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갑작스러운 비명에 민성이 토끼 눈을 뜨며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앨리가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냐 물었다.
“갑자기 팬분들께서 소리를 지르셔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나잉이 여러분 무슨 일이시죠?”
앨리가 관객석을 향해 묻자 1,500명의 목소리가 제각기 외쳐 댔다. 멤버들은 알아듣지 못한 듯 의아한 얼굴을 했으나 앨리는 귀신같이 반응을 캐치해 냈다.
“아~ 율무 씨 마이크 때문에~”
“마이크…?”
민성이 율무를 바라봤다. 허벅지 사이에 꽂혀 있는 검은색 장비는 평범했다.
“저게 왜요?”
“아닙니다, 민성 씨.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그냥 율무 씨가 너무 멋있어서 그러시는 거예요.”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하니 민성도 더 이상 의문을 갖진 않았다.
“그럼 제가 소개를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한이 율무의 입가에 마이크를 대 주었다.
“앨범은 총 두 가지 버전이에요. 헌터 버전과 뱀파이어 버전. 먼저 헌터 버전은 검은색이고 창문 뒤로 비치는 달이 흰색이네요.”
율무가 디자인은 비슷하지만 색상과 디테일이 다른 두 개의 앨범을 소개했다.
의자 위에 놓인 총이 눈에 띈다며 앨범 북을 꺼내자, 창문을 가득 채우던 달도 함께 움직였다.
“아~ CD가 달 모양이네요.”
율무가 CD를 꺼내 보여 주었다.
“비슷한데 뱀파이어 버전은 빨간색이고 총 대신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습니다. 여기는 달이 붉은색이네요.”
율무가 두 장의 CD를 나란히 들어 비교하듯 보여 주었다.
“네~ 율무 씨,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앨범 소개에 앞서서 언박싱하면 저희가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게 있잖아요?”
수록곡 소개를 드리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하고 넘어가자며 앨리가 설레어했다.
“바로 포토 카드!”
앨리가 호기롭게 외치자 백야가 호응하듯 박수 쳤다.
“백야 씨 감사합니다.”
그럼 율무 씨와 지한 씨가 포카를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며 두 사람이 앨범을 한 장씩 나눠 가졌다.
먼저 뱀파이어 버전의 율무.
“두구두구두구.”
유연과 청이 마이크를 들어 배경음을 깔아 주었다.
“짜잔~”
율무가 포카를 앞으로 내밀며 활짝 웃었다. 뱀파이어 버전의 앨범에서 나온 사진은 립스틱 지한이었다.
포카를 확인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허벅지 사이에 끼워 두었던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이 사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품명은 ‘립스틱 먹은 고양이’입니다. 저희 숙소에 거주 중이에요~”
“립스틱 고양이~”
앨리가 호탕하게 웃으며 받아 주었다.
“제가 정말 아끼는 화장품이었는데, 어느 날 촬영을 다녀와 보니 엘레강스의 얼굴이 엉망이더라고요.”
“잠시만요. 혹시 엘레강스가 사진 속 고양이의 이름인가요?”
“네. 제가 방금 지었습니다. 인상이 고급 지잖아요? 아! 그리고 이 사진 제가 찍었어요, 여러분. 저 잘했죠.”
“그럼 지한 씨가, 커헝.”
코를 먹은 앨리가 죄송하다 사과했다.
한편 지한은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얼굴로 율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런 지한의 뚱한 모습이 전광판 가득 잡혔다.
“끝났나요?”
지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끝입니다. 그런데 저 지한이 놀리는 게 아니라 뮤직비디오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마지막 장면이 정말 섹시하지 않나요? 그래서 꼭! 이 사진을 포카로 내야 한다고 제가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율무를 응원하듯 엄청난 함성이 울렸다.
“네~ 데이즈 공식 홈 마스터 율무 씨의 사진 잘 봤습니다. 그럼 이어서 지한 씨의 포카도 한번 확인해 볼까요? 헌터 버전에서는 과연 어떤 포카가 나왔을지 너무 궁금하네요.”
드디어 넘어온 차례에 지한도 포카를 공개했다.
“저는 청이 나왔어요.”
붉은색 렌즈를 낀 청이 정면을 노려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어?”
유연도 사진을 처음 보는 듯 청에게 물었다.
“화 안 났어!”
“그냥 평소 모습 아니야?”
백야는 도와주려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 말이 멤버들의 웃음을 샀다.
충격을 받은 척하는 청에 앨리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에이~ 아니에요. 너무 멋있는데요? 원래 턱선이 가는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있으면 날카롭다는 오해를 종종 받습니다.”
“맞아! 백야는 동그라미잖아.”
“뭐라는 거야. 나 안 동그랗거든? 야, 나 동그래?”
백야가 지한에게 물었다.
올라갈 뻔한 꼬리를 숨기려 입술을 살짝 말아 문 지한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
“거봐!”
“아니야! 지한이 거짓말했어!”
난데없는 얼굴형 공방전에 민성이 둘 사이를 중재했다.
“그래, 그래. 둘 다 귀여워.”
말싸움이랄 것도 없었지만 두 사람을 말리는 민성의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베테랑 베이비시터 같은 느낌이랄까.
“어리다, 어려. 너희 언제 클래?”
백야의 조기 입학이 밝혀지며 서열 4위로 올라선 유연이 막내들을 부끄러워했다.
* * *
“귀여운 놈들.”
오늘의 쇼케이스 푸드는 햄버거.
퇴근길에 포카 교환과 음식 포장까지 해 온 뱁쌔는 모니터에 속에 갇힌 최애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MC : 네! 이렇게 앨범 소개를 간단히 마쳐 봤고요. 그럼 본격적으로 데이즈 정규 1집 이클립스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한번 나눠 보도록 할게요.]
[율무 : 와아~]
[MC : 먼저, 총 몇 곡이 수록되어 있나요?]
[민성 : 열다섯 곡입니다.]
[MC : 열다섯 곡~ 지금 정규 1집 선주문량만 40만 장이라고 들었어요. 바로 직전 앨범인 WANT ME의 초동을 단번에 뛰어넘은!]
[단체 : 감사합니다~]
[MC : 정말 괴물 신인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그룹입니다.]
“오~ 40만장?”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문 뱁쌔도 함께 감탄했다. 데이즈의 NAN은 20위로 진입해 지금은 두 단계 상승한 18위에 머물러 있었다.
“WANT ME 컨셉이 넘사긴했지.”
거기다 천장을 날려 버리는 4단 고음으로 실력파 아이돌 그룹이라는 여론까지 형성됐다.
세대교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이 타이밍에, 컴백 활동만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그 자리를 쉽게 꿰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MC : 그럼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한 곡씩 소개를 할까요? 이번에는 청 씨부터.]
[청 : 네!]
잠시 후 첫 번째 곡이 흘러나왔다. 15초 정도 짧게 이어지다 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낮게 깔렸다.
[MC : 이 곡은 어떤 곡인가요, 청 씨?]
[청 : 아까 우리가 나잉이 앞에 처음 나타나면서 부른 노래고, 제목은 새벽! 사랑에 빠졌는데 나는 아직 몰라요. 근데 아침 해가 천천히 뜨는 거처럼 우리도 사랑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는 내용입니다요!]
[율무 : 입니다요? (웃음)]
[MC : 어쩐지~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청 : 오?]
[MC : 오? 호응해 주신 건가요? 감사합니다. (웃음)]
[MC : 그런데 제가 알기론 청 씨가 외국 생활을 굉장히 오래 하셨다고 들었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세요. 실례가 아니라면 존댓말은 어느 분께서 가르쳐 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청 : 당근하지요! 얘요.]
청이 옆을 가리키자 유연이 마이크를 들었다.
[유연 : 오해입니다. 저는 절대로 이렇게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청 : 유연이 모르겠으면 제일 뒤에 ‘요’ 만 붙이라고 했어요.]
[유연 ; 아니, 그건 맞는데. 쥐나 개나 붙이면 안 된다니까?]
[청 : 쥐나 개? 내가 바보야? 동물한테는 안 해. 이거 또 나 속이려고 시동 건다. 난 백야가 아니야.]
[백야 : 나?]
[MC : 잠시만요. 지금 두 분 싸우시는 거 아니죠?]
[지한 : 아니에요. 항상 저러고 놀아요. 그런데 이제 백야를 곁들인….]
[백야 : 아니에요. 저는 저 사이에 잘 끼지 않아요.]
[유연 : 뭐야, 지금 선 긋는 거야? 우리가 부끄러워?]
[청 : 부끄러워?]
[백야 : 그, 그런데 요즘 청이 한국어가 정말 많이 늘었어요. 제가 같은 방 써서 알아요.]
“아악! 귀여워!”
대답하기 곤란한지 냅다 말을 돌려 버리는 최애에 뱁쌔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청이랑 백야랑 같은 방이라고? 지한이, 유연이랑 같은 방 아니었나?”
그러나 뱁쌔는 데이즈가 최근 숙소를 이사했다는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청 : 맞아. 멤버들이 한국어 잘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민성 : 그치. 아무래도 우린 한국인이니까….]
민성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앨리가 무슨 대답이 그러냐며 웃었다.
[MC : 민성 씨가 청 씨를 굉장히 잘 받아 주시는 것 같아요.]
[민성 : 동생이니까 챙겨야죠.]
[MC : 정말~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다음 곡 들려 주세요.]
[유연 : 네, 이번에는 제가.]
유연의 두 번째 트랙 소개를 지나 민성의 차례가 다가왔다. 이번에 소개할 곡은 타이틀곡인 NAN.
[민성 : 이번 타이틀곡이죠. 뭄바톤 트랩 장르로 데이즈의 다채로운 음색이 돋보이는 곡입니다.]
[MC : 뭄바톤~ 내용은요?]
[민성 : 저희가 뱀파이어를 보고 첫눈에 반해요. 그런데 인간이랑 뱀파이어는 수명이 다르니까 나도 너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달라. 너와 같은 시간을 걷고 싶다 애원하는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MC : 이야~ 정말 완벽합니다. 나잉이 여러분, 서사가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며 앨리가 손을 들었다.
[MC : 아시는 분이라면 순서 상관없이 아무나 대답해 주셔도 됩니다.]
[MC : 제가 자료를 좀 조사하다가 데이즈 세계관 정리 글이라는 걸 봤어요. 약간 트럼프 카드 세계관인 것 같던데, 어려워하는 분들이 종종 계시더라고요. 여기에 대해서 조금 여쭤봐도 되는지….]
앨리의 질문이 끝날 때쯤 민성이 마이크를 들었다.
[민성 : 음…. 그냥 마피아 게임이라고 이해하시면 편할 것 같아요. 저희 중에 마피아가 있습니다.]
[MC : 마피아요?]
[민성 : 제가 봤을 땐 지한이 아니면 유연이? 아니다, 백야.]
민성은 자신의 이름을 제외한 멤버들의 이름을 한 명씩 언급했다.
[MC : 결국 본인 빼고 다 의심이 간다는 말씀이시잖아요.]
[민성 : 맞습니다. 전 시민이에요.]
[백야 : 아니야. 나도 시민이야.]
백야가 순진한 눈망울로 민성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