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118화 (118/340)

제118화

* * *

정신없는 컴백 주를 보낸 데이즈. 그러나 둘째 주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숙소에 들어간 지 4시간 만에 스케줄을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탄 멤버들은 남경이 뽑은 헤어·메이크업 순서에 맞춰 한 명씩 차에서 내렸다.

늘 그렇듯 개복치 퍼스트.

제가 뽑지 않아도 이 세계에서 안 좋은 건 죄 다 자신의 몫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백야는 이젠 억울하지도 않았다.

반쯤 감은 눈으로 비척거리며 내리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워 보이던지. 남경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백야에게 사과했다.

“저… 미안하다 백야야. 형이 다음번에는 밑장 빼기를 해서라도 꼭 너를 마지막으로 뽑을게.”

“괜찮아요. 제 운명이 이런 걸 어쩌겠어요.”

“뭘 또 운명씩이나….”

“안 그래도 마지막 번호 뽑힌 애들마다 저한테 와서 바꿔준다 그랬는데 제가 괜찮다 그랬어요.”

말로는 괜찮다면서 터덜터덜 샵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매우 처량했다.

그렇게 여섯 명 모두 백야와 같은 과정을 거쳐 뽀송해진 상태로 도착한 곳은 강남의 한 스튜디오.

“안녕하세요. 데이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피곤한 기색은 훌훌 털어 버린 멤버들이 마주치는 스텝들마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요즘 핫한 아이돌이라면 무조건 찍는다는 음악방송 예고편 촬영에 데이즈는 조금 들떠 보였다.

“여기 콘티랑 대사고요. 촬영 들어가려면 시간 좀 걸릴 테니까 멤버분들은 천천히 대사 숙지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매니저님은 잠시 저쪽에서 얘기 나누실 수 있을까요?”

“네. 민성아 애들 잘 챙겨.”

데이즈가 있는 곳은 한 케이블 방송국의 지하 스튜디오. 구석에 철거된 구조물이 쌓여있는 걸 보아 잘 쓰지 않는 곳인 것 같았다.

“여기서 촬영한다고? 우리 컨셉이 뭐길래 이런 데에서….”

유연이 민성의 옆으로 붙으며 콘티를 들여다보았다. 1분짜리 영상임에도 콘티가 제법 자세했다.

“율무 형 대사가 제일 기네?”

“나? 어디 봐.”

유연의 말에 하나둘씩 주위로 몰려들었다. 대부분 한 줄 분량의 대사를 받은 멤버들과 달리 율무와 유연은 분량이 제법 됐다.

민성이 걱정 어린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너 이거 다 외울 수 있어?”

“암기력 하면 나율무지~ 걱정 마. 내가 신들린 연기력을 보여주지.”

“신들린 발연기겠지….”

솔직히 연기력이 다들 거기서 거기였지만, 하필이면 제일 어색한 두 사람이 당첨될 건 또 뭐란 말인가.

민성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 율무는 감독님께서 제 연기력을 알아보신 게 틀림없다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유연은 조금 자신 없어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뭐….”

다행인 건 오늘 촬영이 딱히 연기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와! 나는 대사가 거의 없어.”

율무가 착각의 늪에 빠진 사이, 백야는 자신의 짧은 대사를 확인하곤 좋아하고 있었다. 연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긴장으로 굳어있던 얼굴이 단번이 피었다.

“대사가 뭐길래?”

유연이 콘티를 자세히 보았다.

“이게 끝이라고? 아니야, 너 뒤에 더….”

“없어.”

민성이 고개를 저었다. 백야를 보는 유연의 눈이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난 끝! 벌써 다 외웠어.”

외울 것 자체가 없었던 주제에 백야는 율무보다 더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한과 눈이 마주치자 그를 격려하듯 등을 툭, 건드렸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그러나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지한은 대답이 없었다.

“왜? 아, 나 방금 좀 눈치 없었나? 미안. 요즘 청이랑 계속 붙어있다 보니까….”

“너 예능 울렁증 있다고 했잖아. 이건 괜찮아?”

“엥? 그게 무슨 소리… 가 아니라 내가 그런 말을 했지. 맞아.”

지난주쯤이었나. 데이즈의 첫 컴백 예능 스케줄이 있던 날, 멤버들은 남경의 등에 업혀 온 백야를 보고 많이 놀랐었다.

체력이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빌빌거릴 뿐, 쓰러진 적은 없었기에 달리 신경 쓰진 않았는데. 창백하게 질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지한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불금> 녹화를 기점으로 데이즈의 컴백 활동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어 일정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쇼크 증상인 것 같지만,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말에 회사에서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스케줄 조정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백야는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오늘 스케줄. 생각해 보니까 굳이 따지면 예능 쪽인 것 같아서.”

제 앞으로 잡힌 예능 스케줄을 듣자마자 사색이 돼서는 본인은 예능에 소질이 없다며 필사적으로 어필하기까지 했다.

복통을 호소하며 이마를 짚던 발연기를 똑똑히 기억하는 지한은 백야가 신경 쓰였다.

“음악방송 관련이긴 해도 콩트 같은 거잖아.”

쓰러지기까지 한데다가 저렇게 싫어하는데 혹사할 필요가 있냐며 멤버들은 백야의 예능 스케줄을 나눠 가졌다.

하지만 오늘은 조율도 할 수 없는 단체 촬영. 지한은 백야의 예능 울렁증이 도지는 건 아닌지 불쑥 걱정이 들었다.

“너 병원 다녀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며칠이라니.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저 단호한 얼굴을 보니 차마 반박할 수는 없던 백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근데 나 진짜 괜찮아.”

“괜찮긴. 아까까지 표정 굳어있었잖아.”

“그건 연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니까 걱정이 돼서 그랬지. 나 대사 딱 한마디 있,”

“한백야. 거짓말 안 해도 돼. 다들 네가 모르는 척해 주길 원하니까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는 정말로 괜찮,”

“됐고.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힘들면 바로 말하라고.”

죽다 살아난 효과는 굉장했다.

‘예민 베이비 개복치’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면서 멤버들의 착각계 또한 한층 견고해진 느낌이었다.

* * *

D-3.

데이즈의 컴백 첫 팬 사인회가 어느덧 3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 발표 나지 않은 당첨자 명단에 복쑹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 SNS에 당첨자를 서치해 봐도 ID의 늦은 일 처리를 욕하는 팬들의 불만뿐이었다.

“그래서 당첨자 발표는 언제 나냐고!”

스팸, 광고 전화 등등. 오라는 당첨 문자만 빼고 온갖 것들이 그녀의 핸드폰 알람을 울리고 있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현타가 왔지만, 누구도 복쑹의 복숭아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다.

1분에 한 번씩 SNS를 새로 고침 하던 복쑹. 그런 그녀의 피드에 뱁쌔가 리짹한 케이블 음악방송의 이번 주 예고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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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COUNTDOWN] Teaser

★WANTED★ 엔카 라인업을 찾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임페리얼 설렘 유발 #러브유 청순 대명사 #블랑 소년에서 남자로 #BB9 컨셉 장인 #DASE 차세대 루키 #S.AM

이번 주 목요일 저녁 6시 엔카 놓치지 마세요~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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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이게 뭐야?”

복쑹이 홀린 듯 영상을 재생했다.

하얀 셔츠에 가면을 쓴 인영(누가 봐도 지한)이 난간을 내려다보다 보며 엄청난 대사를 뱉었다.

“뱀파이어 성에 헌터들의 등장이라…. 재밌어지겠네.”

지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그의 손에 들린 ‘엔카 라인업’ 명단이 잠깐 화면에 잡혔다.

[엔카 라인업을 찾아라!]

건물 아래에 모인 검은색 제복을 입은 데이즈. 성문을 동시에 통과했지만 뱀파이어의 주술에 걸린 멤버들은 둘씩 흩어지고 말았다.

“청. 느낌이 안 좋아.”

“지한! 위에!”

청과 지한이 날아오르는 검은 물체를 동시에 조준했다.

타앙-!

청의 화살과 지한의 탄환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 박쥐 인형. 다리에 묶인 쪽지를 풀어 보자 이번 주 엔카 라인업인 ‘임페리얼’과 ‘러브유’의 신곡이 짧게 소개됐다.

“이얍! 내 창을 받아라!”

“얍!”

그 시각 민성과 백야는 미라를 마주쳤다. 플라스틱 장난감 창과 칼로 미라를 무찌르자 붕대가 풀리며 두 번째 라인업인 ‘블랑’과 ‘BB9’가 소개됐다.

“사제님, 여기 같은데요.”

장면이 바뀌며 허공에 총을 쥔 유연과 향로를 든 율무가 보였다.

“헌터님, 셋 하면 열겠습니다.”

“네.”

비장한 얼굴로 ‘뱀파이어 방’이라 적힌 대기실 문을 여는 율무. 그러나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유연이 테이블에 놓인 명단을 집어들자 ‘S.AM’과 ‘어거스트’의 영상이 소개됐다.

“사제님! 잠깐 이것 좀 보세요.”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 든 유연이 율무에게 달려갔다. 데이즈의 컴백 단체 사진 위로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NAN. Thu. 666.]

“아니 이건…! 사탄의 언어입니다.”

“사탄이요? 갑자기?”

유연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여기는 뱀파이어 성이 아니었냐 물었지만, 율무는 문자를 해석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Night After Night. 목요일 밤 6시에 엔카운트 다운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라인업 명단을…!”

“지금 다른 분들 연락돼요?”

심각해진 유연이 무전 이어폰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통신이 끊어진 것 같아요.”

“어둠의 기운이 전파를 방해하는 것 같아요. 서둘러야 합니다. 얼른 멤버들과 합류해서 뱀파이어가 엔카에 도착하기 전에 잡아야 해요.”

율무와 유연이 방을 뛰쳐나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났다.

오글거리지만 귀여운 예고편에 복쑹의 광대는 내려올 줄 몰랐다. 뚝딱거리는 발성으로 주어진 대사를 소화하려 애쓰는 모습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은 신인 시절이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타임라인은 멤버들의 귀여움과 국어책 연기를 앓는 글들로 넘쳐났다.

- 엔카 미친놈들 애들한테 이런 거 시켜 주면 너무 감사합니다ㅠㅠ 엔카에 압도적 감사

- 율무 사제복 박제시켜

- 백야 얍!! 한 번 하고 빨개진 거 너무 귀여워서 죽고 싶다 (백야 귀 캡쳐.jpg)

- 율무랑 유연이 연기 무슨 일이야ㅋㅋㅋㅋㅋㅋㅋ

└ 무대 너무 잘해서 신인 맞는지 의심스러웠는데 오늘 신인 인증 제대로 하네ㅋㅋㅋㅋ

- 지한아 너 왜 연기 잘해...?

- 저 뱀성헌등 대사할 사람 어떻게 뽑았을까? 가위바위보 했겠지? 지한이가 먼저 하겠다고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ㅋㅋㅋ 애들아 유앱에서 비하인드 풀어 주라

- 와 데이즈 컴백하자마자 1위 후보... 너무 짜릿하다

└ 회사빨 사재기

- 그래서 팬싸 명단은 언제 뜸?

- 토끼 왜 저렇게 신났냐고ㅋㅋㅋㅋ 찐텐같은데 (미라 붕대 푸는 민성.gif)

- 청이 형들 이름 막 부르는 거 이제 너무 자연스러워ㅋㅋㅋ 멤버피셜 자기 불리할 때만 형이라 한다고... (귀여워 짤.jpg)

넘쳐나는 떡밥에 데이즈의 컴백이 새삼 실감 났다.

복쑹은 잠시 팬싸를 잊고 SNS를 달리는데 마침 핸드폰 상단에 미리 보기가 나타났다.

[(Web발신) DASE Eclipse 팬 사인회 당첨을 축하…]

“꺄아아악!”

팬 사인회 당첨!

너무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집어 던진 복쑹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흥분의 몸부림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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