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110화 (110/340)

제110화

아이돌 그룹이 음악방송 1위를 하기까지 걸린 기간은 일주일부터 3년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아무리 데이즈가 반응이 좋다고는 하지만, 음원 차트는 변수가 많은 영역이라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하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데이즈의 컴백을 시작으로 반응이 온다 싶은 비슷한 연차의 아이돌은 죄다 컴백을 예고한 상황이었다. 하반기에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그룹의 컴백이 대거 예상됐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한 달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음악 방송 1위…….’

내일 케이블 방송의 첫 컴백 무대를 앞둔 백야는 마음이 무거웠다.

마침 멤버들은 구내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해결하는 중이었는데, 스테이크를 찌르기만 할 뿐. 정작 먹지는 않는 백야에 민성이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응?”

“집중해 집중. 네 밥에 집중하란 말이야. 너 그거 다 먹을 때까지 못 일어나.”

“으응….”

네 체력 증진과 힘들게 농사지으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감사히, 남김없이 다 먹으라는 리더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사이 민성의 옆자리에 앉은 청은 샐러드에 든 오이를 골라내고 있었다.

“으으.”

벌레라도 나온 것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는 막내에 지한의 시선이 접시를 향했다. 포장 과정에서 섞여 들어온 것 같았다.

“왜?”

“누가 나를 죽이려고….”

자칫하면 오이에게 암살 시도를 당할 뻔한 청은 입맛이 떨어진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I hate cucumber.”

편식하는 애새, 아니 막내를 물끄러미 보던 지한이 그의 접시 위로 손을 뻗었다.

“오!”

말없이 오이를 대신 먹어 준 지한에 청이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진국이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너튜브!”

청은 어쩌다 한 번씩 어려운 단어를 쓰곤 했는데 출처 대부분은 너튜브였다. 그리고 청의 입에서 나오는 낯선 단어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단연 개복치였다.

백야의 날카로운 눈빛이 맞은편을 향했다.

“너튜브?”

“키즈 모드 맞아!”

올 초, 찐 막내 대결에서 ‘잼민이 PTSD’를 얻은 개복치는 청의 영상 시청 제한을 아직 풀어 주지 않은 상태였다.

“수상한데….”

“Why! 백야는 의심이 너무 많아. 의심 많이 하면 대머리 된다 그랬는데.”

“아니거든? 그리고 나 머리숱 많아!”

“알아. 햄스터는 털발이잖아.”

“나 햄스터 아니라고!”

“햄스터 싫어? Okay! 그럼 다랑지 해!”

지옥에서 온 E와 극단적 I의 조합. 안 맞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었다.

* * *

- 데이즈 엔카 사녹 폼림이넹! 기억하자 정오 12시!!

└ 초멘인데요 폼림이 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공방은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나요ㅜㅜ

└ 멜림 : 메일 올림픽, 폼림 : 폼 올림픽, 댓림 : 댓글 올림픽. 선착순으로 폼 작성해서 제출하는 걸 말해요:) 데이즈 공홈 게시판 들어가 보시면 사녹 신청 공지 올라와 있어요~

└ 그럼 그거 신청하면 데이즈 볼 수 있나요?

└ 명단 당첨돼야 갈 수 있어요!

타임라인을 둘러보던 뱁쌔.

‘사녹’을 검색하다 우연히 본 한 개의 글에 그녀는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 일 같지 않은걸.’

저만큼이나 사녹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보이는 이름 모를 나잉이가 안쓰러웠지만, 그녀도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나라 님 : 뱁쌔 님! 텍스트 대치 설정하셨어요?]

[나 : 텍스트 대치요..?]

[나라 님 : 자동 완성이용! 선착순으로 자르는 거라 스피드가 생명이거든요!]

그녀는 이름, 전화번호, 생년월일은 무조건 필수 사항이니 누르기 쉬운 단어로 자동 설정을 해 놓길 권장했다.

본인은 ‘ㅇㅇ’을 쳤을 때 이름이, ‘ㄴㄴ’을 쳤을 땐 핸드폰 번호가 나오는 식으로 설정해 두었다고 했다.

“과연 나라 님…!”

뱁쌔는 또 한 번 감탄했다.

[나라 님 : 아무튼 12시 정각에 링크 열리니까 바로 들어가셔서 무조건 빨리! 저희 꼭 애들 보러 가요ㅠㅠ]

[나 : 네!! 최선을 다해 볼게요!]

나라와 뱁쌔는 자신의 최애를 닮은 이모티콘으로 결의를 다졌다.

이제 폼림까지 남은 시간은 1분 남짓. 뱁쌔의 손가락이 긴장감에 싸늘하게 식었다.

[11:59:59]

[12:00:00]

핸드폰 상단의 시계가 바뀜과 동시에 링크를 누른 뱁쌔. 최근에 바꾼 5G 핸드폰은 돈값을 하듯 막힘없이 서버를 뚫어 냈다.

나라와 연락한 순간부터 공홈의 공지사항을 읽고 또 읽은 데다 꿀팁까지 전수받은 그녀는 막힘없이 폼을 작성해 내려갔다.

[▶ 제출하기]

다른 항목과 다르게 데이트 피커로 날짜를 선택해야 하는 생년월일에서 잠깐 막히긴 했으나, 그녀는 침착하게 성공해냈다.

[나라 님 : 뱁쌔 님! 하셨어요?!]

[나 : 네네! 했어요ㅠㅠㅠ]

당장 컴백 첫 방송이 내일이었으니 데이즈 무대의 사전 녹화는 높은 확률로 새벽이나 이른 아침일 게 분명했다.

‘이제는 운에 맡길 수밖에.’

그녀는 5분에 한 번씩 공식 홈페이지를 새로 고침하며 명단이 뜨길 기다렸다.

그리고 6시간 후.

데이즈 공식 홈페이지에 첫 사녹 명단이 올라왔다. 나라는 64번 뱁쌔는 281번으로 두 명 다 폼림에 성공했다.

“꺄아악!”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 끝자리를 확인한 뱁쌔가 기쁨에 소리쳤다. 거의 마지막에 가까운 번호였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나 : 나라 님! 저 됐어요ㅠㅠㅠ 근데 281번...(눈물)]

[나라 님 : 미친!! 괜찮아요! 어차피 선착순이라 명단 번호 의미 없음. 지금 당장 나오세여!!!]

[나 : 헉 정말요? 네네! 그럼 지금 바로 나갈게요!]

[나라 님 : 신분증, 앨범 2종, 음원 다운로드 내역서, 음원 사이트 본인인증 확인서. 이렇게 꼭! 꼭! 가지고 오셔야 해요!]

[나라 님 : 돗자리는 제 거 같이 써요!]

‘돗자리…?’

난데없는 준비물에 의아했지만 뱁쌔는 티 내지 않았다.

[나 : 네네! 그럼 이따 봬요!]

녹화는 새벽 4시 예정.

나라는 자신이 말한 물건 중에서 하나라도 빠뜨렸다간 입장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었다.

준비물을 재차 확인한 뱁쌔는 가방을 꼼꼼히 잠그고 옷장 앞에 섰다. 아무리 날이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야외 밤샘은 처음인지라 뱁쌔는 옷을 두둑이 챙겨 입었다.

“드디어 춤추는 백야를 맨눈으로 볼 수 있어!”

아직 공식 응원 봉이 없는 건 좀 아쉬웠으나 타임라인에 흘러들어온 글들을 보면 조만간 나올 것 같았다.

뱁쌔는 부푼 기대를 안고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 * *

- 나도 공방.. 나도 데이즈 보고 싶어.... 나는? NAN? 난 왜 애들 얼굴 못 봐???

그 시각 폼림에 광탈한 복쑹의 위치는 따뜻한 방 안 침대 위.

백야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의상은 어떤 걸 입었는지, 안무가 힘들진 않은지. 머릿속을 지배한 최애 생각에 복쑹은 잠이 오질 않았다.

사녹 후기를 보기 전까지 눈을 감긴 글렀구나 싶은 그녀는 결국 밤을 새우기로 했다. 마침 오늘은 데이즈의 자체 컨텐츠가 공개되는 날이기도 해서 시간은 잘 갈 것 같았다.

“제발 영상 길었으면.”

파란짹에서 너튜브로 넘어간 그녀는 자정이 되자마자 페이지를 새로 고침했다.

[뱀파이어 성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 Vampire Castle #1]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음산한 고급 저택. 장미 넝쿨로 뒤덮인 담벼락 위로 유연이 앉아 살며시 미소 짓고 있는 썸네일이었다.

사람을 홀리는 마성의 얼굴.

복쑹은 이 영상을 마주한 사람 중 과연 누르지 않고 배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장담했다.

길이는 30분이 조금 넘었고 영상은 흑백 화면으로 시작됐다.

뱀파이어 현상수배 포스터를 보고 있는 헌터 데이즈. 그런 멤버들 앞으로 의문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각자 흩어져 뱀파이어를 쫓던 데이즈는 초대장에 적힌 장소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는데. 제일 먼저 도착한 민성이 거대한 철문을 열며 들어가는 장면을 끝으로 컷이 전환됐다.

[민성 : 분위기가 음산한 것이 아무래도 이곳이 뱀파이어의 본거지인 듯싶은데….]

[민성 / 창술사 / 길드장]

뱀파이어 헌터 길드 ‘DASE’의 수장 민성이 길고 화려한 창을 어깨에 걸친 채 등장했다.

[민성 : 오늘에야말로 현상금을,]

[청 : 멈춰! 현상금은 내 거야!]

[청 / 궁수 / 막내]

뒤를 이어 등장하는 또 다른 헌터. 그는 화살집과 활을 등에 메고 있었다.

[민성 :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대장님한테….]

[청 : Boss 바보야? 머리에 피 마르면 죽어.]

1개월 차 신입에게 하극상을 당한 길드 수장이 뒷목을 짚었다.

[지한 : 다들 살아 있네? 소식이 없길래 진작에 죽은 줄 알았는데.]

[지한 / 저격수 / 조용한 암살자]

지한이 기다란 총을 어깨에 걸친 채 등장했다. 시니컬한 눈빛에 민성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구겨졌다.

[민성 : 죽길 바란 것 같은데?]

[지한 : 설마.]

이어서 유연의 등장.

지한의 뒤를 따라 들어온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빙글빙글 총을 돌리고 있었다.

[유연 : 뭐야, 왜 다들 여기 있어? 초대장 나만 받은 줄 알았는데.]

[유연 / 올라운더 / 에이스]

연이은 하극상에 보스는 마음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그러나 아직 끝판왕이 남아있었으니….

[민성 : 저건 또 뭐야?]

[율무 : 비티메 파스칼리로데~]

[율무 / 사제 / 행동대장]

검은 사제복을 입은 율무가 성가를 부르며 등장했다. 한 손에는 십자가, 다른 한 손에는 향로를 들고 있었는데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거침없었다.

[청 : 연기 엄청나다!]

[율무 : 내가 또 한 연기 하지~]

[청 : 모라는 거야. 손에 있는 거, Smoke!]

[율무 : 아~ 이거? 그럼 이 연기라고 말해 줘야지~ 좋다 말았네.]

[지한 : 안에 뭐 들어 있는 거야?]

[율무 : 드라이아이스. 제일 큰 거 넣었어, 이만한 거.]

율무가 커다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마지막 주인공.

[백야 : 배, 뱀파이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백야 / 검사 / 칼잡이 햄스터]

카메라를 향해 어설프게 칼을 겨눈 소동물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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