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 * *
“또 허공 노려보고 있네. 당백이 아파?”
“안 아파.”
“말을 안 해주니까 알 수가 있어야지. 너 그러다 또 쓰러지면 형 진짜 화낸다~”
“형은 무슨. 그냥 뭐 좀 보는 거야.”
“뭘 본다고? 설마…. 너 진짜 귀신 보는 건 아니지? 원래 개는 귀신 본다고, 컥.”
“아니라고.”
최근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개복치가 자비 없는 넥슬라이스를 날렸다.
몸이 안 좋다고 왜 말하지 않았냐며 멤버들의 잔소리와 걱정을 한 몸에 받은 지도 며칠. 특히 율무는 개복치가 죽을뻔한 장면을 직접 목격해서 그런가 유독 백야의 컨디션에 집착했다.
하루 종일 붙어있었는데도 눈치 못 채 미안하다며 사과를 몇 번이나 하던지. 듣는 제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진짜 개 같은 게 누군데….’
율무의 시선은 여전히 백야를 향해있었다.
‘그래도 죽지 않아 다행인 건가.’
▷ 패시브 : <예민 베이비 개복치(R)>
백야는 최근 메인 퀘스트 실패로 ‘패시브 강화’를 한 차례 겪은 참이었다. 평범한 개복치에서 예민 베이비 개복치로 한 단계 도약.
쓰러진 백야를 둘러업고 향한 응급실에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무시고 계십니다. 최근에 잠을 잘 못 주무셨나요? 검사 결과 이상 소견 없이 모두 정상입니다. 깨어나면 데리고 가세요.」
쓰러지기 직전에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아 보였지만, 의사가 멀쩡하다는데 어쩌겠나.
어깨를 흔들어도 뺨을 꾹꾹 눌러 봐도 절대 깨지 않는 백야에 남경은 결국 그를 둘러업어 숙소까지 옮겨야만 했다.
▷ 스트레스 : 9%
잠에서 깨어난 개복치는 그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개운함을 느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전보다 빨리 오르는 것 같은 스트레스 지수뿐이었다.
‘낮춘 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요단강 하류에 진입한 개복치는 부쩍 상태창이 신경 쓰였다.
“잠은 좀 잤어?”
지한이 비타민 음료를 건네며 옆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활동 시작하면 다시 잠 못 잘 텐데. 애들 따라서 운동이라도 좀 해 보는 건 어때?”
“으응…. 해 볼게.”
지한은 가끔 민성보다도 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세상만사 관심 없어 보이는 저 무표정한 얼굴 때문인가. 백야가 지한의 올라간 눈꼬리를 유심히 살폈다.
“할 말 있어?”
“아니야, 없어. 이거 잘 마시겠다고.”
백야가 병뚜껑을 따, 한 모금 들이켰다. 지한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잠시 후 컴백 쇼케이스를 앞둔 데이즈. 멤버들은 최종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팬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ID는 앨범 예약 판매 기간 동안 데이즈의 정규 1집 구매자에 한해 추첨으로 티켓을 나눠 주겠다 공지했다. 쇼케이스라는 훌륭한 인질 덕분에 데이즈의 앨범 판매율은 눈에 띄게 올랐다.
“지한아, 팬분들 많이 오실까?”
“글쎄. 공연장이 조금 큰 것 같긴 해.”
“1층이라도 꽉 찼으면 좋겠다.”
백야와 지한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이, 문이 열리며 오늘 행사의 진행을 맡아 줄 MC가 모습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 인사를 좀 드리려고 왔는데요.”
붉은색의 숏컷이 인상적인 오늘의 MC 앨리였다.
그녀는 요즘 연예계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재치 있는 입담과 특유의 센스로 분야를 막론하고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코미디언 겸 진행자였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먼저 인사 드리러 가려 했는데….”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였다. 멤버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앨리를 향해 인사했다.
“아유~ 아니에요. 아직 준비 중이신 줄도 모르고 제가 너무 불쑥 나타났네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실례했습니다.”
데이즈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앨리는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끝으로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뜬 상태창. 백야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다.
[Q. 너의 목소리가 들려 : 110dB 이상의 함성 달성]
* * *
쇼케이스 공지가 뜨자마자 해당 일에 연차를 낸 백상은 자신이 쇼케이스에 가지 못할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한지와 윈섬을 만나 맛집 투어까지 마친 그녀는 일찌감치 공연장에 들어와 테스트 컷을 찍으며 설정을 맞추는 중이었다.
행사 시작은 8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제 5분 남짓을 남겨 두고 있었다.
“꺄아아악!”
실내가 어두워지며 전광판 위로 NAN 티저 영상이 재생됐다. 같은 영상이 세 번쯤 반복되고 난 뒤에야 공연장은 암전됐다.
멤버들로 추정되는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이내 조명이 켜지며 이번 앨범의 수록곡인 ‘새벽’ 무대가 시작됐다.
“우와~ 공연장이 꽉 찼어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데이즈의 첫 정규 앨범, NAN 쇼케이스의 진행을 맡은 앨리라고 합니다.”
“꺄아아악!”
“벌써부터 이 함성이~ 정말 대단합니다. 여러분 데이즈 무대 너무 멋있었죠.”
“네에!”
능숙하게 진행을 시작한 앨리의 뒤로 스텝들이 멤버들이 앉을 의자를 세팅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아주 뜨겁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행에 앞서서 양해를 좀 구하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앨리의 질문에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제가 알기론 데이즈의 공식 팬클럽 이름이 나이트인데, 데이즈가 나이트를 부르는 애칭이 따로 있다고 해요. 바로 나잉이!”
“꺄아아악!”
“어쩜, 너무 귀여워요~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만 데이즈 님과 함께 여러분을 나잉이라고 불러도 될지, 조심스럽게 여쭤봅니다.”
긍정이 담긴 함성이 돌아왔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슬슬 데이즈 여러분을 자리로 모셔 보도록 할 텐데요. 데이즈! 나와 주세요!”
앨리의 소개와 함께 데이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For your days!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데이즈 여러분~ 오늘이 나잉이들과 함께하는 첫 쇼케이스라고 들었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 분씩 개인 인사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율무 씨부터 부탁한다는 말에 그가 마이크를 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데이즈 율무입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조금 떨리기도 하는데, 즐거운 시간 되실 수 있도록 저희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어서 지한이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지한입니다. 정말 많은 분께서 와 주셨네요. 먼 걸음 해 주신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리고, 또 이 자리에 함께하진 못했지만 유앱을 통해 보고 계실 많은 팬분께도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수상 소감 같은 지한의 인사가 끝나고 백야의 차례가 이어졌다.
오늘만큼은 사과 코스프레를 한 복숭아가 두 손으로 쥔 마이크를 입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안녕하세요, 백야입니다. 어… 나이트 여러분, 오늘 준비한 게 정말 많으니까요 즐거운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정규 1집 NAN도 많이 들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은 민성의 차례.
“안녕하세요, 데이즈 리더 민성입니다. 정말 뵙고 싶었어요, 여러분. 오래 기다리신 만큼 정말 많은 준비를 해서 돌아왔으니까요, 기대 많이 하셔도 됩니다.”
이어서 유연의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유연입니다. 너무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나잉이와 한 공간에, 그것도 저희만 있는 건 처음이라 감격스럽고 떨리는데요. 오늘 즐거운 시간 만들어 봐요 우리.”
형들의 인사를 들으며 차례를 기다리던 막내가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청입니다! 나잉아 정말 보고 싶었어요! 우리 안무 연습도 열심히 하고 준비 엄청 많이 해서 여러분 이제 잠 못 잘 거야. 매일 우리만 볼 거예요!”
서투른 한국어로 삐악거리는 막내에 장내가 뒤집어졌다.
“네, 좋습니다~ 한 분씩 인사를 들어 봤고요, 이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보도록 할게요.”
앨리가 의자를 가리키자 멤버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우리 나잉이들과 함께하는 첫 쇼케이스라 많이들 긴장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어때요. 어제 잠은 좀 주무셨나요?”
데이즈가 서로를 보며 누가 대답할 것인지 눈짓을 주고받는 듯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당황한 멤버들에 민성이 얼른 마이크를 들었다.
“아니요. 저는 잠을 좀 설쳤어요. 뮤직비디오랑 음원도 공개되고, 또 나잉이 여러분을 만날 생각에….”
민성이 쑥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리자 앨리가 너무 귀여우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그런데 제가 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백야 씨.”
“네?”
“백야 씨가 데이즈 공식 팬클럽 나이트의 애칭을 만든 일명 ‘나잉이 창시자’시라고. 그런데 왜 혼자만 나이트라고 부르세요?”
“아… 그게…….”
백야가 입술을 살짝 씹으며 부끄러워했다. 멤버들도 같은 의견인지 말을 얹었다.
“그러게, 백도 너 왜 나잉이라고 안 해? 부끄러워?”
“당백이가 부끄러움이 많아요~”
“백야 부끄럼쟁이야!”
“아니야…!”
투닥거리는 막내즈와 백야를 은근히 감싸는 율무의 멘트에 잠시 함성이 울렸다.
“당백이? 당백이는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율무 씨?”
“저희는 당도 백 프로 복숭아를 줄여서 당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너만 그렇게 부르잖아!”
얼굴이 빨개진 백야가 도리질을 치며 제발 다른 얘기로 넘어가 달라 애원했다.
“좋아요. 그럼 나잉이 창시자를 믿고 한번 준비된 코너를 이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불러 주셔야 해요. 나잉이.”
“네! 나잉이!”
백야가 큰 결심을 하듯 두 주먹을 꼭 쥐며 힘차게 외쳤다.
“좋습니다~ 첫 번째 코너는요, 오늘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이죠. 바로 데이즈의 정규 1집 Eclipse 앨범을 소개하면서 앨범깡을 좀 해 보려고 하는데요.”
“깡?”
단어를 이해 못 한 청이 혼잣말로 되뇌자 유연이 옆에서 알려 주었다.
“앨범 뜯는다고. 개봉.”
“아~ 깡~”
“……제대로 이해한 거 맞지?”
“당근하지.”
아닌 것 같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유연이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율무와 앨리에게 집중했다.
“데이즈 여러분은 앨범 미리 보셨나요?”
“아니요, 저희도 지금 처음 봐요.”
지한이 호기심을 보이며 앨범을 집어 들었다.
“먼저 정규 1집 앨범은 두 가지 버전으로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율무 씨,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율무가 마이크를 허벅지 사이로 끼우자 공연장이 술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