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뭘?”
“근육.”
백야의 팔뚝을 성의 없이 눌러 본 민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없어.”
“여기 있잖아, 여기.”
백야가 제대로 만져 보라며 성화를 부렸다.
“아니야, 없어.”
재차 들려오는 단호한 대답에 백야는 시무룩해졌다.
“아닌데, 있는데…?”
백야가 한 번 더 팔에 힘을 주는 사이 줄다리기 자리 배치가 모두 끝났다.
그 결과.
‘왜 나만…?’
백야만 걸그룹 사이에 끼어있었다. 갈색 머리 사이에 낀 분홍색 복숭아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저, 선배님! 왜 저만 여기….”
물어볼까 말까, 속으로 열 번도 넘게 고민하던 백야가 용기 내 빅토리의 멤버에게 말을 걸었다.
“청이가 너 손가락 박살 났다던데? 근데 멀… 쩡해 보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냥 가운데에 서. 무리하지 말고. 알겠지?”
그거 다 나은지가 언젠데!
그러나 해명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뒷자리로 떠나 버렸다. 지한과 민성은 그와 함께 밧줄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나도 데려가! 데려가라고!’
민성과 눈이 마주친 백야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사인을 보냈다. 그러나 민성은 허허 웃으며 손 인사를 할 뿐이었다.
“저런 눈치 없는!”
답답한 나머지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란히 서 있던 걸그룹 멤버가 깜짝 놀라며 백야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네?”
“…네?”
숨 막히는 공기.
당황한 백야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도리질 치다 고개를 숙였다. 묵언 수행의 시작이었다.
- 총 세 번의 경기가 펼쳐질 예정이고요. 두 번을 먼저 이긴 팀이 우승하게 됩니다.
간단한 진행 순서가 이어진 뒤 첫 번째 호각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길게 놓여있던 로프가 허공으로 들렸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중앙에서 마주 보고 선 소년천하의 국화와 시윤이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견제했다.
“살살하자, 국화야.”
“최선을 다할 뿐이죠.”
코를 찡긋거리며 미소를 짓는 국화.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줄이 힘껏 당겨졌다.
하나둘! 하나둘!
하나에 심호흡, 둘에 당기기로 사전에 입을 맞춘 백팀. 시작과 동시에 몸무게를 실어 잡아당긴 덕에 초반은 백팀이 조금 더 앞서는 듯했으나.
영! 차! 영! 차!
흐름은 비교적 호흡이 빠른 청팀 쪽으로 금세 넘어갔다.
“그냥 누워!”
빅토리의 리더가 소리쳤다.
백팀의 마지막 발악.
그러나 한 번 넘어간 흐름은 좀처럼 가져오기 힘들었다. 그렇게 첫 번째 대결은 청팀의 승. 다음 경기는 위치를 바꿔서 진행됐다.
백야는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기며 슬쩍 뒷줄로 빠졌다.
“왜 와? 네 자리 여기 아니잖아.”
“좀! 조용히 해.”
눈치 없이 큰소리로 묻는 민성에 백야가 옆구리를 찌르며 입단속 시켰다.
“형이 저기 서 보시던가.”
지독한 내향성 인간은 낯선 사람, 특히 이성은 더 불편했다.
- 그럼 두 번째 경기 바로 이어서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각 소리가 들리고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백야도 힘껏 로프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초반은 백팀이 우세한 듯했으나, 점점 청팀 쪽으로 몸이 끌려가더니 대열이 와르르 넘어졌다.
- 청팀 승리!
- 아~ 예상보다 승부가 빨리 났어요. 백팀 선수분들 괜찮으세요?
“아깝다.”
백야가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맞은편에서 청팀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괜찮아. 체육대회 이제 시작인데 뭐.”
다가온 시윤이 백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팀의 사기를 돋웠다.
- 계속해서 세 번째 경기를 이어 가 보겠습니다. 이번 종목은 뭐죠?
- 바로 과녁 맞히기입니다. 먼저 남자 과녁 단체전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올림픽에 양궁이 있다면 아이돌 체육대회에는 과녁 맞히기가 있다는 MC. 장난감 활을 나눠 주는 스텝들 옆으로 가슴 보호대를 착용 중인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당기고~ 쏜다! 슈욱!”
이미 보호대 착용을 끝낸 청이 화살 끝의 압착 고무를 백야의 몸에 붙이며 장난을 걸어왔다.
“까불지 말고 잘해.”
“나 잘해.”
멤버 중 유일하게 주영쌤한테 칭찬을 받은 청이 턱을 거만하게 치켜들며 으스댔다.
출전 선수를 제외한 분들은 모두 나가 달라는 말에 백팀과 청팀 선수 여섯 명만을 남겨둔 채 모두 라인 밖으로 물러났다. 관중석에서는 각자 자신의 가수를 응원하는 팬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체육학원 다녀왔다면서?”
“Yes! 엄청 재밌었어.”
청과 나란히 출전한 백팀의 또 다른 멤버 대환. 그가 장난감치고는 제법 큰 활을 집어 들며 청에게 말을 걸었다.
과녁 맞히기 단체전은 세 명이 한 팀을 이뤘는데, 백팀의 출전 선수는 대환과 청, 그리고 중소 기획사의 3년 차 멤버로 구성되어 있었다.
- 준비된 화살은 27개. 선수당 아홉 개의 화살을 쏘게 됩니다.
- 먼저 백팀의 차례입니다. 첫 번째 선수는 데이즈의 청.
삐이-.
준비를 알리는 첫 번째 신호음과 함께 청이 과녁 앞에 섰다. 화살을 걸어 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전광판에 잡히자 관중석이 술렁였다.
한쪽 눈을 감은 채 입술 옆으로 시위를 바짝 붙여 집중하는 모습은 국가대표 양궁선수가 따로 없었다.
“입 다물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 같네.”
백야는 청의 진지한 모습이 낯설었다.
그 순간 시위를 놓는 청의 손. 활을 떠난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판 위로 날아가 꽂혔다.
뾱!
압착 고무가 과녁판 다리에 붙으며 귀여운 효과음이 울렸다.
- 권외! 0점입니다!
신궁의 탄생이었다.
* * *
- 에임 대환, 데이즈 청, 소년천하 국화. 아체대 양궁 3대장
└ 대한양궁협회는 이 세 사람 안 데려가고 뭐하냐. 얼른 태릉으로 모시지 않고
└ 댓 개 나빠ㅋㅋㅋㅋ
- 누군가 케이팝의 미래를 묻거든 아체대 양궁을 보게하라
└ 비주얼만큼은 인정. 데이즈 청 저분 과녁 안 쏘고 내 심장 쏜 게 틀림없어ㅠㅠ
- 아체대 사녹 오늘이야? 탐라 즐거워 보이네.... (소라게 짤.jpg)
“아카데미에 있는 거랑 다른 화살이야. 그래서 그런 거야.”
“사람들이 너보고 신궁이래.”
“…신궁이 뭐냐 햄스터야.”
“있어. 활 잘 쏘는 사람.”
“자몽?”
청에게 있어 신궁은 주몽인 듯했다. 대충 알아들은 백야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청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거 나 놀리는 거잖아!”
“오… 아네?”
웬일로 비유법을 다 알아듣다니. 백야가 진심으로 놀란 반응을 보이자 청이 헤드락을 걸었다.
“으갹! 밥, 내 밥!”
“이것들이! 으디 밥상머리에서 장난을 쳐!”
민성이 테이블 위로 손바닥을 내려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1부 촬영이 끝나고 주어진 점심시간. 잠시 대기실로 돌아온 데이즈는 때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그래~ 싸우지 마. 당백이는 빨리 먹고 나랑 연습해야지.”
현재 스코어는 청팀이 1점 앞서고 있었다. 그에 고질병인 승부욕이 돋는 모양인지 율무의 눈이 열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슨 연습을 또 해. 됐어.”
“지금 밖에 나가면 다들 연습하고 있다니까? 진짜야.”
청과 율무의 사이에 있던 백야가 못 견디겠는지 도시락을 들고 지한의 옆자리로 옮겼다.
2부 녹화에서 진행될 종목은 2인 3각과 판 뒤집기, 걸그룹 단체 응원전, 그리고 피날레를 장식할 미션 계주가 남아있었다. 이제는 2인 3각의 ‘이’자만 들어도 눈살이 찌푸려져 실전에서 열심히 하겠다고 둘러댔으나 통하지 않았다.
결국 백야는 도시락을 먹다 말고 경기장으로 끌려 나와야만 했다.
“그냥 나가서 묶으면 안 돼?”
“적응해야지~”
경기장으로 나가는 입구 앞에 멈춰 선 율무가 저와 백야의 발목을 굵은 리본으로 묶었다.
“자! 출발!”
백야의 어깨에 팔을 두른 율무가 막무가내로 이끌었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바깥에는 몇몇 아이돌들이 다음 경기를 연습하거나, 팬석 앞에서 팬들과 소통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돌까. 아! 우리 나잉이 있는 곳 가 볼래? 나 좀 천재인 듯.”
“천재가 다 죽었나….”
시큰둥한 얼굴의 백야가 뱁쌔와 나라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데이즈의 팬들이 있는 구역은 서 있는 곳과 정반대였다.
가는 길이 험난해 보였지만 팬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기는 한지 백야는 입술을 삐죽일 뿐, 반대하지는 않았다. 짧게 한숨을 쉰 백야가 율무의 허리 위로 팔을 둘렀다.
“아, 잠깐.”
“왜.”
“나 소름.”
“이게…! 누군 좋아서 하냐!”
그러나 백야의 손이 허리에 닿자 몸을 비틀며 밀어내는 율무에 개복치는 빈정이 상해 버렸다.
“나 안 해! 때려치워!”
“야, 야, 알았어! 해! 진짜 해.”
당장 끈을 풀어버리려는 백야를 율무가 급하게 말렸다. 그 사이 대기실에서 수정 메이크업을 마친 멤버들이 두 사람의 연습을 구경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나왔다.
“뭐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백도, 이래서 청팀 이기겠냐.”
입구 앞에서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본 유연이 약 올리듯 물었다. 느긋한 걸음으로 합류한 다른 멤버들까지 너무 느린 게 아니냐며 말을 얹었다.
쉬는 시간임에도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데이즈에 웅성거리기 시작한 나잉 존. 두리번거리며 팬석을 찾던 민성이 맞은편을 가리켰다.
“저기 계신다. 우리도 팬분들 보러 가 볼까?”
“안 그래도 당백이랑 저기까지 가기로 했어.”
“놔! 나 다시 밥 먹으러 갈 거야.”
그러나 상처 받은 개복치는 아직 토라져 있었다.
대열의 뒤에서 조용히 멤버들을 따라가던 지한은 백야의 밥 타령에 자신의 손에 들린 바나나 한 송이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드는지 걸음을 재촉해 선두에 서 뒤를 돌아봤다.
“쟤 뭐 하냐?”
바나나를 내미는 조또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민성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저기까지 가면 이거 줄게.”
간식을 걸고 딜을 해 오는데 흡사 애완견 조련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