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확실히 아까보다 피가 덜 나는 것 같긴 한데.’
살짝 벌어진 입으로 숨을 쉬던 백야가 휴지 냄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율무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피하며 자책했다.
‘스트레스 지수 확인할 생각을 왜 못 했지…. 왜 쟤랑 있을 때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율무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모처럼의 컴백인데 멤버가 툭하면 쓰러지고 가만히 있다가 코피를 쏟아 내는 개복치라니.
죄 없는 휴지만 뜯던 백야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몇 시야? 우리 팀 빼고 다 간 것 같은데.”
“아직 시간 좀 있어. 그리고 네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거야. 남경이 형 오면.”
“아깐 안 간다더니….”
백야가 작게 구시렁거렸다. 그러는 사이 민성과 남경, 금일이 달려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백야 너 괜찮아? 율무야 어떻게 된 거야.”
일어날 수 있겠냐며 남경이 백야를 부축했다. 민성은 금일에게 감사를 전하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금일 씨 감사해요. 얼른 팀으로 돌아가 보셔야죠.”
“네. 걱정되니까 연락 줘, 백야야.”
“으응…. 잘 가. 고마워.”
백야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코피는 스트레스 지수를 낮춘 뒤로 거의 멎었지만, 코피도 나름 피라고 기운이 없는 게 백야는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율무차 말처럼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확실히 개복치의 몸은 스트레스 지수에 영향을 많이 받는 듯했다.
“일단 민성아, 율무랑 애들 챙겨서 너희도 가 봐. 백야는 내가 챙길 테니까.”
“저는요? 저는 안 올라가요?”
“너 올라갈 수 있겠어?”
남경이 백야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율무가 더 빨랐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꼴로 올라가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맞아. 생방송이잖아. 괜히 무리하다가 더 큰 방송 사고 날지도 모르고….”
민성도 동의하자 남경은 알겠다며 두 사람을 먼저 돌려보냈다. 그리곤 백야에게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저기… 백야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만 괜찮으면 잠깐 대기실 들렀다가 늦게라도 올라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가 갑자기 빠지면 팬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말이 나올 거고 그럼 기사로 이어지는 건 금방이라며, 피할 수 있는 논란은 최대한 피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게 그의 의견이었다.
“네,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할게요.”
열감으로 상기된 볼과 엉망인 몰골에 남경도 마음이 좋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기실로 걸음을 서두른 남경은 대충 상의만 갈아 입혀 백야를 무대 위로 올려보냈다.
“너 진짜, 이따 보자.”
뒤늦게 올라온 백야가 시선을 피하며 율무의 옆으로 섰다.
[MC : 오늘의 최종 결과, 먼저 음원 판매 점수입니다.]
MC의 목소리에 다섯 개 심사 항목이 차례대로 공개됐다.
음반 판매 점수와 사전 투표 등에서 만점을 받았지만 음원 판매 점수에서 격차가 벌어져 이번에도 1위는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생방송 문자 투표까지 합산한 결과.
[MC : 영광의 1위는~ 축하드립니다! 데이즈!]
“우왁!”
꽃가루가 터지자 청이 소리를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유연과 지한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고, 율무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짓다 이내 눈물이 터지며 등을 돌렸다.
작게 말은 휴지를 콧구멍에 숨겨 넣고 올라온 백야도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천재 아이돌(2)> 완료!]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1 스타 포인트]
‘이게… 된다고?’
심각한 표정에 살짝 벌어진 입술.
백야는 입으로 숨 쉬다 꽃가루를 먹었지만 그마저도 모르는 눈치였다.
[MC : 수상 소감 부탁드릴게요.]
MC가 꽃다발과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마이크를 받아 든 민성은 침착하게 첫마디를 꺼냈다.
“우선…. 이렇게 큰 상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비교적 담담해 보이던 그는 첫마디를 마침표 찍음과 동시에 눈물을 쏟아냈다.
서럽게도 우는 민성에게 다가간 지한이 묵묵히 등을 토닥여 주었고, 청은 소녀처럼 입을 가린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성을 바라봤다.
“저희…. 저희 여섯 명이 데이즈라는 이름 아래 만날 수 있게 해 주신 ID 식구들, 그리고 우리 데이즈 부모님들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응원해 주는 데이즈 팬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데이즈가 되겠습니다.”
흐느끼며 소감을 말하느라 발음이 엉망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더 진심이 느껴졌다.
이어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유연이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짧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더 들고 있다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는지 마이크는 율무에게로 금방 넘겨졌다.
그사이 감정을 추스른 율무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거절하지 않고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더불어 항상 조언과 격려해 주시는 선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멤버들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묵묵히 곁을 지켜 주는 멤버들 정말 고마워요.”
율무의 마지막 말에 백야도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뿌애앵.
* * *
코피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은 데다 열이 무려 38도였다는 백야는 몸살감기 판정을 받고 말았다.
넌 네 몸 상태를 어쩜 그리도 모르냐며 꾸중을 듣기도 잠시. 결국 남경의 손에 끌려가 링거 한 통을 맞고 온 백야는 오후 일정인 팬 사인회를 위해 다시 멤버들과 합류했다.
“……미안.”
컨디션 난조와 감동의 눈물로 눈이 퉁퉁 부어 버린 백야는 안대를 쓴 채 나타났다.
“백야야, 눈은 또 왜 그래?”
백야만큼이나 부은 눈에 투명 뿔테를 쓴 민성이 걱정스레 다가왔다.
“궁예…? 콜록.”
한쪽 눈을 잃고 돌아온 햄스터에 청도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가 기침 소리를, 아니, 이게 아니라…. 병원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실핏줄이 터져서 충혈됐어.”
한 군데가 고장 나니까 줄줄이 말썽인 개복치 몸뚱어리에 백야도 속 상했다.
멤버들은 이런 몸으로 용케 라이브를 했다며 걱정했으나, 무대를 할 때까지만 해도 몸이 이 정도로 만신창이는 아니었던지라 개복치는 양심이 찔렸다.
“많이 심해?”
다가온 유연이 안대를 살짝 들추며 눈 상태를 확인했다.
레드 아이와 눈이 마주친 유연이 깜짝 놀라 손을 놓자, 플라스틱 안대가 백야의 눈을 때렸다.
“아야…!”
“죽어라! 나쁜 놈!”
“넌 왜 아픈 애를 괴롭히고 그래?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아악! 아파! 난 실수로,”
손 한 번 잘못 놀렸다가 청과 민성에게 구박만 받은 유연이 억울해했다.
“이번 활동은 백야 컨디션이 너무 안 좋네…. 나도 신경 쓰겠지만 너희가 잘 좀 돌봐 줘.”
“당근 하지! 남경은 나만 믿어!”
“네가 제일 불안해, 이 녀석아. 그나저나 청이 너도 같이 거실에서 잤다며. 정말 괜찮아? 아까 기침하는 것 같던데.”
“Nope. 여름 감기는 바보만 걸리는 거야. 난 바보가 아니야.”
청의 단호한 대답에 백야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 난 바보라서 걸렸다.”
“No!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왜 애 기를 죽이고 난리야? 죽어라! 이 멍청이 녀석아!”
“멍청이라 하지 말랬지!”
이때다 싶어 유연이 좀 전의 설욕을 대갚음해 주었다.
때리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기싸움을 틈을 타 민성이 백야의 팔을 이끌었다.
“너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손봐야지. 잠깐만 앉아 있어. 내가 실장님 불러올게.”
“고마워.”
“그리고 오늘은 내 옆에 앉아. 아프면 사인회 중간이라도 바로 얘기하고.”
“으응….”
백야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너 혼내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알지?”
“응. 미안….”
“아니, 미안한 게 아니라.”
민성이 한숨을 삼키며 백야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머지는 숙소 가서 얘기하자. 그리고 율무는 너무 신경 쓰지 마.”
민성이 고개를 돌리자 지한의 옆에 앉아 자는 척을 하는 율무가 보였다.
“금방 올게. 앉아 있어.”
“응.”
대기실을 나서는 민성을 보며 백야가 율무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얼굴이 붉은데.”
“자고 일어나서 그래. 열은 거의 다 내렸어.”
“이리 와.”
백야가 지한의 옆자리로 가 엉덩이를 슬쩍 걸쳤다. 덤덤한 척하지만 율무를 신경 쓰는 게 티가 났다.
“이 속 좁은 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너 아픈 거 자기한테 말 안 해 줬다고 삐졌거든 지금.”
정곡을 찌르는 지한에 율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나도 몰랐어.”
“괜찮아. 귀신이 보이고 열이 38도에 갑자기 코피가 터질 정도로 컨디션이 최악이었지만 모를 수도 있지.”
뼈를 때리는 촌철살인에 백야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불쑥 몸을 일으킨 율무가 지한을 노려봤다.
“넌 왜 아픈 애 눈치를 줘?”
“내가? 언제. 난 지금 걱정하는 건데. 누구처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걱정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아무렴 너보단 나은 것 같은데.”
반박할 말이 없던 율무는 본전도 못 건졌다.
시선을 돌렸다가 백야와 눈이 마주쳤으나, 질끈 감으며 못 본 척하는 게 아주 단단히 삐친 듯했다.
“야, 나율무.”
“…….”
백야가 율무의 마음을 풀어 주려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나 율무는 쉽게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게 다 상태창 때문인데.’
억울하지만 죄인은 말이 없어야 하는 법. 입술을 꾹 다문 백야는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저놈을 어떻게 풀어 주지.’
고민하는 사이 민성과 덕진이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돌아왔다.
“백야 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백야 아프다더니 정말이구나? 얼굴이 이게 뭐야….”
덕진과 실장이 한달음에 달려와 백야의 손과 얼굴을 붙들었다.
“느에. 전 갱차나여.”
악력에 볼이 찌부된 백야의 발음이 뭉개졌다.
“내 정신 좀 봐.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시간이 없어서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네! 저 끄떡없어요.”
백야가 주먹을 쥐며 밝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