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저 또라이 저거….”
싸늘한 정적에 민성이 이마를 짚었다. 잠시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끔뻑이던 백야도 슬슬 이성이 돌아오는지 입매가 살짝 비틀리며 앞니가 드러났다.
“……내가 개야?”
“그건 아닌….”
이를 드러낸 백야가 눈을 희번덕이자 지한은 지금이 바로 달려야 하는 순간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한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백야가 율무의 목을 낚아채 뒤를 쫓기 시작했다.
“넌 주거써!”
개복치는 참지 않았다.
난데없이 시작된 고양이와 쥐, 그리고 개의 추격전. 도저히 2인 3각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이때 지켜보던 팬들은 확신했다. 2인 3각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백팀이라고.
* * *
이변은 없었다.
완벽한 팀워크와 놀라운 속도로 출전 선수들을 압살해 버린 백팀의 율무와 백야. 백팀의 승리로 현재 스코어는 2대 2 동점이었다.
뱁쌔는 망원경을 꺼내 대환의 옆에서 쩔쩔매고 있는 최애를 관찰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물을 건네는 대환과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백야가 보였다. 거절당한 대환은 이번엔 과자를 내밀었다.
“뭘 자꾸 주는 거야?”
눈을 가늘게 떠 집중력을 높이자 백야의 손으로 넘겨진 작고 네모난 물체가 보였다.
‘마X쮸?’
저건 새 학기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담고 있는 의미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요’.
잘생기고 음악 천재인데다 인성까지 훌륭한 선배와의 친목은 언제든 대환영이었다.
백야와 친해지기 위한 대환의 눈물 나는 노력을 뒤로한 뱁쌔는 망원경을 돌렸다. 지금은 유연이 출전한 판 뒤집기 경기가 한창이었으므로.
시작은 백야였지만 어느새 여섯 명 모두를 가슴에 품게 된 뱁쌔는 다른 멤버들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
- 청팀이 빠른 속도로 카드를 뒤집고 있습니다. 식스에이엠의 하랑 씨인가요? 손이 굉장히 빨라요.
- 백팀도 만만치 않은데요. 아주 팽팽합니다. 데이즈의 유연 씨는 발로 뒤집는 신공까지 보여 주고 있어요.
손에 마X쮸를 다섯 개나 든 백야가 다시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에임과 데이즈가 하나 되어 유연을 응원하고 있는 훈훈한 현장.
그런데 유연이 갑자기 휘청이며 바닥을 뒹굴었다. 놀란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연을 바라봤다.
- 저런. 유연 씨 괜찮아요? 카드에 발이 걸린 것 같은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판이 두꺼운 편이라 발에 걸리기 쉽다며 부상에 주의하라는 영삼. 다치진 않았냐며 거듭되는 질문에 유연이 머리 위로 원을 크게 그렸다.
“방금 쟤가 밀지 않았나…?”
줄곧 망원경으로 유연을 주시하고 있던 뱁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카드가 아니라 하랑의 발에 걸려서 넘어진 것 같았는데….
뱁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내가 잘못 본 거겠지.’
- 자, 10초 남았습니다. 카운트다운 하겠습니다!
영삼의 카운트와 함께 더 분주히 판을 뒤집으며 뛰어다니는 청팀과 백팀. 전광판 숫자가 0으로 바뀌자 호각 소리가 울렸다.
- 출전 선수분들께서는 모두 팔을 머리 위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머리 위로 손을 포갠 선수들이 가만히 서 있었다. 유치원에서나 볼 수 있는 앙증맞은 자세에 팬석에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악! XX 귀여워!”
나라가 흥분해 소리쳤다.
곳곳에서 셔터 소리가 들리는 게 몰래 카메라를 반입해 온 홈마들이 흥분해 사진을 찍어대는 걸 알 수 있었다.
- 개수가 워낙 많은 관계로 점수가 집계되는 동안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데이즈의 품으로 돌아간 유연이 멤버들의 걱정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쭈그려 앉아 바지를 무릎까지 들춰 보는 청과 어깨를 다독이는 민성. 백야는 대환에게 받은 캐러멜과 물을 건네고 있었고, 율무와 지한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아 대화를 나누는 중인 것 같았다.
‘누가 우리 애들 비즈니스라 그랬냐! 저렇게 사이가 좋은데!’
망원경을 든 뱁쌔가 며칠 전 탐라에서 본 댓글을 곱씹으며 이를 악물었다. 마침 그녀의 최애가 과일 맛 캐러멜을 하나 더 건네주고 있었다.
‘저거 봐! 저거!’
마X쮸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준다? 이건 뭐, 끝난 거지. 찐 사랑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사이 집계가 끝난 전광판 위로 청팀과 백팀의 카드 개수가 떠올랐다.
[청팀 101 / 백팀 99]
간발의 차로 청팀의 승리였다. 파란 저지를 입은 무리가 승리를 자축하자, 청팀에 속한 그룹의 팬덤도 함성을 질렀다.
백팀은 잠깐 아쉬워하다 팬석을 돌아보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결과를 확인한 유연도 이마를 긁적이다 뱁쌔 쪽을 보며 허리를 꾸벅 숙였는데.
“아니야 유연아! 넌 잘했는데….”
개인 멘트가 금지된 탓에 한 팬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잠시 술렁이던 팬석.
“한유연! 한유연!”
팬들이 넘어진 유연을 위로하듯 그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연호에 유연을 비롯한 멤버들이 나잉 존을 바라봤다.
율무가 유연을 건드리며 활짝 웃었다. 이어서 팬석을 가리키자, 유연이 부끄러워하며 그의 팔을 잡아 내렸다.
생눈으로 본 스킨십의 현장에 팬들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 * *
- 애들 낯가리나? 쉬는 시간인데 자기들끼리 마피아 게임 중
- 백야 아체대 마X쮸 요정ㅋㅋㅋ 아까 BB9 금발 리더한테도 줬어
- 아이돌 ㅈ목의 현장이라 그래서 감시하러 왔는데 울 와기들끼리만 놀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름ㅠ
- 아체대 간 나잉이들 살아있냐?
- 애들 지금 셀카 찍는다! 공계에 올라올 때까지 존버
└ 여러분 참고로 오늘 헤어밴드 지한입니다. (진지)
림보 경기와 걸그룹 단체 응원전이 끝나고 어느새 마지막 종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바로 체육대회의 피날레를 장식할 미션 계주. 경기장 바닥에 그려진 트랙 위로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림보 경기에서 백팀이 승리하며 점수는 3대 3. 다시 동점이 됐다.
팀별로 출전하는 선수는 각각 네 명씩. 구간별로 다르게 주어진 미션을 통과해야만 다음 선수가 출발할 수 있었다.
- 자, 그럼 여덟 명의 선수들은 각자 출발선 앞으로 서 주시길 바랍니다.
MC의 진행에 청팀과 백팀 선수들이 라인 앞에 섰다.
“헉. 저기 민성이 있어요!”
나라가 3번째 구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발목을 풀며 멤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민성이 보였다.
- 미션 계주! 첫 번째 종목은 밀가루 사탕 먹기입니다. 다들 어릴 때 한 번씩은 해 보셨죠?
- 손을 쓰지 않고 접시에 담긴 사탕을 드셔야 합니다. 드신 후 휘파람까지 불어야 성공입니다.
스타트 신호가 울리자 양 팀의 첫 번째 주자들이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낮은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 수북한 밀가루 사이로 왕사탕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코와 입 주변에 밀가루를 묻힌 두 선수가 고개를 들었다. 사탕 때문에 한쪽 볼이 볼록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휘파람을 부는 데 성공했다.
- 계속해서 두 번째 주자 출발합니다! 거의 동시에 출발했어요.
민성을 향해 달려가는 백팀의 두 번째 주자. 지켜보기 초조한지 민성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앞을 보고 있었다.
보다 생동감 있는 현장 관람을 위해 뱁쌔는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두 번째 장애물을 보며 혼잣말했다.
“과자 먹기인가?”
조금 전 림보 경기에 썼던 장대 허들에 과자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모양들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당연히 봉은 최고 높이에 고정되어있는 상태였는데. 키가 작은 편이 아님에도 미션 구간에 다다른 두 선수는 과자를 먹기 위해 폴짝거리며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아~ 봉이 너무 높은가요?
- 바로 그게 이 게임의 묘미죠.
사탕 먹기와 마찬가지로 손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는 경기에 청팀과 백팀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둘을 지켜봤다.
그때 높이 뛰어오른 청팀의 선수가 과자를 한입 베어 무는 데 성공했다. 장내로 청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입에 문 과자를 심판에게 보여 주고 세 번째 주자에게 바통을 넘겨주러 가는 청팀 선수. 초조해진 백팀 선수도 힘을 내어 폴짝 발돋움했다.
- 백팀도 과자를 먹는 데 성공합니다! 세 번째 주자로 데이즈의 민성 씨가 대기하고 있고요.
- 아~ 그런데 이미 격차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백팀이 따라잡을 수 있을지!
얼굴이 새빨개진 두 번째 주자가 바통을 넘기며 민성과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비장한 낯의 민성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바통을 이어받았다.
세 번째 미션은 자루 뜀뛰기.
바닥에 놓인 주황색 포대 자루를 집어 든 민성이 침착하게 안으로 한 발씩 넣고 있었다.
“아악! 귀여워!”
하필이면 토끼같이 생긴 애가 당근을 연상시키는 자루 안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다니!
귀여움 치사량에 뱁쌔는 현기증을 느꼈다.
- 민성 씨 평소에 자루를 많이 타보셨나 봐요. 흰 토끼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따라잡고 있습니다.
영삼의 재치 있는 해설에 데이즈가 웃음을 터뜨리는 게 보였다.
바통과 포대 자루를 꼭 움켜쥔 민성의 손이 전광판에 클로즈업됐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와중, 갑자기 탄성이 들려왔다.
-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청팀이 바통을 놓치고 맙니다. 백팀 역전승의 기회예요!
민성의 옆을 굴러가는 파란색 바통.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상대 팀 선수를 민성이 뒤돌아보았다.
백팀에게 찾아온 기회.
스멀스멀 올라오는 승부욕에 아랫입술을 꽉 깨문 민성이 젖 먹던 힘을 다해 깡충거렸다. 맞은편에선 에임의 연하가 민성을 향해 손을 뻗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 청팀이 바통을 다시 줍는 순간, 백팀의 바통이 마지막 주자에게로 넘겨집니다!
- 에임의 연하 씨가 미션지를 향해 힘차게 달립니다!
경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역전됐다.
“빨리빨리!”
양동이에 수북이 꽂혀있는 색색의 미션지. 잠시 고민하던 연하는 분홍색 종이를 뽑았다.
뒤를 바짝 쫓아오는 청팀에 초조해진 나라와 뱁쌔가 손톱을 물어뜯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