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아악! 내 몸에 손대지 마!”
“그치만 나잉이들이 무슨 맛 나는지 궁금하다고 하시니까~”
유연이나 청이라면 무는 시늉만 하고 놓아줄지 몰라도 율무는 진짜 물고도 남을 놈이었다.
율무가 지한에게는 꼼짝 못 하는 걸 아는 백야는 지한의 뒤에 숨어서 그를 경계했다.
저를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빼꼼, 오른쪽으로 빼꼼. 꼭두각시 춤을 추는 율무와 백야에 결국 지한이 나섰다.
“물지 마. NASA에서 잡아가.”
“한지한 너마저….”
백야가 배신당한 표정을 지으며 지한에게서 멀어졌다.
- 우리 지한이가 저런 말도 할 줄 알았다니....
- 오늘 여러모로 지한이 재발견
- 나사에서 잡아간다니ㅋㅋㅋㅋ 애들 복숭아에 진심인데?
마침 돌아온 민성이 어리둥절해하며 화면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이야기야? 누굴 잡아가?”
“NASA에서 햄스터 잡아간대!”
“그게 무슨 소리야?”
앞뒤 다 잘라먹고 결과만 말하는 청에 유연이 고개를 저었다.
“율무 형이 장난치고 있었어. 팬분들이 백도 깨물면 복숭아 맛 나냐고 물어보셔서.”
“아~ 그래서 무슨 맛 나는데?”
“몰라. 근데 뭐래? 우리 방송 더 해도 된대?”
“응. 시간 여유 있대.”
다음 연습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하자 나잉이들이 환호했다.
* * *
[데이즈 백야 · 배우 단아, 쇼! 플레이리스트 MC 발탁… 2일 생방송부터 합류]
다시 돌아온 토요일.
음악방송 출연을 위해 방송국을 찾은 백야는 멤버들과 다른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쇼플리 MC들의 첫 만남 비하인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함이었다.
어색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많이 하며 왔는데 역시나였다. 첫인사를 나눈 뒤로 대기실에는 정적만 가득했다.
“…….”
“…….”
매니저들은 스케줄 조율을 위해 두 사람만 남겨 놓고 대기실을 나가 버렸다.
각자 서로의 매니저를 기다리며 문만 힐끔거리기를 몇 분째.
정적을 견디지 못한 백야가 먼저 용기를 냈다.
“오늘 날씨가 좋네요.”
“그러게요. 햇빛이….”
없었다.
새벽부터 내린 비 소식은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며 전국으로 확대됐다. 우중충하기 짝이 없는 날씨였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원망하며 내적 이불킥을 하는데, 하필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우르르 콰광-!
놀란 백야가 제자리에서 통 튀어 오르다 테이블에 무릎을 찧었다.
“악!”
“괘, 괜찮으세요?”
“끕. …네에.”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커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화가 다시 단절됐다.
‘이거 최소 피멍이다.’
주먹을 꾹 쥐며 고통을 참아 보는데 단아가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 스무 살이요.”
“그러시구나….”
백야보다 두 살 많은 단아는 민성과 동갑이었다.
사전에 서로의 프로필을 확인하며 기본 인적 사항 정도는 보고 왔지만 예의상 물어보는 것 같았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니에요. 그래도 저보다 선배님이신데, 제가 어떻게….”
데뷔한 지 반년 정도 된 단아는 낯선 장소에 백야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그, 그럼 저희 같이 편하게 해요.”
“네. 언젠가는….”
어색한 대화가 한 번 더 끝을 보일 때쯤 매니저들과 제작진이 함께 돌아왔다.
어색함에 질식할 뻔했던 두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하자 제작진도 반갑게 받아 주었다.
“어머. 너무 반겨 주시는데요? 늦어서 미안해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더라고요.”
단아와 백야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제작진이 촬영을 해야 하니 나란히 앉아 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단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백야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긴 테이블을 돌아 백야가 단아의 옆자리에 앉자 제작진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케미가 좋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나란히 앉혀 놓으니 생각보다 더 잘 어울린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촬영은 30분 정도면 끝날 거예요. 간단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될 거니까 편하게 대답하면 돼요.”
“넵.”
대답은 곧잘 하면서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백야는 평소보다 눈을 더 또렷하게 뜨고 있었다.
“백야 씨 긴장 많이 하셨구나.”
“네? 아…. 멤버들 없이 혼자 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부끄러운지 손으로 부채질까지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 보는데, 옆을 보니 단아도 만만치 않게 긴장한 것 같았다.
결국 제작진은 인터뷰를 후 순위로 미루고 MC 신고식으로 할 스페셜 스테이지 무대의 선곡을 먼저 의논하기로 했다.
“두 분은 7월 첫째 주 토요일부터 진행을 하게 되실 텐데, 아무래도 여름이다 보니 시즌 송이 좋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어요.”
제작진이 들려준 곡은 두 개였다.
하나는 여름 향기가 물씬 나는 20년도 더 된 옛날 노래였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최신곡인 남매 듀엣 가수의 썸머 송이었다.
“두 번째 곡은 당연히 아실 거고. 첫 번째 곡은 생소하실 수 있는데 나 때 굉장히 유명한 곡이었어요.”
파도 소리로 시작되는 ‘나의 여름아’는 듣기만 해도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드는 곡이었다.
저희의 의사도 좋지만, 무대를 할 두 사람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제작진은 결정권을 단아와 백야에게 넘겨주었다.
“단아 님은 어떤 게 더 좋으세요?”
“저요? 저는 둘 다 너무 좋아하는 곡들이라….”
단아는 백야가 하고 싶은 곡으로 하자며 선택을 양보했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백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조심스레 물어 왔다.
“그럼… 두 번째 거로 할까요?”
“좋아요.”
이후에도 제작진은 두 사람과 의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매니저들은 각자의 스타일 팀에 전달할 사항을 메모했다.
“대충 정리된 것 같네요. 어느 정도 긴장도 풀린 것 같은데, 인터뷰 바로 진행해도 될까요?”
“네.”
두 사람의 대답에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왔다.
차례대로 소개를 부탁드린다는 말에 백야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데이즈의 백야입니다.”
“안녕하세요. 배우 단아입니다.”
이어서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MC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너무 좋았어요. 살았구나, 아니,”
너무 솔직한 나머지 마음의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당황한 백야는 입을 때리며 조금 전의 말실수를 수습했다.
“살… 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엔도르핀이 막 솟구치는 기분도 들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백야의 대답이 끝나자 단아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녀는 ‘사실 지금도 얼떨떨하고 좋은 기회가 주어진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수줍어했다.
“멤버들이나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번에는 단아가 먼저 대답했다.
“아직 매니저님밖에 모르세요. 오늘 인터뷰가 끝나고 나면 부모님께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친한 동료 배우들은 아직 없어요.”
비밀 유지를 너무 철저하게 해 주셨다며 제작진이 미소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차례는 백야에게 넘어왔다.
“백야 씨는요?”
“저는 다들 너무 축하해 줬어요. 어쩌다 보니 유연이가 제일 먼저 알게 됐는데, 저만 보면 축하 파티 언제 할 수 있는 거냐고….”
다른 멤버들도 음악방송 MC랑 잘 어울린다고 많이 응원해 주었다며 해사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팬분들께 한마디를 해 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나잉이 여러분들 아마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자주 찾아뵐 테니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단아도 백야와 비슷한 소감을 전하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 *
“잘하고 왔어?”
대기실로 돌아오자 지한이 반겨 주었다. 다른 멤버들은 불편하게 앉은 자세로 졸고 있었다.
“다 자네.”
“시끄러워서 내가 기절시켰어.”
“네가 말하면 진짜 같다고….”
“진짠데?”
한쪽 눈썹을 까딱이는 지한에 백야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청에게 다가간 개복치는 아닌 걸 알면서도 슬쩍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숨을 쉬나 안 쉬나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손가락에 바람이 닿질 않았다.
“뭐야…? 얘 왜 숨을 안 쉬지?”
당황한 백야가 몸을 낮추며 청의 안색을 살피려 들던 때였다.
“와악!”
“으갹!”
눈을 번쩍 뜬 청이 백야의 손목을 잡아채며 놀라게 했다.
“야! 놀랐잖아!”
“으하핫! 미팅 잘했어? 햄스터 기다리다가 심심해서 죽은 컨셉!”
이제 보니 단체로 자는 척을 하고 있던 거였다. 백야가 분한 얼굴로 노려보자 민성이 옆으로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여기 앉아. 고생했어.”
“형까지 이럴 거야?”
“나는 진짜 자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백야가 놀랄 때 민성도 자리에서 튀어 올랐던 것 같았다.
“미안. 착각했어. 한패는 저놈이었는데.”
백야가 유연을 노려봤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눈썹을 으쓱인 유연은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백도 어땠어? 가서 무슨 이야기 했어?”
멤버들은 첫 미팅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지한도 몸을 길게 빼며 백야를 바라보았다.
“그냥. 스페셜 스테이지 곡 정하고 의상 이야기도 하고. 간단히 인터뷰도 하고 왔어.”
“무대 뭐 하기로 했는데? 같이 MC 되신 분이 배우라고?”
“응. 단아 님. 형이랑 동갑이야. 내가 형 이야기하니까 아는 눈치던데?”
“그래? 같은 학교였나?”
민성은 생각나는 게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백야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키는 보통보다 조금 작으시고 단발머리였어. 지금 보니까 형이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근데 그렇게 말해 줘도 잘 몰라.”
보통 배우와 아이돌은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복도를 오가며 마주친 적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민성은 스치듯 지나쳤을 단아를 떠올리는 것보다 눈앞의 멤버가 더 중요했다.
“아무튼 백야야. MC 활동 잘하는 거까진 좋은데, 알지? 우리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야.”
남경과 눈만 마주쳤다 하면 듣는 잔소리를 이제는 민성까지 거들기 시작했다.
“알아. 안다고.”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지만, 백야만 빼고 다 몰랐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연애는 무슨.’
상태창을 불러낸 백야가 허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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