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 * *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 머리만 댔다 하면 기절하는 데이즈였지만, 백야는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일어난 백야가 비어 있는 옆 침대를 바라봤다. 텅 빈 매트리스와 벽에 이상하게 쏠려 있는 이불 더미가 시선을 끌었다.
‘어디 갔나…?’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온 백야가 청의 침대를 기웃거리는데, 이불 더미 안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뭉쳐 있는 이불이 얕게 들썩이고 있었다.
“…뭐야? 왜 이러고 자?”
침대와 벽 틈 사이에 끼었나 싶을 정도로 벽에 붙어 있는 청에 백야는 당황했다.
‘…낀 건가?’
틈 사이에 끼어서 못 나오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된 백야가 청의 이불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야, 편하게 자.”
그러나 저를 건드리는 손길에 칭얼거리던 청은 더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아침마다 몸이 뻐근하다며 엄살을 부리던데, 오늘에서야 그 원인을 알아낸 개복치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저러고 자니까 몸이 찌뿌둥하지!’
핸드폰을 가져와 소리 나지 않게 증거 사진을 남긴 백야는 창가로 걸어갔다.
‘나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커튼 너머 야경이 말도 안 되게 예뻐서 현실 자각이 저절로 됐다.
‘창문을 열었는데 빨간 벽돌 뷰가 아니라니….’
게임에 동기화되고 이 생활도 제법 적응됐지만, 백야는 어느 것 하나 진짜 제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가수라는 직업도 멤버들과의 관계도.
깨어나면 사라질 한낱 꿈같아서 이따금 아쉽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게임 속이니까 이게 영원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멤버들이 날 잊어버리는 건 좀 슬플 것 같은데….’
혼자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지는 백야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박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난 거야. 깜빡 잠이 든 난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진 거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만큼 신빙성 있는 추리가 없었다.
‘근데 맛도 느껴지고 꼬집으면 진짜 아프단 말이지…. 이것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힘들게 살진 않았을 텐데.’
잠시나마 방탕한 아이돌의 생활을 꿈꿔 본 백야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콩콩 두드렸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제가 음악방송 1위를 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시스템 이거 진짜 뭘까.’
패시브가 강화될 때 겪은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두 번 다신 겪고 싶진 않을 만큼.
‘그래. 처음부터 죽지 않고 진짜 삶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였으니까. 정신 차리자.’
흐려질 뻔한 초심을 되찾은 백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다 불현듯 걱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여기서 군대 가기 전에는 끝나겠지…?’
나름 버틸만했지만 두 번은 가고 싶지 않은 그곳에 백야는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좋은 생각. 1위 하는 생각만 하자.’
너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던 유연의 잔소리가 떠올랐다. 백야는 그 의견에 십분 공감하며 다시금 이마를 박았다.
차가운 유리가 닿을 때마다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열 번쯤 박았을까. 백야는 이마 위로 빨간 자국 하나를 만들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다시 잠이나 자자.’
용기를 얻은 개복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반짝이는 야경 위로 사람 얼굴 같은 게 둥둥 떠 있었다.
순간 제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데 이번에는 형체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끕.”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개복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고!]
[스트레스 지수가 ‘주의’ 단계입니다. 78%]
스트레스가 수직 상승하며 나타난 경고창은 덤이었다.
‘미, 미친. 분명 얼굴이 떠 있었어. 나를 보고 있었다고.’
실제 귀신을 마주했다는 충격에 공황 상태에 빠진 백야가 웅크린 몸을 떨었다.
‘내가 귀신 진짜 있다고 했잖아, 멍청이들아. 귀신 진짜 있다고! 이 바보 같은 놈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귀신을 무서워하냐며 저를 놀리던 유경과 재현을 속으로 저주했다.
그러다 귀신이랑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못 본 척해야 한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개복치는 필사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신은 이런 제 간절함도 몰라주고 기어이 백야를 건드렸다.
“뭐 해? 나랑 놀자.”
“으아악! 저리 가악!”
정수리를 꾹 누르는 손가락에 혼비백산이 된 백야가 청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야, 처, 청. 일어나 봐…. 어?”
차마 눈은 뜨지 못하고 백야는 손 감각에만 의존해 이불을 파헤쳤다. 그러나 한참을 더듬어 봐도 이불만 잡히고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틈 사이에 끼어서 자더니 기어이 떨어졌구나 싶은 백야가 청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꼭 찾을 때 없다며 울먹인 개복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 왔다.
그사이 발이 달린 귀신은 백야를 쫓아와 한 번 더 그를 건드렸다.
“왜 못 본 척해? 나 봤잖아.”
“끕. 저리 가. 제발.”
공포에 질린 복숭아는 귀신의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What the….”
황당할 뿐인 상황에 외국 귀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자다 깬 것도 억울한데 기껏 놀아 줄까 물어봤더니 제 침대를 강탈해 가는 햄스터라니.
“이거 내 침대야, 바보야!”
귀신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이불을 홱 잡아당겼다. 그러나 귀를 틀어막은 탓에 백야는 청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불만에 가득 찬 귀신이 백야를 강제로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이마의 식은땀을 보곤 잠시 멈칫했다.
“…백야 추워? 아파?”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결국 바닥에 앉은 청은 침대 위로 턱을 얹으며 친구를 빤히 바라봤다. 햄스터가 먼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햄스터가 손을 내리며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너 이씨…! 어디 있었어!”
“나 여기 있었는데. 바닥에.”
청이 말하는 바닥과 백야가 생각하는 바닥은 조금 달랐지만, 백야는 조금 전보다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Did you have a nightmare?”
“…뭐라는 거야.”
“어… 나쁜 꿈?”
단순한 악몽 정도가 아니었다.
숙소에 귀신이 사는 것도 모자라 무려 이 방에 나타나기까지 했는데 악몽 따위랑 비교할 수 없었다.
당장 오늘 밤부터 침대를 버리기로 마음먹은 백야는 벌떡 일어나 청을 방 밖으로 끌어냈다.
“나와, 일단 나와.”
“안 자? 우리 아직 한 시간 잘 수 있는데….”
“바보야! 지금 잘 때가 아니라고. 내가 저 방에서 귀신을 봤단 말이야.”
“Really? 근데 나는 못 봤잖아.”
“그야 너는 자고 있었으니까!”
다른 방에 있는 멤버들이 깰세라 백야가 낮은 목소리로 청을 원망했다.
“근데 백야. 나는 이제 어른이라 귀신 안 무서워.”
“웃기고 있네.”
“…진짜야. 근데 백야가 무서우니까 여기 같이 있어 줄게.”
막내즈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우리 팀에 Ghost 보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나….”
“망돌의 혼이 붙은 걸지도 몰라.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했어.”
백야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했다.
“백야 지금 약간 Crazy Man. 이러지 말고 병원 가.”
“병원을 갈 게 아니라 단체로 굿을 해야 할 판이라고 지금. 아무래도 점집을 가야 할 것 같아.”
“Good?”
“그 굿 말고!”
보다 못한 청이 부엌에서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왔다.
“에휴. 이거나 먹어. 마미가 나 아가 때 해 주던 거야.”
“…고마워.”
백야는 조금 감동했다.
“근데 백야. 귀신 왜 이렇게 무서워하나.”
졸지에 끌려 나온 청이 졸린 눈으로 웅얼거렸다. 반면 귀신을 마주한 뒤로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한 백야는 대답하길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너 가위눌려 봤어?”
“부엌에 있는 거?”
“아니, 그거 말고.”
“Scissors 아니야?”
“영어 쓰지 말라고.”
“그럼 가위가 몬데….”
청이 억울해했다.
“잠들었을 때 귀신이 괴롭히는 거. 내가 어렸을 때 몸이 좀 약했거든.”
“그게 왜 가위야? 백야 지금도 약하니까 오늘도 가위가 그랬나?”
“아니, 이번에는 맨정신으로 봤다니까? 그리고 나 지금은 완전 세거든?”
“No. 백야 완전 한 입 거리.”
키즈 모드를 풀어놨더니 어디서 또 이상한 말을 배워 온 청에 백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봐도 어쩔 수 없어. 백야는 좀 강해져야 할 필요가, 악!”
결국 솜 주먹이 허벅지를 강타했다.
“아파… 조폭 햄, 다랑지….”
“아무튼. 그래서 잘 때도 옆에 누가 있어야 하고 항상 내가 먼저 잠들어야 했지.”
“백야 참 피곤한 아가였네….”
“그러다 어느 날 절에 갔는데, 딱 봐도 비범하게 생기신 스님이 학교를 1년 빨리 보내라 했다 그랬나? 확실히 그 뒤로 가위눌린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
“Wait. 갑자기 스님은 왜 나오나?”
어린 시절 스님과 관련된 에피소드라니. 무협 소설 주인공이나 겪을 법한 스토리에 청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 스님은 중드에 많이 나오는데….”
“몰라, 나도 엄마한테 들은 거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질문 금지야.”
“알겠어….”
찐 막내 대결 이후 청은 백야에게 완전히 잡혀 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완전 어렸을 때는 귀신을 좀 봤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거부감이 들 리가 없잖아.”
“…….”
청이 말없이 백야에게서 멀어졌다.
“아니, 추측이잖아 추측. 그랬던 것 같다고. 영어로 하면 그 뭐냐, Maybe?”
“아니야, No. 그냥 거기 있어. 가까워지지 마.”
“저 쫄보…. 야, 혹시 나 이거 트라우마 뭐 그런 건가?”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내가 물어봤잖아.”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제가 말하고도 어이없는 질문에 백야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는 넌 귀신이 왜 무서운데?”
“난 이제 안 무서워. 그게 어른이니까.”
청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럼. 나중에 귀신의 집 갈 일 생기면 넌 혼자 들어가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