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정신을 차려 보니 입을 벌린 채 감탄하고 있었다.
첫 소절에 청중을 휘어잡을 만큼 맑고 청량한 음색.
에임의 대환은 워낙 유명한 그룹의 멤버이니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 분홍색 말랑 콩떡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룸메의 시선이 화면 속 백야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음색 깡패….”
사람을 홀리는 목소리라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룸메의 미간 사이로 진 주름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넋을 놓아 버린 그녀. 다시 보기가 떠 있는 상태로 한동안 멈춰 있던 룸메는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신에게는 아직 하나의 영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민성이의 브이로그 (숙소, OOTD, 보컬 레슨, 컴백 준비)]
가장 마지막에 올라온 영상. 날짜는 일주일 전이었다.
썸네일은 거울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토끼를 닮은 남자였다.
[민성 : 나잉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민성로그입니다.]
[민성 : …이거 이렇게 하는 게 맞나?]
[민성 : 하핫.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하려니까 조금 어색하네요.]
거울 앞에 선 민성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민성 : 여기는 저희 숙소입니다. 제 방은 아니고 옷방이에요. 저랑 지한이, 백야의 옷이 걸려 있습니다.]
[민성 : 이 스팀다리미는 제건데, 멤버들 졸업식 때 이 다리미로 제가 교복을 다 다려 줬죠. 다섯 명 다 제가 업어 키웠습니다. 뿌듯하네요.]
[민성 : 그리고 여기는 지난번 팬 사인회 때 받은 모자랑 머리띠들이 걸려 있습니다.]
카메라가 드레스룸을 한번 훑었다.
[민성 : 최근에 숙소를 이사하면서 옷을 정리했는데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아직 포장지를 뜯지 못한 옷들도 저렇게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민성 : 옷을 몇 벌 주문했는데 아무래도 제 거 같네요. 회사 다녀와서 정리할게요.]
민성의 카메라가 다시 거울을 비췄다.
[민성 : 오늘 옷은 핑크색으로 깔 맞춤 해봤는데 어떤가요. 잘 어울리나요? 연습실에 가는 거라 그냥 편하게 입었습니다.]
[민성 : 벌써 3월이에요.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맨투맨 하나만 입어도 충분하지만, 저녁에는 쌀쌀하니까 머플러를 둘러 봤습니다.]
분홍색 맨투맨에 분홍색 머플러, 베이지색의 면바지를 입은 민성이 빙긋 웃었다.
영상 아래로 ‘#OOTD #오늘의 토끼룩’이 자막으로 깔렸다.
[민성 : 그러고 보니 맨투맨이 백야 머리 색이랑 똑같네요. 데몬트 복숭아.]
[민성 : 요즘 애들이 분홍색에 꽂혔는지 숙소에 핑크색 계열의 옷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이 옷도 사실 누구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입었어요.]
숙소를 옮기면서 옷이 섞여 버리는 바람에 대충 사이즈만 맞으면 아무 옷이나 입고 있다는 민성.
데이즈는 원래도 핸드폰이나 지갑처럼 정말 개인적인 물건이 아닌 이상 웬만하면 구분을 두지 않고 있다 한다.
[민성 : 이 방은 작은 옷. 아니, 결코 작지 않아요.]
[민성 : 아무튼 중간 사이즈의 옷들을 모아 놨고. 율무랑 청이, 유연이 옷을 모아 둔 큰 방이 따로 있어요.]
[민성 : 그런데 어떻게 보면 걔네가 더 손해죠. 저는 율무의 옷을 입을 수 있지만, 율무는 제 옷을 입을 수 없거든요. 개이득입니다.]
오늘 녹음 스케줄에 앞서 보컬 레슨이 잡혀 있어 멤버들보다 먼저 회사로 가야 한다는 민성. 사옥에 도착한 그는 곧장 보컬실로 향했다.
[민성 : 형, 저 왔어요.]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작하기 전,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민성.
[선생님 : 오늘 녹음이랬나?]
[민성 : 네. 그런데 생각보다 곡이 어려워서….]
[선생님 : 음이 높긴 하더라. 그래도 너 정도면 괜찮지 않나?]
[민성 : 전혀요.]
[선생님 : 한 번 들어 볼까?]
[민성 : 넵.]
그러나 아직 컴백 전인만큼 영상은 다음 장면으로 곧장 넘어갔다.
[선생님 : 잘하는데? 너한테 전혀 안 어려워.]
[민성 : 괜찮아요?]
[선생님 :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가! 바로 가서 녹음해.]
선생님의 농담에 민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냇물 소리와 함께 2배속으로 넘어가는 레슨 장면. 배속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며 민성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민성 : 잘하고 올게요.]
[선생님 : 지금도 충분해. 내 앞에서 한 것처럼만 해.]
꾸벅 인사하며 레슨실 문을 열고 나오는 민성.
[민성 :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데이즈는 열심히 컴백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민성 : 노래가 어디까지 공개될진 모르겠는데, 방금 부른 노래는 이번 앨범에 실릴 수록곡이에요.]
잠깐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민성이 말을 이었다.
[민성 : 원래는 바로 녹음실로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조금 남았어요. 저희가 연습생 때 자주 가던 카페가 있는데 오랜만에 거기를 다녀와 볼까 합니다.]
마스크를 쓴 민성이 회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일 낮이라 거리에는 민성뿐이었다.
[민성 : 레모네이드 네 잔이요. 가져갈 거예요.]
진동벨을 받아 구석 자리로 향하는 토끼.
[민성 : 백야 맨날 여기서 자고 그랬는데. (웃음)]
[민성 : 아, 여기 레모네이드가 정말 맛있어요. 가루 안 쓰고 사장님께서 직접 만드시는 거라 가끔 레몬 씨도 씹혀요.]
[민성 :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입니다.]
민성은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올려 두고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드르르륵-.
잠시 후 진동이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토끼. 캐리어를 든 민성이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민성 : 안녕하세요.]
[작곡가 : 어, 민성이 왔니.]
[민성 : 이거 별건 아닌데 제 거 사면서 같이 샀어요.]
레모네이드 한 잔으로 스튜디오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작곡가 : 연습은 좀 했어?]
[민성 : 네. 열심히 했습니다.]
보컬 선생님의 응원 덕분인지 조금 전보다는 자신감을 되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녹음실에 들어가 헤드셋을 끼고 있는 민성.
마지막으로 음료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민성이 마이크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반주가 재생되자 먼저 녹음을 마친 멤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연의 파트가 끝나자 기다렸던 민성의 입술이 떼어졌다.
[작곡가 : 좋은 거 같은데?]
[민성 : 호흡이 조금….]
[작곡가 : 네가 아쉽구나? (웃음) 그럼 이거 살려 놓고 다시 한번 갈게.]
[민성 : 넵.]
녹음은 순조로웠다. 녹음실을 나온 민성이 허리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민성 : 고생하셨습니다~]
[작곡가 : 네가 제일 고생했지. 다시 숙소로 가?]
[민성 : 아니요. 멤버들 지금 오고 있대요. 3시부터 안무 연습 있어서요.]
[작곡가 : 밥 잘 챙겨 먹고.]
[민성 : 넵. 감사합니다. 저 가 볼게요.]
리더는 허리를 열 번쯤 꾸벅이고 나서야 스튜디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민성 : 이로써 제 개인 스케줄은 모두 끝났습니다. 연습실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려고요.]
[민성 : 저희 컴백 준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요즘은 눈 뜨면 하루 종일 연습만 하다가 다시 자러 가는 것 같은데.]
민성이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민성 : 그래도 나잉이 여러분을 빨리 만날 생각하면 전혀 힘들지 않아요.]
[민성 : 고민이 하나 있다면 과연 이 컨셉을 내가 소화할 수 있을까…….]
컨셉을 떠올리자 착잡한지 민성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민성 : 굉장히 걱정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민성 : 나중에 여러분이 보시고 알려 주세요. 제가 잘 소화해 냈는지.]
민성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곧장 소파로 향한 그는 멤버들이 오기 전까지 조금 자야 할 것 같다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민성 : 어제 멤버들이랑 마피아 게임 한다고 너무 늦게 잤어요.]
[민성 : 저희가 요즘 마피아 게임에 완전 꽂혀 버려서 많이 하면 하루에 10판? 정도 하는 것 같은데…. 물론 제가 제일 잘합니다.]
[민성 : 여러분. 저희 얼른 뮤직비디오도 찍고, 앨범도 나와서 빨리 활동하고 싶어요.]
수마가 몰려오는지 민성의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민성 :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미소를 머금은 민성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브이로그는 끝이 났다.
14분짜리 영상이었지만 체감은 1분 남짓. 룸메는 아쉬운 마음에 댓글 창으로 넘어갔다.
- 제목에 컴백 준비 보고 소리 지른 사람? 저요
- 미친 민성이 옷 입은 거 좀 봐. 남친룩의 정석
└ 네 옷은 내 옷, 내 옷도 내 옷이지ㅋㅋㅋㅋ
- 도대체 컨셉이 뭐길래 저희 집 토끼가 바들바들 떠는 거죠?ㅠㅠ 기대해도 되는 부분?
- 내 심장 벌써 박살 남. 황태자로 데뷔해서 인형 컨셉으로 뒤통수 때릴 때부터 알아봤다.
└ 222 민성이가 저렇게 걱정할 정도면 ID 이번에도 내가 조아하는 거 다 때려 박았네
└ 나보다 ID가 데이즈에 더 진심인 거 아니까 전 그냥 통장만 준비해 놓을게요
- 데이로그 정말 최고의 컨텐츠... ID에서 이건 꾸준히 내주면 좋겠다ㅠㅠ
- 녹음실 부분 스포 아니야?! 컴백 진짜 얼마 안 남은 건가
‘컴백을 한다고?’
컴백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반응한 룸메는 얼른 검색 포털 앱으로 넘어갔다. 이어서 ‘데이즈 컴백’을 검색한 그녀.
[데이즈 측, 6월 발매 목표로 앨범 준비 중]
지금이 4월이었으니까 컴백까지 약 두 달 정도 남은 셈이었다.
물론 딱히 관심이 있어서 알아본 건 아니고, 마침 브이로그를 봤는데 컴백을 한다니까 그냥 궁금해서 검색해 본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