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 * *
[유연이의 브이로그 (졸업식/학교/꽃다발/연습실/복숭아 떡국)]
어느 날 너튜브 홈 화면에 나타난 이질적인 썸네일 하나.
영화 리뷰와 드라마 클립들 사이로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사슴이 보조개를 짓고 있었다.
평소 봐 오던 화려한 모습이 아닌 수수한 민낯의 교복 차림. 유연은 썸네일 하나로 뭇 머글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었다.
“아직 고딩이었다고?”
오늘의 주인공은 복쑹의 룸메이트이자 입덕 부정 말기 환자인 김 모 씨. 구면의 등장에 그녀가 멈칫했다.
“복숭아 떡국이 뭐야…?”
룸메는 듣도 보도 못한 괴랄한 조합의 정체가 궁금할 뿐이라며 자기 합리화에 성공했다.
영상을 누르자 검게 변하는 화면. 광고를 무려 두 개나 스킵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영상이 시작됐다.
브이로그는 16분짜리였다.
[유연 : 지금 시간이 7시 반. 민성이 형이 다려 준 교복을 입었습니다.]
민낯임에도 윤기가 흐르는 뽀얀 피부. 살짝 부은 눈 때문에 날카로운 인상이 한층 완화되어 보였다.
노란색 교복을 입은 그는 병아리 같아 보이기도 하고, 화려한 금발 때문에 왕자님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유연 : 청이랑 같이 가야 하는데 너무 조용하네요. 불안하게.]
[유연 : 설마 아직 안 일어난 건 아니겠지?]
카메라를 책상에 올려 둔 채로 방을 나서는 유연.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맞은편 방문을 여는 사슴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연 : 청, 준비 다 했어?]
[청 : 나간다! 나간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유연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잠깐을 외치며 거실로 뛰어가는 청의 모습이 보였다.
[유연 : 졸업식에 부모님도 오시고 멤버들도 오기로 했어요. 외부인은 10시부터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저랑 청이만 먼저 학교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청 : 가자! 너튜브 찍나?]
[유연 : 브이로그. 우리 오늘 졸업식 하는 거 찍을 거야. 나잉이 여러분한테 인사드려.]
[청 : Hi! 오늘 우리 High School 끝나는 날이야. 축하해!]
장소는 금세 학교로 바뀌었다.
유연과 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그의 카메라 주변에서 포즈를 취했다.
[유연 :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여기는 저랑 친한 친구들이에요. 인사해 애들아.]
[친구1 : 안녕하세요~ 와! 연예인이다, 연예인!]
[친구2 : 엄마 나 티비 나왔어!]
[유연 : 하지 마 (웃음). 그리고 이거 너튜브에 올라가는 거야. 데이즈 공식 계정.]
청이랑은 다른 반이어서 잠깐 떨어져 있게 됐다는 유연. 그러나 복도로 나가기 무섭게 와다다 뛰어가는 청을 만날 수 있었다.
[청 : 와하학! 도망가! 잡히면 큰일 난다!]
[유연 : 청이도 친구들이랑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 바빠 보이네요. 숙소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장면이라 아주 익숙합니다.]
카메라를 들고 이동하던 그는 자기가 다닌 학교를 잠시 보여 드리겠다며 곳곳을 담았다.
[유연 : 여기는 복도고 저쪽으로 가면 급식실이 나오는데, 저희 반이 계단 바로 앞이라 뛰어가면 밥을 제일 먼저 먹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복도를 걷던 그가 걸음을 멈춰 선 곳은 무용실 앞. 무용과인 자기는 이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며 잠시 내부를 비춰 주었다.
[유연 : 그리고 저쪽으로 가면 제 사물함이 있어요.]
[유연 : 어? 그런데 뭐가 막 붙어 있는데? 다행히 제 사물함은 아닌, 와우. 제거네요.]
[유연 : 쪽지? 쪽지인가.]
사용감이 있어 보이는 사물함들 사이로, 유독 한 곳에만 각종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트부터 시작해서 별, 네모, 동그라미. 가까이 다가간 유연이 사슴 캐릭터가 그려진 포스트잇을 떼 소리 내 읽었다.
[유연 : 인기쟁이 한유연. 센터 밤비. 전 세계 미남? 푸핫! 이게 뭐야.]
[유연 : 활동하느라 학교를 잠깐 못 나왔는데, 그 사이에 친구들이 장난친 것 같아요.]
[유연 : 그래도 졸업식 날 발견해서 그런가? 조금 감동이네요. 나머지는 제가 숙소에 돌아가서 천천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장씩 떼어내 주머니에 챙긴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유연 : 이제 곧 졸업식을 시작하려나 봐요. 체육관으로 이동하라고 지금 방송이 나오고 있어요.]
[친구1 : 한유연, 우리도 가자.]
[유연 : 어. 아! 잠깐만, 나 교실에 옷 놔두고 왔어.]
장소는 체육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연의 얼굴이 아닌 백야와 지한의 얼굴이 보였다.
[백야 : 유, 유연이가 잠시 카메라를 맡기고 갔어요. ……이렇게 하는 거 맞나?]
[지한 : 맞아. 잘하네. 네가 계속하면 되겠다.]
카메라에 혼잣말을 하는 게 어색한지 주변의 눈치를 보던 백야는 결국 렌즈를 돌려 버렸다.
교장 선생님의 축사를 듣는 유연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찍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슬쩍 뒤돌아 본 유연이 카메라를 향해 보조개를 지었다.
[율무 : 귀신이네, 귀신~]
[민성 : 백야야 청이도 좀 찍어 줘. 저기 아까부터 손 흔들고 있는데….]
민성의 말처럼 유연이랑 자리가 꽤 떨어진 곳에 청이 앉아 있었다. 해맑은 얼굴로 멤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찐 막내.
[유연 : 방금 졸업식이 끝났어요. 친구들이랑 사진도 찍고 오랜만에 부모님도 봬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유연 : 꽃다발도 엄청 많이 받았는데, 나머지는 차에 가져다 두고 이건 멤버들이 주고 간 꽃다발입니다.]
[유연 : 아까 백야랑 민성이 형이 와서 주고 갔어요. 다 같이 오고 싶었는데 기자랑 팬분들께서 몰리는 바람에 두 팀으로 나눴대요.]
유연이 꽃다발을 얼굴 아래로 내리며 잘 보일 수 있도록 화면을 조정했다.
이제 멤버들이랑 합류해서 밥을 먹으러 갈 거라는 유연. 마침 바로 앞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걸음을 재촉하는 청과 덕진이 보였다.
[유연 : 청청!]
[청 : 애들은? 숙소 갔어?]
[남경 : 차에 먼저 가 있으라고 했어. 사람이 너무 몰려서.]
멤버들과 합류한 두 사람은 단체 사진만 얼른 찍은 뒤, 차에 올라탔다.
[유연 : 졸업식에는 짜장면을 먹어야 한다는 청이의 강력한 주장으로 저희는 지금 중국집에 왔습니다.]
[청 : 백야 학교 망하는 날도 짜장면 먹었어. 국룰이야.]
[백야 : 우리 학교 안 망했거든?! 왜 멀쩡한 남의 학교를….]
[지한 : 졸업한 거지.]
[청 : 그래 그거! 기억이 안 났어.]
[유연 : 자, 어쨌든. 청이랑 제가 무사히 졸업식을 마쳤습니다!]
[율무 : 와아~ 생일 축하해~]
[유연 : 푸하하! 생일이요?]
율무의 농담에 웃음이 터진 데이즈. 유연의 생일은 4월이라는 자막이 깔렸다.
영상이 잠깐 잘리며 편집된 듯 넘어가는 컷.
[유연 : 이거 엄청 맛있다.]
[민성 : 많이 먹어.]
민성이 동생들의 접시 위로 음식을 덜어 주는 장면이 짧게 보여졌다.
교복을 갈아입은 유연. 데이즈 단체 후드티를 입은 그는 모자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장소는 연습실.
[유연 : 여기는 ID입니다. 잠깐 할 게 있어서 들렀어요. 뭔지 궁금하시죠? 그치만 아무리 나잉이라도 안 알려 줄 거예요. 비밀.]
연습실에는 저 혼자인지 유연은 거울 샷으로 전신을 비추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연습실 문이 열리며 백야가 등장했다.
[백야 : 빨리 끝났네?]
[유연 : 백도 이리 와 봐. 너 브이로그 뭐 찍을지 정했어?]
[백야 : 나? 아직. 뭐 하지.]
[유연 : 요리 브이로그는 어때. 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백야 : 떡국 맛없다며.]
[유연 : 내가 언제 맛없다 그랬어. 국이 좀 짜다 그랬지. 그리고 그거 드립이었어.]
잠시 투닥거리던 두 사람.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유연 : 여러분, 이게 아까 말했던 그 떡국입니다. 연습하고 왔더니 조금 출출해서 저 혼자 먹고 있어요.]
[유연 : 이름은 복숭아 떡국인데 실제로 복숭아가 들어가진 않아요. 그냥 백도가 끓여서 그렇게 불러 봤어요.]
국그릇에 담겨 퉁퉁 불은 떡국은 그럴싸해 보였다.
[유연 : 장도 직접 가서 봐 왔다는데, 떡을 잘못 사 와서 중간중간 이렇게 조랭이떡도 섞여 있어요. 그래도 맛은 좋답니다.]
계란 지단, 김, 고기까지. 들어갈 건 다 들어갔다며 유연은 계속해서 떡국 비하인드 썰을 풀었다.
[유연 : 며칠 전에 백도가 갑자기 떡국을 끓여 주겠다는 거예요. 저희 멤버들이 먹는 거라면 또 엄청 좋아하거든요.]
[유연 : 처음 한 입 딱 먹는데 진짜 너무 맛있는 거예요. 멤버들도 눈 이렇게 떠서 맛있다고 두 그릇씩 먹었어요. 숙소 이모님이 끓여 놓고 가신 건 줄 알았다니까요.]
[유연 : 근데 백도가 신나서 진짜? 진짜? 이러는데 순간 너무 놀리고 싶은 거 있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백야가 굉장히 놀리고 싶게 생겼잖아요?]
[유연 : 저한테도 어떠냐 물어보길래 ‘애미야 국이 짜다’ 드립을 쳤는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나 봐요.]
아까 연습실에서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유연. 생각난 김에 한 번 더 사과하러 가야겠다며 유연이 남은 떡국을 빠르게 해치웠다.
[유연 : 현재 시각은 11시 15분. 벌써 하루가 다 지나갔어요.]
[유연 : 오늘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저는 정말 너무 행복한 하루였어요.]
젖은 머리를 넘기며 렌즈를 빤히 응시하는 유연.
[유연 : 재미없을까 봐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그래도 제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유연 : 그럼 오늘도 평안한 밤 되시고 좋은 꿈 꾸세요. 안녕~]
영상은 유연의 굿나잇 인사로 끝났다.
- 너의 찬란한 열아홉의 끝자락을 우리와 공유해줘서 너무 고마워♥ 졸업 축하해 유연아, 청아!
베스트 댓글을 본 룸메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데이즈 유연이 아닌 19살 한유연을 훔쳐본 기분.
“풋풋하네. 애도 착해 보이고.”
반응을 보아하니 한 명씩 돌아가며 영상을 촬영한 모양이었다.
“그럼 다른 멤버들 것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