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컴백 활동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여유 있는 날이었다. 프로 야구 중계로 편성되어 있던 케이블 음악방송이 취소된 탓이었다.
모처럼의 휴일이었지만 어김없이 연습실을 찾은 데이즈는 최근 리패키지 앨범을 위한 연기 수업을 시작했다.
5시간이 넘는 수업에서 해방된 멤버들은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신곡 안무 연습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평소라면 연습실 바닥에 늘어져 있어야 할 백야가 보이지 않았다.
“백도 뭐 사고 쳤나?”
“나율무도 아니고 쟤가?”
“어허~ 지한이. 평소에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너? 당연히…. 아니다.”
지한이 말을 하다 말자 율무가 제발 알려 달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말하다 마는 게 어디 있어?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응. 말 안 할래.”
“아 왜에~ 아아~”
율무가 지한에게 안달 내고 청과 민성이 곯아떨어진 사이, 바깥에서는 오디션 결과 공유가 한창이었다.
“결과 나왔어요? 어떻게 됐어요? 저 떨어졌어요…?”
개복치가 긴장한 얼굴로 남경을 올려다봤다.
떨어졌다면 패시브 강화를 겪을 테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화장실로 뛰어가 몸을 숨겨야 했으니까.
지난번과 같은 난리 통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백야야.”
“네.”
남경이 뜸을 들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왠지 불길한 징조인 것 같아 화장실로 뛰어갈 준비를 하는데, 시스템창이 한 발 더 빨랐다.
[<뜨고야 말겠어!(3)> 완료!]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1 스타 포인트]
“뜹!”
“뭐야, 눈치챘어? 짜식. 축하한다! 너 붙었어, 네가 됐다고!”
남경이 정말 수고했다며 백야를 부둥켜안았다. 하랑을 이겼다는 쾌감과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낀 백야는 주책맞게 눈물을 흘릴 뻔했다.
찔끔 고인 눈물을 훔친 백야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저 언제부터예요? 멤버들한테는 언제 얘기할 수 있어요? 저희 NAN 활동 끝나기 전에 제가 우리 팀 소개할 수 있어요?”
쏟아지는 질문에 남경은 순간 제 앞에 서 있는 게 청인 줄 알았다.
“MC 교체는 2주 뒤부터고, 다음 주 중으로는 기사 나갈 테니까 애들한테는 주말쯤에 말하자.”
“네! 좋아요.”
“그리고 MC 스페셜 스테이지 준비해야 한다니까 한동안은 조금 바쁠지도 모르겠다. 그쪽이랑 스케줄 조율해서 선곡한 다음 알려 달라더라.”
“그쪽이요?”
백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같이 하게 될 여자 MC 말이야. 이번에 데뷔한 신인 배우라고 하던데.”
만나기 전에 검색이라도 한번 해 보라며 남경이 백야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자동 완성처럼 따라붙는 연애 금지 경고는 덤이었다.
“당연하죠.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저 인기도 별로 없어요.”
“네가 인기가 없긴 왜 없어. 아유~ 귀여워 가지고.”
“아악! 형 왜 그래요.”
남경이 볼을 꼬집으려 하자 백야가 징그럽다며 손길을 피했다.
2차 시도를 하기 전에 얼른 연습실 안으로 도망쳐 들어온 백야는 한 걸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뭐 하다가 이제 와?”
“나 찾았어? 왜?”
“그냥. 무슨 일 있나 해서. 남경이 형 표정도 좀 안 좋아 보이고.”
분홍색 모자를 허공에 던졌다 받길 반복하던 유연이 백야를 은근히 떠보았다. 괜히 분위기를 잡던 남경의 표정을 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1년 넘게 연예계 활동을 하며 제법 단단해진 복숭아는 예전처럼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형 얼굴 원래 저렇지 않나? 모자 줘.”
백야가 대답을 피하며 손을 뻗었다. 순순히 모자를 넘겨준 유연은 찰나지만 씰룩거리는 백야의 입꼬리를 포착했다.
“너 뭐 좋은 일 있냐?”
“내가? 아니이?”
백야는 찔리거나 거짓말을 할 때 말끝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눈을 가늘게 뜬 유연이 백야를 빤히 보자 딱복은 5분도 못 가서 물복으로 바뀌었다.
“그, 그렇게 쳐다봐도 말 못 해. 일주일만 기다려.”
“뭐가 있긴 있구나? 어쩐지. 수상하다 했어, 두 사람.”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몰라.”
백야가 도리질 치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유연은 집요했다.
“왜 일주일 뒤에 말해 주는데? 그냥 지금 말해 주면 안 돼? 나한테만 살짝 알려 줘.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안 돼.”
“백도, 이러기야? 베프 취급이 이러면 나 섭섭해.”
유연이 상처받은 척 오늘 수업에서 배운 처량한 연기를 펼쳤다.
백야는 예상치 못한 얼굴 공격에 넘어갈 뻔했으나 다시 정신을 바로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베프야. 나는 어? 다 공평하게 친해. ‘두루두루 교우 관계가 원만하다’가 6년 내내 생기부에 빠진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너답다, 참.”
“그럼. 그리고 형이 오디션 본 거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헙!”
그러나 유연을 당해 내기에 백야는 한참 어리숙했다.
당황한 백야가 눈을 크게 뜨며 굳어 버리자 유연도 당황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들어 의아한 것처럼 보였다.
“오디션? 너 오디션 봤,”
“야!”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되물어오는 유연에 백야가 다짜고짜 소리쳤다.
백야가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개복치의 난’ 이후로 처음이라 멤버들이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 내용까지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마른침을 삼킨 백야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옥상으로 따라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습실을 나서는 뒷모습에서 쿨내가 진동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쟤네 왜 저래?”
남경과 스케줄 이야기를 나누던 민성이 놀란 마음에 헐레벌떡 달려왔다.
가까이 있던 지한과 율무에게 물어봤지만, 두 사람은 실랑이하느라 유연과 백야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청은 아직 구석에서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내가 따라 나가야,”
“안 나가도 될 것 같은데.”
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지한이 저지했다.
지한의 시선을 따라가자 신이 난 얼굴로 몰래 손을 흔드는 유연이 보였다.
나 다녀올게!
벙긋거리는 입 모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옥상까지 갈 여유도 없는 백야는 빈 연습실로 들어와 유연을 구석에 몰아넣었다.
“여기가 옥상이야?”
미소를 감출 생각도 없는지, 유연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백야를 약 올렸다.
“제발. 제발 못 들은 거로 해 줘.”
“뭐. 오디션?”
“야!”
백야가 유연의 입을 틀어막고자 달려들었으나 가볍게 제지당했다.
“나 궁금한 거 못 참는 거 알지? 제대로 알려 줘. 그럼 못 들은 거로 해 줄게. 필요하면 도와도 드림.”
악마의 속삭임이 이어지고, 잠시 망설이던 햄스터는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플레이리스트 MC 제의가 들어와서 오디션 보고 왔어. 방금 붙었다는 연락받았고.”
“진짜? 그럼 완전 축하할 일이잖아. 그런데 왜 비밀로 해?”
“기사 나가기 전까지는 비밀 유지 해야 된다 그래서…. 물론 계속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니고 기사 나가기 전에 너희한테는 말하려고 했어. 진짜야. 제일 먼저!”
백야가 진심이라며 유연의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얼굴 좀 치워 봐. 너 좀 부담스러워.”
유연이 백야의 뺨을 슬쩍 밀어내며 얼굴을 반대로 돌렸다.
“그래서 멤버들한테는 언제 말할 건데.”
“주말에! 이번 주 플레이리스트 스케줄 가서. 일주일, 아니 딱 4일 만. 어?”
“알겠어. 그럼 그때까지 모르는 척 해 주면 되는 거지?”
“응! 역시 너밖에 없다. 고마워.”
“됐거든? 베프 아니라면서요.”
“아, 왜 또 그래~”
유연이 괜히 틱틱거리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백야가 기분을 풀어 주려 장난을 치며 따라붙는데, 순간 낯선 목소리와 함께 상태창이 떠올랐다.
“여기는 저희의 연습실입니다. 잠깐 보여 드리면, 어?”
“어.”
“으어?!”
[<인증 요정> 완료!]
[Error : 퀘스트]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0 스타 포인트]
문턱 하나를 두고 멈춰 선 세 사람이 각기 다른 감탄사를 뱉어냈다.
유연의 앞에 멈춰 선 이는 로즈데이의 멤버 수련으로, 백야와 음악방송 스페셜 MC 합을 맞춰 본 적 있는 소속사 선배였다.
“안녕하세요.”
심각한 얼굴로 굳어 버린 백야에 유연이 옆구리를 찌르자, 백야도 뒤늦게 허리를 숙였다.
수련은 유앱을 하던 중이었는지 셀카봉을 들고 있었다.
“방송 중이신 거죠? 얼른 비켜 드릴게요.”
“미안해요. 안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괜찮아요. 아무도 없으니까 들어가 보셔도 돼요. 백도 가자.”
“어? 어…….”
직속 후배의 깜짝 출연에 수련의 유앱 채팅창이 폭주하고 있었다.
-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왜 저 둘이 나오는 거죠???
- 수련이 놀란 거 넘 귀여워ㅠㅠ
- 지독한 컨셉충이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도 분홍색 아이템 못 잃네
- 핑크 뽀이~ 저분 요즘 핫하던데ㅋㅋㅋ 저거도 팬이 선물해 준 건가? 계 탔네
- 엥??? 내 본진이 왜 여기서 나와? 뭐야 둘이 뭐 했는데?!!
- 수련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습니까? unni I love you
- 딱 봐도 분홍 모자가 한 소리 듣고 기죽었네ㅋㅋㅋ 눈도 못 맞추고 멘탈 나가서 계속 바닥만 보는 거 봐라
- Who’s that boy?
- 수련아 안무 연습하는 거 보여줘
수련이 연습실 문을 닫자 백야를 잡아끌던 유연도 손을 놓았다.
“많이 놀랐냐?”
“…어? 뭐라고?”
“많이 놀랐냐고. 아까 소리 크게 지르던데. 너 원래 잘 놀라잖아.”
“아니야. 저기, 유연아 나 잠깐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
백야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무 칸에나 들어가 앉은 백야는 재빨리 상태창을 살폈다.
‘에러? 에러라고?’
처음 보는 창은 아니었다. 작년 연말 시상식에서 돌발 퀘스트를 완료하고 났을 때 떴던 창과 똑같았으니까.
그때는 갑자기 뜬 이벤트였기도 하고, 시스템의 농간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방금 거는 서브 퀘스트이지 않은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백야는 곧장 스타 포인트를 조회했다.
▷ 현재 보유 스타 포인트 : 4
완료창에서만 0으로 뜨고 포인트 합계에서는 올라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포인트를 확인하는 순간 그마저도 사라졌다.
‘이런 미친 망겜.’
시스템에 오류가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