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차마 손가락을 걸어 주진 못하겠는지 지한은 율무의 소지를 잡아 아래로 내려 버렸다.
“진짜 팬 사인회 시작~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지한이요.”
“지한 님~ 이름이 너무 예쁘네요. 뒤에 계신 분은 친구? 친구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나도 해?”
1열에서 직관하던 백야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나도해 님~”
“아니, 그게 아니라.”
삐이-.
율무의 수작에 걸려든 백야가 배신감에 눈을 부릅떴다. 착용 중이던 모자와 머리띠를 모두 벗은 백야는 도넛 안경을 쓰게 됐다.
“자, 자, 여러분.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아…….”
삐이-.
멤버들에게 주의를 주려던 민성이 추가 3점을 기록했다.
“푸하하! 형 혼자 벌칙 다 받겠는데? 형이 지금 1등이야.”
리더의 살신성인에 눈물이 다 난다며 유연이 눈물을 훔쳤다.
김장 조끼에 외계인 선글라스, 고무장갑을 낀 민성을 본 백야도 취향을 저격당했는지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러다 ‘형이 1등’이라는 말에 돌연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나 꽤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구보다도 예능을 즐기고 있던 예능 울렁증 환자 개 모 씨.
백야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자신의 퀘스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분명 뭐가 있었는데. 나 뭘 까먹은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까르르 잘만 웃던 복숭아가 갑자기 심각해졌다. 기분이 찜찜한 게 분명 망겜과 관련된 것인데 기억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를 알 리 없는 멤버들은 다시 드림캐처 만들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은 절대 안 되는 백야는 제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실을 열심히 감았는데….
“너 뭐 해?”
“…어?”
지한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자 백야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틀과 함께 감긴 손가락이 보였다.
“아악! 내 손!”
황급히 실을 풀어낸 백야는 피가 통하지 않아 검붉어진 손가락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너 집중 안 할래? 실 감는 게 이렇게 위험할 일이냐.”
“아니,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실이,”
삐이-.
손가락이 잘릴 뻔한 것도 억울한데 벌칙까지 얹어지니 백야는 조금 서러웠다.
이게 다 시스템의 계략일지도 모르는 건데!
“실이 뭐. 이게 네 손가락에 저절로 감기기라도 했다고?”
“그런 것 같아.”
“……얘 진심인데?”
진지한 대답에 유연이 잠시 당황했다. 그러자 모자를 전달해 주던 민성이 두 사람의 대화를 바로잡아 주었다.
“유연아, 정신 차려. 그리고 쟤한테 가위 주지 마라. 진짜 손가락 잘릴지도 모르니까.”
“나 그 정도는 아니거든?!”
백야는 졸지에 취급 주의 인물이 돼 버렸다.
말없이 쪽가위를 가져가 버리는 지한에 백야가 상처받은 척도 해 보았지만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복숭아는 결국 누명을 벗지 못한 채 다시 실 감기로 돌아왔다.
‘쉽구먼!’
새로 받은 아이템은 양옆으로 지느러미가 달린 복어 모자였는데, 백야의 망충한 얼굴과 만나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집중한 입으로 실 감기가 한창인 백야를 뒤로하고, 이번에는 유연이 질문을 읽었다.
“데이즈의 유일한 래퍼 지한. 만약 파트를 바꿔서 부른다면 어떤 멤버의 파트를 부르고 싶나요?”
검은색 실을 감던 지한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백야를 언급했다.
“백야요. 저도 한 번쯤은 엄청난 고음을 내보고 싶긴 해요.”
“나?”
“응.”
지한의 담백한 대답에 백야가 민망해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백야의 파트를 한 소절 불러 주실 수 있나요?”
“네.”
처음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지한이 곧장 대답했다.
“4단 고음 해주세요~”
율무의 말도 안 되는 요청에 조용히 하라는 눈빛을 보낸 지한은 NAN의 후렴 파트를 짧게 불렀다.
“와~ 답가 없나요?”
삐이-.
“잠깐만. 나는 금지어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호응하며 답가를 부추기던 율무가 비행 고글을 받아 들었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와~’와 ‘오~’같은 감탄사가 금지어인 율무는 리액션을 할 때마다 벌칙 아이템을 받고 있었다.
그사이 백야는 기꺼이 답가 요청에 응했다.
아무 파트나 불러도 되냐는 질문에 유연이 지한의 파트를 요구했다. 질문이 파트 바꿔 부르기라는 이유에서였다.
가사가 헷갈리는지 노래를 천천히 곱씹어 보던 백야는 이내 카메라를 보며 지한의 랩을 흉내 냈다.
“빛을 삼켜버린 Eclipse. 달이 가려지면 본색을 드러내.”
“잘하네.”
지한의 칭찬에 백야가 아니라며 부정했다. 항상 잘해놓고 자신에게만 평가가 박한 친구에 율무가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엄청 잘했는데? 오늘부터 랩 새싹 해. 랩싹이 어때, 랩싹이.”
“모라는 거야. 싸대기?”
“야 이…!”
청이 들리는 대로 발음하자 민성이 기함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쓰읍. 조용.”
잠시 저항하던 청은 눈을 부릅뜨는 리더에 금세 꼬리를 내렸다.
한편 율무의 새싹 드립을 듣던 백야도 민성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헙!”
멤버들은 청의 말실수를 듣고 놀란 것으로 오해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백야는 율무의 드립을 듣고 잊고 있던 <예능 새싹> 퀘스트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내 퀘스트!’
예능 울렁증 환자 주제에 너무 즐기고 있었다.
얼핏 주위를 살펴보니 멤버들의 모습이 다채로웠다.
개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멤버를 뽑으라면 단연 민성이었는데, 그는 현재 스코어 6점으로 1등을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면 퀘스트는 실패한다.’
<예능 새싹>의 페널티는 거절 시 패시브 강화였지만, 이미 비슷한 류의 퀘스트를 실패해 저승길 익스프레스를 탈 뻔했던 백야는 ‘실패’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다.
현재 백야가 알아낸 자신의 금지어는 ‘아니’ 하나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개복치는 살기 위해 제 한 몸을 희생하기로 했다.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삐이-.
삐이-.
삐이-.
상태가 괜찮은 것 같더니 갑자기 급발진하는 개복치에 유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게 왜 또 이러나 싶은 얼굴로 백야를 훑는데 마침 율무와 눈이 마주쳤다.
이게 다 형 때문이잖아.
내가?
두 사람은 눈을 살짝 크게 뜨는 것만으로도 대화가 통했다.
한편 ‘아니’만 백 번도 넘게 외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은 관계로 이쯤에서 폭주를 멈추기로 한 개복치.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게 율무였으니 마침 뒤집어씌우기도 딱 좋았다.
“나 랩 못해.”
“그래, 그래. 너 랩 진짜 못하더라. 그걸 랩이라고 했어?”
“…뭐라고?”
“아……. 이거 아니야?”
1절만 하면 될 걸 2절까지 하는 바람에 백야는 정말로 상처받았다.
시무룩 내려가는 백야의 입꼬리를 본 지한이 말없이 율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곤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나가 죽어.”
* * *
“아니이!”
“너 아니 좀 그만하면, 하…….”
삐이-.
여우 모자를 받은 유연이 몰래 복숭아를 노려봤다.
벌칙 받기에 재미라도 들린 건지, 숨 쉬듯 금지어를 남발하는 백야에 유연도 덩달아 휘말리고 있었다.
꽃 수영모를 지나 수줍은 복숭아 볼 터치, 붕어빵 모자, 데이지 선글라스 등 화려한 패션을 선보인 백야는 이번엔 고양이 발바닥 장갑을 끼게 됐다.
그러나 발가락이 네 개뿐인 탓에 드림캐처에 마지막 장식을 달던 백야는 새로운 난관을 맞이하게 됐다.
“나 이거 안 돼.”
유연의 앞으로 분홍색 젤리가 내밀어졌다.
“뭐지? 이 자연스러움은?”
“달아 줘.”
맡겨 놨다는 듯 당당하게 요구하는 햄스터에 유연이 황당해했다.
“뭘 달고 싶은데.”
“나 저거 하얀 거.”
“이거?”
“아니, 옆에 레이스.”
삐이-.
현재 스코어 21점으로 제작진의 아이템을 거덜 내고 있는 복숭아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경찰 모자를 받아들었다.
“으하학!”
“너 술 마셨냐?”
“아니?”
삐이-.
“미치겠네. 좋냐?”
“응. 너무 재밌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백야를 보고 있으니 유연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던 민성은 새롭게 주어진 질문을 읽었다.
“엘프라 불리는 청. 솔직히 거울 보고 잘생겼다는 생각 하루에 몇 번 하나요?”
흥미로운 질문에 멤버들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청은 의외로 담백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 적 없는데?”
“잘생겼다 생각한 적이 없다고? 단 한 번도?”
식상한 대답에 의문을 가진 건 오히려 백야였다.
“응. 아무 생각 없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이마를 긁적이는 청은 진심 같았다.
“거짓말! 그렇게 생겼으면서 어떻게 한 번도 안 할 수가 있어?”
“나 우리 아빠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럼 백야는 아빠 보면 무슨 생각 하는데?”
“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정곡을 찔린 백야가 움찔하자 지한이 빈틈을 치고 들어왔다.
“평소에 청이 보면서 잘생겼다는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봐요.”
“모야~ 햄스터 그런 거야?”
삐이-.
페이스 체인을 받은 청이 대충 얼굴 위로 걸치면서도 신나 했다.
“잘생기기는 무슨. 그냥 눈코입 잘 달려 있나 보다 한 거지. 다, 다음 질문 주세요!”
츤데레 기질이 있는 백야는 자기 마음대로 아래에 있는 질문을 급하게 읽었다.
“데이즈의 공식 귀염둥이! 백야가 귀여운, 저… 이거 말고 다른 질문은….”
그러나 백야가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둘 율무가 아니었다.
“백야가 귀여운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아악!”
“음~ 아무래도 저희 집 복숭아는 ID의 철저한 품질 관리와 소나무 같은 취향으로 공동 선별된 복숭아기 때문에 신맛은 적고 당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게 특징이죠.”
“멈춰! 제발!”
“거기다 저 동글동글한 눈과 오뚝한 코, 앙증맞은 입술의 조합이 완벽한 삼위일체를 이루며….”
“아아아~”
백야의 귀여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율무에 백야가 귀를 막으며 안드끼오를 시전했다.
“아아아~ 안 들려, 안 들려.”
“초딩이냐?”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뗐다를 반복하던 백야는 유연의 말까지 못 들은 척했다.
한편 멈출 줄 모르는 율무의 복숭아 자랑에 민성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웅변 학원 출신이야? 무슨 말을 저렇게 잘해.”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멤버 자랑에 지한이 적당히 하라며 옆구리를 찔렀다.
뿌듯한 얼굴로 소개를 마친 율무가 엄지를 치켜들자 복숭아는 그제야 손을 내릴 수 있었다.
“너어는 내가 언젠가 꼭 복수한다.”
계획에도 없던 팔 운동을 하게 된 백야가 냥발을 벗어 던지며 선전포고했다.
백야는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율무차의 효능과 성분표를 달달 외워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죽었다 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