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인데 패시브가 개복치-132화 (132/340)

제132화

* * *

‘대기실 문 한 번 나서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오디션 장소에는 백야 말고도 네 명의 후보가 더 있었다.

방송국을 오가며 마주친 낯익은 얼굴들이었는데 개중 한 명은 놀랍게도 S.AM의 하랑이였다.

보는 눈이 많기도 했고 생각보다 경직된 분위기라 딱히 시비를 걸지도, 먼저 말을 걸어오지도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자주 보이네.’

백야가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하랑은 그룹에서 인기 멤버로 자리 잡아 반응이 좋은 듯했다. 작년 연말 무대에서 백야와 함께 한 스페셜 스테이지가 화제가 된 덕분이었다.

당시 4단 고음으로 주목받던 백야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으로 능력까지 인정받았으니, 그가 팀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아무 생각 없이 퀘스트 때문에 온 저와는 달리 하랑은 진심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이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은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음방 MC? 내가 무조건 따내고 만다.’

패시브 강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오디션에 합격해야 했지만, 승부욕에 눈이 먼 개복치의 사고 회로는 이미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오디션에 합격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저희 이제 시작할게요.”

FD가 대기실 문을 열며 오디션 시작을 알렸다.

스텝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지난주에 여자 MC 오디션은 끝났고, 오늘 오디션만 치러지면 당장 다음 달부터 새로운 MC로 교체된다는 것 같았다.

“백야 님 먼저 보실까요?”

“네!”

자리에서 일어난 백야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랑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개복치는 당당한 걸음으로 스텝의 뒤를 따라나섰다.

복도에 서 있던 남경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주먹을 쥐며 파이팅 동작을 해 보였다.

‘형! 저 다녀올게요!’

백야가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며 심사위원들이 있을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PD와 작가를 비롯한 스텝들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데이즈 백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백야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 생각하라며 PD가 긴장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불러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백야 씨 열심히 하는 거야 잘 알지. 타 방송 스페셜 MC 하는 게 인상 깊었거든요.”

PD가 백야의 앞에 놓인 큐카드를 가리켰다.

“한번 볼래요? MC1, 2 대사가 나뉘어 있긴 한데 전부 읽으면 돼요. 그럼 준비되면 말해 줘요.”

“넵.”

세 장의 큐카드를 정독한 백야가 작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들었다. 단단한 눈빛이 앞을 향했다.

“준비됐습니다.”

PD가 눈짓을 하자 구석에 세워 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생방송 쇼! 플레이리스트! 안녕하세요~ 플레이리스트에 나타난 귀염둥이 MC 백야, 유연입니다.”

백야는 비어 있는 상대 MC의 이름에 멤버의 이름을 넣어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어서 배꼽 위로 손을 올린 백야는 배가 고픈 척 연기하며 입으로 ‘꼬르륵’ 소리를 냈다.

“꼬르륵, 꼬르륵.”

“유연 씨,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오른쪽으로 돌렸다를 반복하며 열심히 1인 2역을 선보이는 백야에 스텝들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게 아니라 배가 고파서요. 플레이리스트 보러 오느라 점심도 못 먹고 달려왔지 뭐예요.”

“아이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밥을 거르면 안 되죠. 안 되겠어요. 제가 우유 사 드릴게요. 얼른 가요.”

“우유? 어떤 우유요?”

고민하는 척 팔꿈치를 괸 백야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야무지게 대답했다.

“바나나 맛 우유랑 딸기 맛 우유, 초코 맛 우유. 그리고 러브 유가 있어요. 뭐 드실래요?”

“러브 유? 러브 유는 무슨 맛인가요?”

“바다처럼 시원~하고 저처럼 보기만 해도 상큼한 ‘파란 맛’이랍니다.”

지난주 러브 유의 신곡을 소개하는 대본이었다.

이어서 컴백 소개와 엔딩 멘트까지 무사히 마무리한 백야가 방긋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모니터링이 헛되진 않았는지 너튜브로 배운 잔망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쳤다.

“수고하셨어요. 결과는 이번 주 안으로 연락 갈 겁니다.”

“넵. 감사합니다!”

문을 나서면서도 허리를 꾸벅인 백야는 곧장 남경에게로 달려갔다.

“형! 형!”

“어떻게 됐어? 잘했어?”

“잘은 모르겠고 최선은 다했어요. 진짜 제 안의 모든 귀여움을 끌어 올려서!”

그 어느 때보다 승부욕으로 가득 찬 눈빛이 뜨거웠다.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듯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남경이 진정하라며 달래 줄 정도였다.

“그런데 저희 빈손으로 돌아가면 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누가 빈손이래? 서포트는 진짜야. 너 오디션 보는 사이에 내가 가져왔어.”

시선을 내리자 남경의 발치에 업소용 백도 통조림과 커다란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무거운 건 자기가 들 테니 넌 네 친구나 챙기라는 말에 백야가 순순히 통조림을 안아 들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따요? 못 먹을 것 같은데….”

고리 없이 매끈한 은색 표면이 굉장히 단단해 보였다.

대기실로 돌아가던 두 사람은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나중에 숙소 가져가서 화채 해 먹으면 되겠어요. 숙소에 캔 오프너가 있던가?”

“글쎄. 뒤져 보면 나올 것 같긴 한데. 없으면 사다 줄게. 엘리베이터 왔다, 일단 타자.”

천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남경이 백야를 앞으로 보냈다.

그러나 먼저 올라타려던 백야는 걸음을 주저하며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안은 한산했지만 카메라가 두 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저기….”

“괜찮으니까 타세요.”

출연자를 둘러싸고 있던 스텝들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한 백야는 얼결에 초면의 남성과 나란히 서게 됐다.

‘수, 숨 막혀….’

카메라에 붙어 있는 <창사 50주년 기획> 스티커가 인상 깊었다.

남경과 떨어지게 된 백야는 통조림 캔을 더 애틋하게 끌어안으며 정면만 바라보는데, 인자한 목소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즈, 저요?”

“하트 깨물. 맞지요?”

“하트 깨물…. 아, 네! 저는 데이즈 백야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야가 허리를 꾸벅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저는 누군지 알겠어요?”

재차 말을 걸어오는 중년의 남성에 백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말끔한 수트와 단정한 차림. 창사 50주년의 특별 다큐에 출연할 만한 인물이라면 필시 높으신 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백야가 이름을 알 리가….

“죄송해요. 말씀해 주시면 다음번에는 제가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

“허허. 농담입니다. 나는 그냥 일반인이지. 이런 것도 처음이라 영 어색하네요.”

남자가 카메라를 눈짓했다. 그러다 제집에 백야의 사진이 많아 한눈에 알아봤다며, 딸아이가 엄청난 팬이라고 밝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악수를 청해도 될까요?”

“네, 넵! 물론이죠.”

통조림을 잠시 옆구리로 옮긴 백야가 삐거덕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숨 막힐 정도로 어색했지만 두 사람은 진지했다.

“노래 잘 듣고 있어요.”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백야는 카메라 너머를 힐끔거리며 남경의 도움을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살려 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렸다.

게다가 층마다 모두 멈춰 서는 엘리베이터에 1분이 1년처럼 느껴졌다.

백야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옥에서 온 E가 절실했다. 청이라든가. 율무라든가.

백야가 통조림을 다시 소중하게 안아 들자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복숭아가 복숭아를 들고 있네요? 허허허.”

“아… 하하. 아하하!”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도 모자라 그 나이대 감성의 개그까지 쳐대는 임원(추정)에 백야는 죽을 맛이었다.

‘나도 말을 걸어야 하나…?’

한참을 웃다가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불편한 공기에 입술을 달싹이던 백야는 결국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저… 선물 받은 거예요. 팬분들께서 주셨어요.”

난데없는 자랑질에 당황스러울 법도 했으나 남자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아이고~ 너무 좋겠어요. 팬분들께서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신이 내린 달콤함, 백도. 이 제품이 맛있나 봐요.”

“감사합니다.”

“……?”

그런데 대화가 조금 이상했다. 남자는 분명 질문을 한 것 같은데 돌아온 대답은 감사 인사라니.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백야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은 남경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 냈다.

“크흠. 큼. 백야야, 우리 이제 내려야 해.”

“아, 넵! 저… 이제 내려야 해서. 즐거웠습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백야가 꾸벅 인사하며 스텝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 * *

- 사장님이랑 엘베 잘못 탄 부하직원 (동영상)

└ 쟤 데이즈 백야 아니야?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저기 있어ㅋㅋㅋ

- M사 창사 특집 다큐에서 백도 통조림 들고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는 아이돌 (백야 캡처.jpg)

- 사장 : 이 제품이 맛있나요?

백야 : 감사합니다!

└ 백야가 맛있고 복숭아가 친절해요ㅎㅎ

- M사 다큐에 갑자기 백야 나와서 당황했어ㅋㅋㅋ 사장이 통조림 캔에 적힌 거 읽었는데 갑자기 인사하는 너란 녀석...

- 유연이가 백야 백도라고 부른다며ㅋㅋㅋㅋ 자기 칭찬하는 줄 알고 인사한 것 같은데ㅋㅋㅋ 미치겠다 백야야

└ 저게 저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는 게 더 웃김ㅋㅋㅋㅋㅋ

└ 예의 바른 복숭아♥

- 백도가 백도 들고 있었으니까 헷갈릴 수밖에 없잖아요ㅠㅠ

- 사장님 아재 개그에 필사적으로 웃는 백야 너무 웃겨ㅋㅋㅋ 근데 사실 안 웃김.. 저거 회사에서 부장님이랑 내 모습이잖아ㅠㅠ

- 지난주 쇼플리 의상인데 와기햄쥐 왜 통조림을 들고 돌아다니는 거야? 음방 가면 저러고 다니냐고ㅠㅠㅠㅠ 백야 귀여움이 과해요...

└ 귀여움 치사량 초과

- 그 와중에 귀걸이가 분홍색이라는 게 날 더 미치게 해

압도적인 음반 성적으로 각종 음악방송 1위를 수상한 데이즈는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는 솔로 가수의 깜짝 디지털 싱글 발표로 1위 후보에서 밀려났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멤버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트로피를 한번 쥐어 보고 나니 더 열심히 해서 또 받아야겠다는 동력이 생긴 것 같았다.

“지한이 형, 백도는?”

“잠깐 밖에.”

유연이 덩그러니 남겨진 분홍색 볼캡을 보며 백야를 찾았다. 연습실 문에 달린 작은 창문 너머로 남경과 대화 중인 백야가 보였다.

“저 둘 요즘 자주 붙어 있네.”

“그러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