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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99화 (99/340)

제99화

물을 가지러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유연의 뒤를 지나갔다.

한창 셀카 타임을 갖고 있는 사슴의 프레임에 걸린 빨간 머리통. 워낙 튀는 색이다 보니 유연도 금방 알아차렸다.

사진 찍기를 잠깐 멈춘 그는 백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까비….’

왜 잘 찍다가 멈춰?

속으로 탄식한 백야는 2차 시도를 계획했다. 이번에는 옆에서 지켜보다 유연이 셔터를 누를 만한 타이밍에 급하게 끼어들기로 했다.

찰칵-.

그러나 거리 계산 실패로 몸뚱어리만 찍혔다. 당연히 달성률은 0% 그대로였다.

“왜 자꾸 뒤에서 알짱거려?”

저 눈치 100단.

여우 같은 놈은 눈치도 빨랐다.

‘팬들이 그래서 폭스, 폭스 하는구나.’

가만히 보니 사슴보다 여우를 더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내, 내가 언제.”

개복치가 모른 척 발뺌을 하자 유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냥 같이 사진 찍자는 한마디면 될 텐데 그 말을 못 꺼내서 이 지경이었다. 극 내향성 인간은 가리는 게 많았다.

“같이 찍을래?”

“아니?! 내가 왜?”

“…너무 싫어하는 거 아니야?”

고개 돌린 유연은 두 번 물어보지 않았다. 상남자가 따로 없다.

‘이씨…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못 이기는 척 찍으려 했는데.’

굴러 들어온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백야가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 몰라. 됐어! 안 해!’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지 개복치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힘없는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가던 백야. 그 순간 불쑥 가까워진 인기척이 백야의 목을 낚아챘다.

사슴의 기습이었다.

“잡았다, 요놈!”

“으갹!”

휘청이며 유연의 팔 안에 갇힌 백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찰칵-.

찰나의 순간, 놀란 아기 복숭아의 모습이 박제됐다.

“아싸~ 이거 포카로 내야지.”

“야! 갑자기 찍으면 어떡해?”

“말하면 도망갈 거잖아. 내가 너를 하루 이틀 보냐?”

한쪽만 움푹 팬 보조개가 약 올리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보란 듯 내밀어지는 핸드폰 속에는 웬 불타는 개복치 한 마리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싫어! 나 이거 마음에 안 들어.”

“난 마음에 드는데~”

백야가 핸드폰을 빼앗으려 들자 유연이 팔을 높이 들며 까치발을 세웠다.

“이리 내. 안 내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보지만 몇 센티가 모자랐다.

유연의 아래에서 몇 번 폴짝거리더니 슬슬 화가 올라오기 시작한 개복치. 새빨개진 얼굴로 입김을 세게 불자 앞머리가 팔랑였다.

‘팰까.’

백야의 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생각해 보니 상태창도 안 떴다. 개복치는 기분이 더 나빠졌다.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니라서 인정을 안 해 주겠다, 이건가.’

하루 이틀 겪어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놈의 망겜은 설명이 굉장히 불친절했다. 역시 망하는 덴 이유가 있다.

오늘 또 한 번 제가 망겜의 유저인 걸 자각한 백야는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

“윽!”

방심하는 순간 허를 찌르는 솜 주먹의 기습. 충격을 받은 유연의 팔이 반사적으로 굽혀졌다. 솜 주먹도 일단은 주먹이니까.

“까불고 있어.”

햄스터의 하찮은 앞발질에 당한 사슴은 허무하게 핸드폰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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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인

“야! 너 진짜,”

눈앞에서 날아간 투샷 포카에 유연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 사진인데 왜 지워?”

정색하는 유연에 개복치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그제야 제 행동이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겠구나 깨달은 개복치.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돌려준 백야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다, 다시 찍어.”

“다시?”

“응.”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백야가 자신의 핸드폰을 가져와 내밀었다.

“대신 이거로 찍자. 내 거로.”

같이 찍자니까 질색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순순히 핸드폰을 내밀다니. 의심에 찬 유연의 눈이 백야를 훑었다. 그러나 별다른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 그럼.”

유연이 백야의 핸드폰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자 도리질 치며 굳이 자기가 찍겠다는 개복치.

“내가 할게. 서 봐.”

백야가 팔을 뻗자 화면 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찰칵-.

[‘다른 사람과 함께 찍기’ 완료!

※ 달성률 20%]

“오! 됐다!”

유연은 이용당했다.

제가 기습으로 찍었던 것보다 훨씬 못 나온 투샷을 보며 활짝 웃는 백야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잠깐만. 하나 둘 셋, 뭐 이런 거도 없이 그냥 누른다고?”

“…어?”

유연은 진심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자, 잘 나온 것 같은데…?”

“눈이 삐었나 이게.”

유연이 자신의 핸드폰을 켜 백야가 지운 사진을 복원해 냈다.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뭐야? 어떻게?!”

“너 좀 허술한 거 알지? 눈 뜨고 코 베이기 싫으면 정신 차려야 된다 진짜.”

백야는 지한만큼이나 기계치였다.

개복치가 놀라거나 말거나 자신이 찍은 사진과 백야의 핸드폰 속 사진을 나란히 한 유연. 셀카 희망 편과 절망 편이었다.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백야도 양심이 있고 눈이 달린 사람이었다.

“…….”

“할 말 없지?”

“…다시 찍어.”

“그건 당연한 거고. 일단 네 사진부터 보자.”

“…무슨 사진.”

“포카 낼 거. 너 사진 찍는 꼴 보니까 안 될 것 같다.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팬분들이 네 포카를 뽑고 뒷목을 잡으실지도 모르겠다며 유연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빨리.”

“지가 뭔데 내 사진을 이래라저래라….”

개복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앨범을 뒤지고 있었다. 손놀림이 다급한 게 그나마 덜 거지 같은 사진을 찾고 있는 듯했다.

파란 옷과 노란 옷 중에서 고민하던 백야.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있는 유연 때문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 됐지?”

섬광처럼 눈앞을 스치고 간 노란 후드 백야. 찰나였지만 유연은 제대로 봤다.

“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입을 가린 유연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 정도로 사진이 처참했다.

“그래… 대충 그렇다 치고. 다른 건? 두 장이잖아.”

앙칼지게 올라간 눈꼬리가 유연을 노려봤다. 대충 하나만 보여 주고 치우려 했던 계획이 어그러진 탓이었다.

“아, 왜. 그냥 이거만 봐.”

“됐다, 안 봐도 뻔하지 뭐. 옷만 다르지? 내가 네 셀카를 한두 번 보냐.”

개복치는 2천 원 비싸졌다.

그런데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입술을 삐죽인 백야가 다시 한번 구시렁거렸다.

“내 사진이지 지 사진인가….”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였지만 사슴은 귀가 밝은 동물이었다.

“네 사진이지만 우리 앨범이지. 안 되겠다. 이리 와.”

“왜. 싫어. 안 사요.”

그러나 백야의 의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넌 지금부터 특훈이야.”

* * *

“헉!”

놀란 백야가 눈을 번쩍 떴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온몸을 둥둥 울렸다. 분명 숙면을 취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심장이 뛰며 정신이 들었다.

‘뭐지.’

살짝 틈이 벌어진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 밝은 빛이 보이는 게 아직 새벽인 듯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에 몸을 일으켜 앉은 백야가 상태창을 확인했다.

▷ 스트레스 : 17%

“그대론데…?”

아직도 쿵쾅거리는 심장에 이러다 ‘자다가 돌연사!’ 엔딩을 보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현재 보유 스타 포인트 : 4

최근에 완료한 <난 몰랐어 내 얼굴이 이리 다채로운지>와 연습실 퀘스트를 제외하면 포인트를 얻을 방법이 요원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만 있었던 지난날.

개복치답게 예민한 몸뚱어리는 컴백 준비를 하는 내내 백야에게 경고 알림을 보내왔다. 딱히 뽑기를 돌릴 일이 없어서 포인트가 쌓여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동기화 초반에는 40%만 넘어도 2포인트씩 소비해 0%를 만들곤 했는데. 요즘은 간이 부어서 60%까지도 내버려 두곤 했다.

Lv.11 백야 (동기화 중)

외모 : A

보컬 : S

댄스 : C

끼 : A

오랜만에 보는 정보창도 평화로웠다. 물론 댄스는 제외.

어떻게 된 게임이 제대로 된 댄스 스킬을 뽑는 게 살아남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혹시… 이놈들 뽑기 확률 조작한 거 아니야?’

죽어라 돌려 보지만 죽어라 안 나오는 한 종류의 스킬. 합리적 의심이었다.

게다가 허공에 뜬 상태창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아니, 너무 대놓고 비현실적이라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어 보게 됐다.

“아.”

아팠다.

너무 세게 꼬집었는지 얼얼한 감각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뾰로통한 얼굴로 볼을 문지르던 백야가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잠이 다 달아났다.

조용히 방문을 연 백야가 청이 깨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으며 나왔다. 소파로 향한 백야가 뒤집어진 태블릿을 집어 들자 일시 정지되어 있는 브이로그 영상이 보였다. 누군가 모니터링을 하다 멈춰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하단에서 시선을 끄는 썸네일 하나.

“어? 티저 떴구나.”

자정에 올라온 듯 보였다.

썸네일을 누르자 화면이 새로 고침 되며 영상이 재생됐다.

[DASE 데이즈 ‘NAN’ MV Teaser #1]

음산한 바람 소리.

벽돌 건물에 붙어 있는 종이가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타박. 타박.

자욱한 안개 너머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한 인영이 나타나 포스터를 떼어냈다.

[WANTED]

최근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현상 수배 포스터. 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줄곧 인영의 어깨 너머를 비추던 카메라가 천천히 줌아웃 되며 정면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은 채 짧은 숨을 내쉰 남자는 유연.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며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 Na na na na na

단체 후렴의 마지막 소절이 울리다가 뮤트되며 유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빨갛게 빛나는 눈동자와 렌즈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화면이 검게 바뀌며 로고가 떠올랐다.

[NAN]

[D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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