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율무의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네! 오늘 불금은요, 영원한 삶! 불멸의 존재 특집으로 함께합니다!”
오늘만큼은 인간이 아닌 불금 멤버들이라며, MC가 입장을 외치자 세트장 한쪽에서 고정 멤버들이 걸어 나왔다.
불멸 특집인 만큼 멤버들의 의상이 심상치 않았다. 개중에서도 MC는 맏형인 마태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오늘 의상 전달이 잘못됐나요? 다른 의미로 굉장히 튀고 있어요, 지금.”
“영생 특집 아닌가요?”
“영생이요? 단어 선택이 너무 올드한 거 아닙니까.”
MC가 마태를 놀리듯 깐죽거렸다.
“아무튼 영생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웬 여우 한 마리가 촬영장에 난입한 것 같은데요.”
야생 동물 구조 센터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냐며 MC가 능청을 떨자 마태가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전 구미호예요.”
“뭐라고요?”
“구미호.”
마태가 흰털 여우 귀 머리띠를 만지작거리며 인자하게 웃었다. 태연한 얼굴과 달리 빨개진 귀가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누가 유기견 입양 홍보 아저씨 아니랄까 봐 이런 날에도 동물 사랑을 몸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차례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저는 장수의 상징이죠. 바다거북.”
건장한 체격의 예능인 태혁이 뒤를 돌아 거북이 등딱지를 보여 주었다.
“초록색 의상에 거북이 등까지! 정말 바다거북이 육지로 올라온 줄 알았습니다. 동물 아저씨랑 잘 어울려요.”
“그래서 옆에 섰어요.”
다음은 불금의 마스코트. 데뷔 10년 차 걸그룹 승지가 눈을 감은 채 양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승지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천사.”
여신 같은 드레스에 앙증맞은 천사 날개를 단 승지가 우아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어우. 쟤 또 저런다.”
옆에서 지켜보던 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인상을 피며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전 도깨비입니다.”
드라마의 유명한 OST가 깔리며 CG로 꽃잎이 흩날렸다.
마지막은 프로그램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는 개그우먼 소영이 몸을 기괴하게 꺾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으어어어….”
그 순간 세트장의 불이 꺼지며 비명 소리가 울렸다.
“뭐예요! 뭐야!”
놀란 MC와 멤버들이 호들갑을 떨자 다시 밝아진 세트장. 책상 아래로 숨었던 MC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앞을 살폈다.
“어휴. 그걸 또 숨는다.”
범이 한심하다는 듯 타박하자 MC는 잠깐 미끄러진 거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좀비예요?”
“으어어….”
소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컨셉이에요?”
“으어어….”
“그래도 녹화가 시작되면 맡은 바 본분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좀비가 되시면 곤란해요.”
MC가 능청을 떨며 멤버들을 자리로 돌려보냈다.
“자! 오늘 함께할 분들은 말이죠, 데뷔 1년 5개월 차!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어요.”
세트장에 데이즈의 WANT ME가 잔잔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얼죽 아이돌! 돌돌! 등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화제를 몰고 있는 분들입니다. 앙 깨물어 주고 싶은 신인 아이돌! 데이즈 나와 주세요~”
힘찬 소개와 함께 볼륨이 커지는 배경음악. 멤버들이 함성과 박수를 치며 데이즈를 환영해 주었다.
가수 선배인 승지와 범은 WANT ME 안무를 알고 있는 듯 따라 추기까지 했다.
- 하루 종일 딱 붙을래
너는 날 가지고 놀아
허리를 꾸벅 숙이며 쾌활하게 걸어 나오는 율무와 긴장한 얼굴로 율무의 뒤를 졸졸 따라 나오는 백야가 보였다.
“네, 여러분! 인형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MC가 낯간지러운 멘트를 치자 백야의 고개가 아래로 숙어졌다.
사전에 전달받은 대로 세트장의 가운데 선 두 사람. 흘러나오던 음악의 볼륨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 2, 1.
- 닿은 손끝 타들어 갈 듯 뜨거워
그래 그렇게 다가와
난 마지막이 될 온기를 느껴
이번 컴백 타이틀곡인 NAN의 율무 파트가 흘러나왔다. 대형을 생략하고 나란히 선 두 사람이 안무를 시작했다.
율무는 서브 보컬이지만 춤도 곧잘 소화하는 반면, 백야는 뚝딱거리는 느낌이 없잖아 들었지만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후렴구가 끝나자 대기실에서 급하게 짠 엔딩 포즈를 취하는 두 사람. 투명한 와인 잔을 든 것처럼 나른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율무와, 부끄러움을 꾹 참고 방긋 웃는 복숭아 하나가 서 있었다.
“이야~! 이번 주 불금, 데이즈와 함께합니다!”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자리에 앉자 본격적인 녹화가 시작됐다.
* * *
승지의 옆으로 나란히 앉은 두 사람. MC가 인사를 부탁한다 하자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율무가 선창했다.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백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멤버의 돌발 행동에 율무도 덩달아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애들 긴장했어~”
범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엄마 미소를 지으며 박수 쳤다.
“앉으세요, 앉으세요.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잡아먹지 않아요. 편하게 놀다 가시면 됩니다.”
신인 티 폴폴 풍기는 두 사람에 MC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자기소개 타임.
“안녕하세요~ 데이즈 율무입니다. 저는 팀에서 서브 보컬과 최장신을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는 백야고요. 데이즈에서 메인 보컬을 맡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소개가 끝나자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들렸다.
“네, 좋아요. 그런데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거 하나만 짚고 넘어갈게요. 백야 씨.”
“네?!”
백야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세웠다.
“깨물하트. 이거 본인이 만드신 거라는데 맞나요?”
“아…….”
백야가 옆을 힐끔거렸다. 눈이 마주친 율무는 그것 보라며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 어쩌다 보니….”
백야의 대답에 술렁이는 불금 멤버들. 승지와 범이 흥분해서 앞다투어 말했다.
“대박! 오늘 엄청난 분이 나오셨네~ 저 깨물하트 진짜 엄청 많이 했거든요.”
“나도! 팬 사인회 하면 하트 그거 팬분들이 엄청 요청하세요.”
민망함에 슬슬 오르는 열기.
입고 있는 의상도 제법 두꺼워 백야의 이마 옆으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그때 백야의 왼쪽에 앉아 있던 소영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기… 괜찮으세요?”
“느, 네?”
리얼한 좀비 분장에 놀란 백야가 흠칫거리며 율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소영 씨, 왜요. 거기 무슨 일이에요?”
흥분한 승지와 범을 진정시킨 MC가 소영에게 물었다.
“아니, 책상 아래로 손을 너무 꼼지락거리시길래 슬쩍 봤는데 옆에 피가….”
카메라가 백야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염색 때문에 빨간색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린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상태를 확인한 백야는 손으로 땀을 훔치고, 지켜보던 율무의 입에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푸흡.”
“아니, 그, 그게…. 제가 염색 때문에 피만 흘리면 땀이, 아니 피가, 아니, 아아… 죄송해요.”
횡설수설하던 백야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뭘 또 죄송까지야. 휴지, 휴지 없어?”
마태가 스탭들을 향해 휴지를 받아와 챙겨 주었다.
다시 재개된 촬영. MC는 같은 주제의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 갔다.
“백야 씨, 더우시면 옷 벗어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죠?”
“네.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럼 깨물하트 한번 해 주세요.”
“아, 넵!”
지난 1년간 질리도록 한 탓에 깨물하트 요청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자동으로 준비 자세를 취하는 프로 아이돌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카메라를 찾아낸 백야는 망설임 없이 하트를 앙 깨물었다.
“아이고~”
손주의 재롱 잔치를 보는 듯한 반응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귀가 붉게 물들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는 우리의 복숭아. MC도 만족스러운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코너를 진행했다.
“네, 그럼 계속해서 진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보여 준 곡은요, 난!”
“네?”
태혁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난! 이 아닌 NAN입니다. Night After Night. 율무 씨, 어떤 곡이죠?”
“네! 저희 NAN은 첫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구애를 표현한 곡입니다. 뮤직비디오에는 저희 세계관도 담겨 있고요, 또 음~ 다양한 장르의 수록곡도 있으니까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첫사랑~ 첫눈에 반한 거군요?”
“네! 맞습니다.”
중간에 잠깐 버퍼링이 걸렸던 율무는 모른 척 능글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야 씨, 오늘 데이즈의 의상 컨셉은 뭐예요.”
“저희는 뱀파이어입니다.”
복숭아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뱀파이어면 송곳니 있어요? 이~ 해 봐요, 이~.”
MC의 말에 백야가 카메라를 향해 이를 벌렸다. 뭉툭한 송곳니를 드러낸 백야가 원샷으로 잡혔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뱀파이언가 봅니다.”
MC의 멘트가 취향인지 율무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데이즈 여러분, 이거 뭐 하는 프로그램인진 아시죠?”
“네! 알아요.”
“네~ 노래 듣고 오답 맞추기~”
“맞습니다. 노래를 먼저 들려 드리고 오답이 섞인 가사는 나중에 보여드릴 겁니다. 그럼 여러분은 기억을 잘 떠올리셔서 제작진이 바꿔놓은 오답을 찾아 정답으로 바꾼 다음, 앞으로 나와서 노래를 불러주시면 됩니다. 간단하죠?”
“네에~”
“처음에만 1배속으로 들려드리고 다시 듣기부터는 2배속이라는 점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제 정말 코너를 진행해 볼게요.”
“저기요. 지금 그 말만 벌써 세 번째야. 제발 좀 시작해 줘요.”
기다리다 지친 범이 툴툴댔다. 조금 민망해하던 MC는 곧바로 오늘의 첫 번째 곡을 공개했다.
“오늘 첫 번째 곡은요, 우리 새끼 뱀파이어들의 조상님이시죠. 바로 비바의 곡입니다!”
곡이 공개되자 스튜디오가 술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