뭘까요?”
“슬로건인가?”
꽃단장에 여념 없던 나잉이들이 고개를 내밀며 스텝의 행동을 주시했다.
“하나씩 뒤로 넘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법 커다란 상자를 열어보니 도시락과 각종 주전부리가 들어 있었다.
“꺅! 이것 좀 보세요!”
나라가 비명을 지르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댔다.
[For my 나잉♡ 와 줘서 고마워요! 열심히 해 볼게요!]
데이즈의 WANT ME 단체 사진 위로 앙증맞은 문구가 적힌 스티커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역조공!’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 같고, 피곤하고, 집에 가고 싶었는데. 도시락에 붙은 스티커 하나에 뱁쌔는 천 년의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스티커를 살살 뜯어 핸드폰 뒷면에 붙인 그녀. 체육관 전체가 술렁이는 걸 보니 다른 팬클럽도 이곳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 * *
‘제3회 설 특집 아이돌 체육대회’의 진행을 맡은 영삼과 아나운서 출신의 MC. 두 사람의 오프닝 멘트와 함께 프로그램 녹화가 시작됐다.
- 아이돌 선수분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파란색 깃발과 함께 등장하는 청팀. 선두에 선 소년천하가 팬석을 향해 손을 흔들자 환호성이 크게 울렸다.
- 이어서 백팀의 입장입니다.
아체대에 참가한 아이돌은 총 스무 팀으로, 청팀과 백팀으로 반씩 나뉘었다. 영삼의 목소리가 울리자 흰색 깃발을 든 율무가 걸음을 내디뎠다.
“출발할게요~”
저지 형태의 운동복은 최근 아이돌을 내세운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협찬을 아낌없이 퍼준다는 브랜드의 신상이었다.
상·하의 색깔이 같은 청팀과 달리 흰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를 입은 백팀. 훌륭한 체격 덕에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선 율무는 국가대표팀 주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긴장했어? 가만히 있질 못하네.”
“팬분들 어디 계시나 궁금해서 둘러본 거야.”
백야가 빼곡하게 채워진 팬석을 힐끔거렸다.
“저기다! 나 찾았어!”
청이 체육관 귀퉁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에임은 거품이지. 언빌리버블!]
[데이즈 이목구비가 내 미래보다 뚜렷하다!]
에임의 현수막과 나란히 붙어있는 데이즈의 현수막이 보였다. 나잉이들을 발견한 백야가 활짝 웃었다.
그 시각 팬석은 저희를 가리키는 청과 이곳을 보며 미소 짓는 멤버들에 소란스러웠다.
“꺄악! 애들이 여기 봤어요!”
흥분해 뱁쌔의 팔을 마구 두드리는 나라 님. 뱁쌔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친… 방금 백야가 저 보면서 웃었어요.”
- 네. 각 팀의 남녀 선수단 대표분들은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단상 위로 네 명의 선수대표단이 올라섰다. 에임 연하의 선창으로 선서가 진행됐다.
“설 특집 아이돌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우리 선수 일동은 다음 경기 규칙을 준수하겠습니다.”
팬 여러분과 시청자분들께 즐거움과 감동을 드리겠다는 다짐을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체육대회가 시작됐다.
첫 번째 종목은 지압 판 제기차기. 데이즈의 출전 멤버는 지한이었다.
“신발 줘. 내가 갖고 있을게.”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경기는 맨발로 진행됐다. 지한의 양말과 신발을 받아 든 백야가 주먹을 움켜쥐며 파이팅 동작을 해 보였다.
“넌 할 수 있어!”
“어디 전쟁 나가냐?”
유연이 백야를 놀리듯 웃었다.
“으……. 난 저거 보기만 해도 아프더라.”
경기장 가운데에 초록색 지압 판이 잔디처럼 깔려있었다. 그를 본 민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 팀의 출전 선수들이 지압 판 위로 하나둘씩 올라섰다. 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몸을 배배 꼬며 넘어지는 바람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도 빨리 가!”
“갈 거야.”
청이 지한의 등을 떠밀며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고 재촉했다. 다른 선수들처럼 우리도 얼른 올라가 발을 적응시키라는 말에 지한도 발을 내디뎠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걸음마다 곡소리를 내는 선수들과 달리 지한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을 찡그린 백야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안 아파?”
“응.”
에X스 침대야 뭐야.
흔들림 없이 편안한 지한의 몸뚱어리에 백야는 당황했다.
‘특훈이 효과가 있긴 있나…?’
며칠 전 강남의 한 입시학원에서 율무와 함께 매트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닌 백야.
종목을 미리 정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멤버들은 각자 배정받은 종목만 집중적으로 훈련했는데. 지한의 경우에는 지압 판 위에서 줄넘기를 하는 등의 미친 훈련의 연속이었다.
학원에서는 주영쌤의 카리스마에 눌려 아파도 말 못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금 보니 얘는 그냥 체질인 것 같았다.
‘얼마나 건강한 거야.’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제 몸 상태는 어떤가, 순간 호기심이 든 백야가 신발 한 짝을 벗어 지압 판 위를 꾹 밟아 보았다.
‘엥. 괜찮네?’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두 발 모두 올려 움직여 보는 순간.
“으갹!”
개복치가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몸부림치며 헐레벌떡 내려오다 제 신발을 걷어차 버린 백야는 유연의 팔을 잡으며 휘청거렸다.
“뭐야, 왜 이래.”
“아으으… 야, 신발. 신발 좀….”
[경고!]
[스트레스 지수가 ‘주의’ 단계입니다. 56%]
죽을 뻔했다 방금.
- 첫 번째 게임 시작합니다. 지압 판 위에서 제기차기. 출전 선수들은 각자의 레인 위에 서 주시길 바랍니다.
- 앞에 보시면 전광판이 보입니다. 화면에 뜬 카운트 개수에 맞춰 제기를 차주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팀이 우승하는 게임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와 함께 전광판 가득 카운트가 떠올랐다.
“쟤는 고통을 못 느끼는 걸까.”
홀로 심각한 백야가 지한을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첫 경기인 만큼 모두가 집중해서 선수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숫자는 10을 넘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수가 제기를 두 번 이상 차지 못하고 대거 탈락했다.
부리나케 지압 판 위를 벗어난 선수들은 맨땅으로 내려오고 나서야 평화를 되찾았다.
- 엄청납니다! 특히 백팀! 데이즈의 지한 씨인가요?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어요!
- 엄청난 포커페이스입니다.
확실히 제기를 찰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다른 참가자에 비해 지한의 표정은 놀라우리만치 변화가 없었다.
어느새 15를 넘어가고 있는 숫자. 현재 남아있는 선수는 단 두 명. 청팀 로즈데이의 마영과 백팀 데이즈의 지한이었다.
MC들은 두 분이 같은 소속사인 걸로 알고 있는데, 집안싸움이 아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뱉었다.
그러던 그때!
마영이 헛발질을 하며 제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네! 청팀 마영 탈락! 백팀의 승리입니다!
“와악! 왁!”
“스돕~”
흥분한 청이 신발을 신은 채 지압 판 위로 난입하려다 민성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그 순간 지한이 제기를 잡아채며 웃는 모습이 전광판에 크게 잡혔다. 백야는 무슨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줄 알았다.
이어지는 두 번째 경기.
첫 경기에서 우승을 거머쥔 백팀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 다음 경기는 체육대회라면 빠질 수 없는 대표 종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 맞습니다. 팀의 화합과 단합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게임이 아닐까 싶은데요.
앞선 경기와 다르게 팀 전체가 출전하는 이번 종목. 스텝들이 준비된 목장갑을 팀별로 나눠 주었다.
“일단 힘세고 큰 애들을 앞에 배치해야 해요. 여성분들은 다칠지도 모르니까 중간에 세우고.”
올해로 6년 차가 된 빅토리의 리더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백팀에서 유일하게 아체대 1, 2회를 모두 참가한 그룹이었기 때문에 선배 그룹은 물론 후배들도 그들의 말이라면 일단 따르고 보자는 분위기였다.
“에임 선배님들이랑 율무, 유연이 그리고 청이까지 앞에 서면 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
‘힘세고 큰’에서 제가 뽑힐 리 없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호명되지 않으니 백야는 조금 서운했다.
‘나도 힘센데.’
주먹을 쥔 백야가 팔에 불끈 힘을 주며 알통을 만들었다.
“…뭐 하니?”
“형, 만져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