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 * *
[<연습벌레만이 사는 길(8)> 완료!]
철퍼덕.
엔딩 포즈를 취하던 백야가 돌연 넘어졌다.
“으갹!”
“왜 이래?”
지한이 놀란 얼굴로 아래를 살폈다. 그러나 바닥엔 아무거도 없었다.
“갑자기 앞에…는 아니고 그냥 발이 꼬였어.”
고개 저은 백야가 무릎을 문질렀다. 눈썹이 찌그러진 걸 보니 제법 아픈 모양이었다.
“조심해. 촬영 며칠 안 남았어.”
“으응.”
개복치가 바지를 걷어 멍이 들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어느덧 4월. 데이즈가 컴백 준비에 돌입한 지도 네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설날 특집으로 방송된 아이돌 체육 대회 이후로 데이즈의 공식 활동은 멈춘 상태. 대신 3월부터 너튜브 공식계정에 업로드 되고 있는 멤버들의 브이로그만이 유일한 떡밥이었다.
“아~ 고기 먹고 싶다~”
연습실 바닥에 누운 율무가 크게 혼잣말했다.
“나도 고기! 치킨! 삼겹살!”
청이 맞장구쳤다.
코앞으로 다가온 뮤직비디오 촬영에 덩달아 혹독해진 식단 관리. 고기 타령은 요즘 멤버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나 이번에 뮤직비디오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뱀파이어가 피 못 먹으면 이런 기분일 거 아니야.”
율무가 옆을 돌아보자 둘둘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리던 백야와 눈이 마주쳤다.
“뭐.”
“그냥~ 무릎 괜찮나 해서. 듣자하니 이번에 4일 촬영 하는데 하루는 산에서 찍는다더라.”
“산?”
“어, 그것도 밤에. 귀신 나오면 어떡하냐.”
율무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백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왜 날 보면서 말하는데?”
“그러게?”
“너 이씨…!”
작년 이맘때쯤이었나. 리얼리티 촬영차 갔던 귀신의 집에서 소리 좀 질렀다고 놀리는 게 분명했다.
율무가 배를 잡고 웃자 쏜살같이 달려간 개복치가 복수하듯 그를 붙들고 데굴데굴 굴렸다.
“잘들 논다.”
멍하니 거울에 기대앉은 민성은 부랑자 같은 모습으로 두 사람을 구경했다. 연습실에 감금된 지 18시간째. 몰아치는 안무 연습에 리더의 몸과 마음은 지친 지 오래였다.
“아오 더워!”
쉬고 있는 멤버들의 곁으로 다가간 백야가 씩씩거리며 앞섶을 펄럭였다.
“물?”
“어. 줘 봐.”
지한이 건넨 물을 낚아채 순식간에 반을 비웠다.
마시면서도 전방을 예의주시하는 날카로운 눈빛. 백야의 눈꼬리가 율무를 경계하느라 삐죽 올라갔다.
본인 나름대로 건드리면 물어 버리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글쎄…….
율무의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봐선 전혀 먹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귀신 안 무섭다고 했다 내가.”
으름장을 놓지만 하찮음 그 자체. 저런 반응이 오히려 상대를 자극한다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그만하고 앉아.”
유연이 백야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진정시켰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옆자리에 앉은 백야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발끈하는 것도 체력이 꽤 소모되는 일이었다.
“우리 내일 머리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지 않냐.”
“맞다. 내일 샵 간다 그랬지?”
백야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WANT ME 활동 후로 꾸준히 분홍색을 유지해 온 백야는 ‘아체대’에 나가기 위해 탈색과 염색을 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로 거의 내버려 두다시피 한 머리는 뿌리도 자라고 물도 빠져 굉장히 지저분해 보였다.
‘추노가 따로 없네.’
누가 이 몰골을 보고 아이돌이라고 하겠는가. 거울 속 모습을 보던 백야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비슷한 몰골을 하고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존재가 있었으니.
“왜?”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친 유연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열 받네.”
“또 왜. 난 아무 짓도 안 했잖아.”
요즘 제가 얼마나 얌전히 사는지 몰라서 그러냐며 사기꾼이 제 발을 저려 했다.
“…….”
저는 A등급짜리 스킬을 먹여야 봐줄 만한 얼굴인데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저런 얼굴이라니. 백야가 말없이 유연을 바라봤다.
그러다 손을 뻗어 유연의 얼굴을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돌려 보기 시작했다.
“믄드. 므흐는 근드.”
감정을 실은 악력에 얼굴이 찌부가 된 유연이 새는 발음으로 물었다.
“쳇. 더럽게 잘생겼네.”
백야가 손을 떼며 입술을 삐죽였다. 감각이 남아 있는 볼을 매만지던 유연이 마지막 말을 듣고 눈썹을 구겼다.
“너 또 이상한 글 봤냐?”
“아니야.”
한동안 잠잠하더니, 백야가 안경을 쓰고 찍은 브이로그가 공개되자 다시금 성형설이 대두되고 있었다.
“봤네, 봤어.”
“일일이 신경 쓰지 말라니까.”
민성과 지한까지 거들자 백야가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아니라니까? 나 신경 안 써.”
이놈의 망겜 시스템이 그런 건지, 아니면 저도 모르는 착각계 스킬이 장착되어 있는 건지. 멤버들은 가끔 백야의 말을 무시하고 저 좋을 대로 해석하곤 했다.
이전 숙소에서 일어났던 발코니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내가 봤을 때 당백이 넌 안경이 문제였어. 실장님이 쟤 오디션 보러 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 얼굴 그대로였다고 하시던데?”
율무가 백야의 졸업 사진을 띄운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건 또 왜 저장하고 난리야!”
백야에게 핸드폰을 빼앗긴 율무는 기어이 한 대 얻어맞았다.
* * *
- 애들 염색 > 모자 씀 > 컴백 임박 = 돈 모으자!
- 애들 뮤비 촬영 끝났고 오늘 자켓 찍는다던데 제발 흑발
- ID 제발 이번에도 청량해 줘ㅠㅠ 아니 하지 마.. 아니 해 줘...
└ 사실 교복도 좋고 하네스, 테크웨어, 한복, 날티, 체인 다 좋으니까 헤메스 기깔나게만 부탁합니다
- 엥 타돌 기사 떴네. 컴백 시기 겹침 (우리 애들이랑 엮이고 싶어서 안달 난 그 집 맞음)
- 데이로그 찍고 유입 늘어난 게 확실히 보임.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임
- 복숭아 안경 셀카 제발 포카로 내줬으면ㅠㅠ 정규 포카 벌써 기대돼
“포카…!”
이곳은 데이즈의 정규 1집 앨범 자켓 촬영 현장. 단체 촬영을 끝내고 개인 컷을 기다리던 백야가 황급히 사진 앱을 켰다.
‘그러고 보니 오늘까지 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틈틈이 셀카를 찍어 두긴 했지만, 쓸 만한 게 있을진 미지수였다.
“역시.”
뮤직비디오 세트장과 동물 사진 사이로 백야의 얼굴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러나 옷과 배경만 다를 뿐 포즈와 각도는 모두 똑같았다.
복사 붙여 넣기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싱크로율.
‘그냥 대충 내도 되지 않을까.’
이 상황을 들켜 또다시 포카 월드컵이니 뭐니를 하고 싶진 않았다.
신인상도 받았겠다. 이후로 이렇다 할 메인 퀘스트가 뜨고 있지도 않았으니 개복치의 마음이 안일해질 만도 했다.
그러자 백야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갑자기 상태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Q. 난 몰랐어 내 얼굴이 이리 다채로운지 : 아이돌이라면 본업 다음으로 잘해야 하는… (더 보기)
※ 실패 시 패시브 강화]
“아, 안 돼…!”
이러지 마, 제발.
갑자기 뜬 퀘스트에 백야가 핸드폰을 떨어뜨리며 절망했다.
“더 보기….”
퀘스트에 더 보기가 떴다?
망한 거였다.
떨어진 핸드폰을 주울 생각도 않고 비 맞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백야.
“댓글 괜히 봤어….”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개복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심지어 메인 퀘스트라서 무시할 수도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더 보기’를 누르자 상세 내용이 펼쳐졌다.
[아이돌이라면 본업 다음으로 잘해야 하는 셀카 찍기! 하지만 ★천재 아이돌★의 셀카만큼은 달라야겠죠?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 포카도 건지고 스타 포인트도 얻고!
- 브이하고 찍기
- 꽃받침하고 찍기
- 윙크하며 찍기
- 다른 사람과 함께 찍기
- 거울 보고 찍기
※ 달성률 0%]
‘망겜 싫어. 진짜 싫어. 너무 싫어. 제일 싫어!’
고개를 떨어뜨린 백야가 힘없이 걸어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 폰은 멀쩡했다.
“아, 깜짝이야. 왜 여기서 이래?”
막 개인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유연이 입구 앞에 쭈그러져 있는 백야를 못 보고 밟을 뻔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액정 나갔어?”
“아니라고….”
제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백야는 감정을 숨기는 데 재주가 없었다.
“줘 봐.”
유연이 말없이 백야의 핸드폰을 가져갔다. 이리저리 뒤집어 봐도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괜찮은데?”
“괜찮다 그랬잖아.”
한숨을 쉬며 일어난 백야가 핸드폰을 되찾았다.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는 뒷모습. 유연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뭐야, 왜 저래….”
유연이 의아해하며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냐 물어보고 싶어도 다른 멤버들이 소파에 몸을 구긴 채 쪽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 차례인 청을 깨워 보낸 그는 자리에 앉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너 사진 냈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유연. 그는 백야의 최대 고민인 셀카를 말하는 듯했다.
‘저놈이 뭘 알고 그러는 건가?’
개복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유연의 시선은 하늘 높이 치켜든 핸드폰에 고정된 상태. 셀카를 찍고 있는 그는 턱을 요리조리 돌려 가며 최적의 각도를 찾아내고 있었다.
“…낼 거야.”
“오. 그래도 이번에는 사진 좀 찍었나 보네?”
포카 월드컵에 낼 사진이 몇 장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며 유연이 피식 웃었다.
찰칵-.
그 순간 들리는 셔터 음. 유연은 백야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뭐가 저렇게 자연스러워?’
눈을 휘둥그레 뜬 백야가 유연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희망 한 줄기.
지금이 퀘스트 조건 중 하나인 ‘다른 사람과 함께 찍기’를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복치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