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그럼 분위기는 왜 잡는데?! 그렇게 말하면 누가 들어도 오해하잖아! 물어볼 때마다 못 오신다고만 하고, 누님 이야기만 하고!”
“내가 언제 분위기를 잡았냐?! 그리고 가수하는 거 아직 말씀 못 드렸다고 했잖아, 이 바보야!”
“바보오? 야, 1년이다, 1년! 아들이 뭐 하고 다니는지 모르는 부모님이 세상 어디에 계시냐? 나는 당연히 말씀 못 드릴 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악!”
“조용히 해!”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던 햄스터는 반박 대신 한 번 더 강아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조만간 말할 거야.”
“씨이…. 말을 그렇게 하니까 오해하지. 근데 왜 제주도에 안 있고 누나 집에 얹혀사는데!”
“강남 8학군 모르냐? 이 촌놈아.”
금용고등학교 최고의 아웃풋이 서울 토박이에게 외쳤다.
“와…. 뭐 이런 게 다 있지?”
“어쩔티비.”
정신이 아찔해지는 네 글자에 율무가 눈을 감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느꼈지만 율무는 초인적인 힘으로 삼켜 냈다.
“하……. 당백아? 너 청이랑 같은 방 쓰면 안 되겠다. 그게 애를 아주 버려 놨,”
벌컥-!
“내가 모!”
“아악!”
“으갹!”
방문이 열리며 등장한 청에 율무와 백야가 동시에 나동그라졌다.
* * *
지한의 홈마 한지는 요즘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랐다. 바로 데이즈의 컴백 때문에.
음방 뛰랴, 팬싸 뛰랴, 떡밥 회수하랴, 보정하랴.
방금까지도 지한의 출근길 프리뷰를 보정하던 그녀는 잠시 휴식도 취할 겸 너튜브에 접속했다.
구독을 눌러둔 데이즈의 공식 계정 위로, 새로운 업데이트를 알리는 파란 불이 들어와 있었다.
[헌터 vs 뱀파이어! 과연 데이즈의 운명은? : Vampire Castle #3]
2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지의 최애는 웬 은색 도끼 장식을 들고 나타나 유연과 팬들을 놀래켰다.
“난 널 해치지 않는다니…. 그치만 넌 심장에 너무 해로운걸.”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주접을 떨며 한지는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복도를 거니는 율무와 청의 모습으로 시작됐다.
[율무 : 근데 왜 유연이 먼저 잡아? 백야나 민성이 형 잡는 게 더 쉽지 않나.]
[청 : 백야는 제일 마지막에 잡아. 일찍 죽으면 불쌍하잖아.]
[율무 : …그럼 난 안 불쌍해서 제일 먼저 죽인 거야?]
[청 : 당근 하지.]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율무가 헤드록을 걸었다.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라며 서운해하자 청이 농담이라며 소리쳤다.
[청 : 악! I’m just kidding! 당근히 율무가 제일 세서 죽였어!]
율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청이 안전거리를 확보하며 뒤로 물러났다.
체격이 비슷하다곤 하지만, 율무는 몸이 딱딱해서 부딪히면 아프다며 청이 툴툴거렸다.
[청 : 아까 유연이 여기로 가는 거 봤어.]
청은 유연이 지하실 쪽으로 향하는 걸 봤다며 율무를 이끌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서자 아래가 소란스러웠다.
[정원 초과]
이미 지하실은 만석이라 율무와 청은 내려갈 수 없었다.
도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계단 너머까지 들려왔다.
[청 : 밑에 엄청 시끄러운데?]
[율무 : 이게 웬 횡재야~ 그냥 여기서 기다렸다가 잡으면 되겠는데?]
[청 : 그거 좋다! 숨어, 숨어.]
두더지 굴 앞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한 마리씩 올라올 때마다 낚아채 목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그 시각 민성 캠.
[민성 : 이야아아압!]
[지한 : 잠깐!]
민성이 잠자리채를 휘두르는 타이밍에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입구 쪽에 서 있던 지한이 소리를 듣고 급히 외쳤으나 민성은 이미 팔을 휘두른 뒤였고.
[백야 : 으갹!]
[민성 : 백야야…!]
잠자리채에 잡힌 건 고양이가 아닌 웬 햄스터 한 마리였다.
[백야 : 어푸, 이게 뭐야! 뱀파이어야?!]
초록색 그물에 걸린 햄스터가 허공에 손을 저으며 바둥거렸다.
한편 많이 놀란 것 같은 민성은 잠자리채를 패대기치곤 백야의 앞으로 달려갔다.
[민성 : 미안. 안 다쳤어? 어디 봐.]
[지한 : 괜찮아? 네가 갑자기 나올 줄 몰랐어.]
순식간에 포위된 햄스터가 당황해했다.
[백야 : 괜찮아. 나 하나도 안 다쳤어. 진짜 멀쩡한데….]
괜찮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야의 얼굴을 이리 한 번, 저리 한 번, 꼼꼼히도 살펴본 민성은 생채기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숨을 쉬었다.
[민성 : 와…. 컴백 앞두고 사고 칠 뻔했네.]
[지한 : 미안. 우리가 생각이 짧았어.]
굳은 얼굴의 지한이 사과의 뜻으로 검은 인형 하나를 안겨 주었다.
[백야 : 이게 뭔데? 갑자기 왜 날 줘?]
[지한 : 원래 잠자리채에 잡히는 사람이 갖는 거야.]
[민성 : 맞아. 얘가 준다 할 때 그냥 갖고 가.]
30분 동안 애쓰며 얻어 내려던 박쥐 인형이 등장한 지 3분도 안 된 백야에게 홀랑 넘어가 버렸지만, 민성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백야 : 이거 맞아? 이래도 되는 거야?]
[지한 : 맞아. 빨리 가.]
지한이 계단 쪽으로 백야의 등을 떠밀었다. 얼결에 미션을 수행한 백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인형의 몸통에 달린 지퍼를 열자 뱀파이어를 처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쪽지가 들어있었다.
[뱀파이어는 마늘을 싫어한다.]
[백야 : 마늘? 마늘을 어디서…. 아! 식당!]
[??? : 크헙!]
쪽지를 읽으며 계단을 올라오던 백야가 정체불명의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백야 : 방금 무슨 소리가 났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야 : 잘못 들었나?]
머리를 긁적인 백야가 식당과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떠났다.
[율무 : 왜! 잡을 수 있었잖아!]
[청 : 저거 마지막에 잡을 거야!]
백야가 마지막 계단을 밟는 순간 율무가 덮치려 들었다. 그러나 쏜살같이 낚아챈 청이 빈방으로 밀어 넣는 바람에 그는 사냥에 실패하고 말았다.
시작부터 손발이 안 맞는 두 뱀파이어는 바깥에 들릴세라 목소리를 낮춘 상태로 투닥거렸다.
[율무 : 너 이거 편애야. 왜 쟤만 봐줘?]
[청 : 편하긴 뭐가 편해. 지금 힘들어 죽는데.]
[율무 :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청 : 쉿! 나온다. 한 명 더 올라와.]
과연 막내 온 탑. 데이즈의 막내는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녀석이었다.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거리는 율무에 청이 재촉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청 : Hey! Come on.]
[율무 : 간다, 가.]
두 사람은 다시금 기습 대형으로 섰다. 머지않아 조금씩 커지는 발소리에 청과 율무가 사인을 주고받았다.
발걸음이 엇박자로 들려오는 걸 보니 지하실에 남아 있던 두 사람이 함께 올라오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율무와 청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청 : 잡아!]
[민성 : 뭐, 뭐야!]
[율무 : 어딜 가시려고~]
[지한 : 비켜.]
지하실 앞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허둥지둥거리다 청에게 잡힌 민성과 달리, 두 사람이 뱀파이어임을 직감으로 알아차린 지한은 곧장 줄행랑을 감행했다.
하지만 지한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율무. 골치 아픈 상대에 지한이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지한 : 너 원래 뱀파이어였어?]
[율무 : 그럴 리가~ 나도 쟤한테 당했어.]
율무가 민성과 대치 중인 청을 눈짓했다. 그리고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지한은 재빨리 손을 뻗어 벽 장식 중 하나인 도끼를 낚아챘다.
[지한 : 오지 마. 오면 다친다.]
[율무 : 야, 잠깐만. 이렇게까지 한다고?]
[지한 : 경고했어.]
지한이 도끼를 겨누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평소 지한의 똘끼를 아는 율무는 섣불리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민성 : 이거 놔악! 아악! 지한아!]
[청 : 가만히 있어!]
[지한 : 나보다는 저쪽이 더 승산 있어 보이는데.]
손목을 잡힌 민성이 벗어나려 발악하자 청이 율무를 불렀다.
[청 : 율무 이거 잡아! 그냥 지한 버려!]
[민성 : 이거? 형한테 이거어어?!]
청의 도움 요청에 율무가 아쉬운 얼굴로 뒤돌았다.
그리고 다시 유연 캠.
책장 뒤에 숨어 있던 그는 도끼 살인마를 피해 살금살금 서재 안을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지한 : 누구야?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유연이 질끈 눈을 감으며 괴로워했다.
지한이 뱀파이어라고 확신한 그는 어떻게든 서재를 빠져나갈 궁리하는 중이었는데. 지한이 나타난 뒤로 줄곧 들려오던 목소리가 순간 뚝 끊어졌다.
[유연 : 뭐야? (자체 음소거)]
입 모양을 벙긋거린 유연이 뒤를 돌아봤다. 지한의 흔적을 찾아 기웃거렸지만, 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자 괜히 불안해진 유연은 초조해했다.
한자리에 있긴 불안했는지 최대한 몸을 낮춰 지한을 찾아 나서는데, 순간 정체 모를 손이 유연의 어깨를 짚었다.
[지한 : 찾았다.]
[유연 : 으아악!]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유연이 비명을 지르자 지한이 입을 틀어막으며 조용히 하라 협박했다.
[지한 : 조용히 해.]
[유연 : 읍! 으읍!]
지한의 손에는 여전히 도끼가 들려 있었다. 모형이지만 제법 살벌하게 생긴 탓에 유연이 그를 경계하며 공포에 떨었다.
[지한 : 소리 안 지른다고 약속하면 풀어 줄게.]
유연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자유로워진 유연은 슬금슬금 지한과의 거리부터 벌렸는데, 그를 도망가는 것으로 오해한 지한이 목덜미를 잡아채 다시금 앞으로 당겨 왔다.
[지한 : 밖에 나가면 죽는다고.]
[유연 : 사, 살려 주세요.]
유연이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
[유연 : 딱 한 번만 살려줘. 형이 뱀파이어인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제발.]
[지한 : 무슨 소리야. 나 뱀파이어 아니야.]
[유연 : 아니라고? 근데 손에 그건….]
유연의 시선이 지한의 손에 들린 도끼로 향했다. 그러자 또라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지한 : 아. 이거? 별거 아니야.]
그게 어떻게 별 게 아니냐는 눈빛이 돌아왔지만, 지한은 정말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지한 : 청이랑 율무가 뱀파이어야. 걔네 피해서 도망치느라.]
지한이 도끼를 바닥에 버리며 해명했다.
[유연 : 아니, 그런데 왜 사람 심장 떨어지게 저런 걸 들고 다녀? 형이 깡패야?]
[지한 : 그럴 수도 있지.]
[유연 : 전혀 아니거든?]
유연이 발끈해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탓에 지한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지한 : 그런데 너 아까부터 왜 그렇게 속삭여? 잘 안 들려.]
[유연 : 여기 목소리 작게 해야 된다고.]
[지한 : 그런 게 어디 있,]
유연이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가자 서재 안내 사항이 벽에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유연 : 청이랑 율무 형이 뱀파이어라고? 확실해?]
[지한 : 응. 민성이 형도 지금쯤이면 뱀파이어가 됐을지도.]
[유연 :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유연이 제작진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연 : 지한이 형이 문제 풀어도 저랑 똑같은 힌트 주시는 건가요?]
스텝의 고개가 가로로 저어졌다.
화색이 돈 유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한을 중앙 테이블로 이끌었다.
[지한 : 왜.]
[유연 : 일단 시험부터 쳐. 시험 쳐서 통과하면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어.]
이제 믿을 건 형이랑 저 둘뿐이라며 유연이 결연한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